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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배를 담은 질그릇 / 고후 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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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보배를 담은 질그릇 (6/1)
본 문 고후 4:7~15
설교자 박봉수 목사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지금까지 어떤 자세로 사도직을 수행해왔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자기 자랑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기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주를 위해 충성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남다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고, 남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이고, 남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인 자기들은 바울처럼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물러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듣고 난 뒤 반응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도 저 사람처럼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놀라운 은혜의 주인공이 되면 좋겠다. 거룩한 열망을 품게 되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 사람은 신학 공부한 사람이니까 그렇지, 저 사람은 대대로 예수 믿는 집안 출신이니까 그렇지, 저 사람은 남다른 특별한 은사를 받았으니까 그렇지... 핑계를 대고 물러서는 경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열망이 일어나야 합니다. 도전 받고, 결단하고,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거룩한 열망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기록했습니다. 특별히 한 가지 비유를 들어서 말씀했습니다. 바로 질그릇과 보배의 비유입니다. 자기나 고린도 교인들이나 다 같이 질그릇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질그릇 같은 보잘 것 없는 자기에게 보배를 담아주셨기 때문에 사도로서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린도교인들에게도 질그릇처럼 보잘것없지만 보배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명을 다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중심으로 본문이 주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흙으로 빚어서 구운 그릇을 도자기라고 합니다. 이 도자기는 자기라는 사기그릇과 도기라는 질그릇으로 나눠집니다.

  사기그릇은 불순물이 적고 미세한 모래성분이 많이 포함된 백점토를 원료로 사용합니다. 구하기 힘든 흙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령에서 주로 난다 하여 고령토라 합니다. 이 흙에 유약을 바르고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굽습니다. 굽기도 힘들고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단단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물론 값도 비쌉니다.

  이에 비해 질그릇은 진흙이나 강가나 논바닥 같은 데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붉은 흙을 원료로 사용합니다. 이 흙을 그냥 굽거나 때로는 오지라는 잿물을 칠해서 굽기도 합니다. 그리고100도 이하의 약한 불로 구워냅니다. 그래서 굽기도 쉽고 투박하고 모양도 곱지 않습니다. 물론 값도 쌉니다.

  본문에 나오는 헬라어 원어로 오스트라키노스 스큐오스(ojstravkino"  skeu'o")라는 말은 바로 이 질그릇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나 고린도 교인들이나 오늘의 우리 모두가 다 이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 안에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가치가 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그 원료가 너무도 흔한 흙입니다.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그냥 공짜로 얻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특별한 기술 없이도 빚어서 구우면 되기 때문에 만드는데 별로 돈 드는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질그릇은 그릇 가운데 가장 값이 쌉니다.

  창 2:7을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우리 인간을 지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창 3:9를 보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질그릇이라 비유한 것은 정확한 말씀입니다. 흙을 빚어 만든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 인간과 질그릇은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우리는 흙일뿐입니다. 아무리 고상한척해 보고, 아무리 품위 있는 척해 봐도 우리는 흙일뿐입니다.

  사람들이 보석을 좋아합니다. 금으로 치장하고 싶어하고, 다이아몬드로 반지를 만들어 끼고 싶어 합니다. 루비니 싸파이어니 진주니 이런 것들을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흙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별 것 아닌 시계에도 다이아몬드를 악세사리로 장식하면 그 가치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아집니다. 그것처럼 사람이 흙인데 보석으로 치장하면 그 가치가 높아 보일 줄 알고 치장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본래 흙인 줄 안다면 겸손해야 합니다. 본래가 싸구려입니다. 잘 난체 해보고, 대단한 척해 봐도 하나님 보실 때 꼴불견일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너무도 쉽게 깨집니다. 질그릇의 성분은 흙 속에 여러 가지 물질들이 많이 섞여있습니다. 유리 성분도 많이 있고 각종 이물질도 많이 있어서 하나로 단단하게 응집시킬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약한 열로 구웠기 때문에 흙 성분을 완전히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집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강한 것 같지만 쉽게 주저앉고 쉽게 깨지고 맙니다.

  저는 군에 있을 때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목격했습니다. 제 옆에서 두 사람이 장난삼아 몸싸움을 했는데 한 사람이 주저앉아서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밀쳤는데 머리가 벽에 부딪혀서 충격이 왔는지 그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죽는구나!’ ‘인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약한 존재로구나!’ 크게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다윗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다윗은 시 39:4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자기가 강한 줄 알고 외칩니다. “나는 내 주먹을 믿는다! 나는 내 실력을 믿는다! 나는 내 재산을 믿는다!...” 우리가 연약함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12:9-10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약함을 깨달을 때 철저하게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고, 그 결과 주님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기 때문에 약하다고 깨달을 그 때가 정말 강할 때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 같이 보잘 것 없고 약한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서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는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배가 담겨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나 우리나 이 세상 모든 인간들 모두 질그릇같은 존재이지만 하나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우리 안에 보배가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10절 이하를 보면 그 보배는 바로 예수의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릇의 가치는 그 그릇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그릇에 무엇을 담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금으로 만들었어도 거기에 오물을 담는다면 그 그릇은 요강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그릇이 비록 질그릇일지라도 왕의 옥쇄를 담았다면 그 그릇은 옥쇄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심령 속에는 예수의 생명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우리가 그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함과 동시에 예수의 생명은 바로 우리 심령 속에 담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예수 생명을 담은 질그릇, 다시 말하면 예수 생명함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떤 사람의 심령 속에는 오물보다 더 더러운 세상의 죄가 가득 담겨있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외모가 출중해도, 아무리 그 사람이 배운 것이 많아도, 아무리 그 사람이 세상에서 유명하다고 해도 하나님 보실 때 요강이나 쓰레기통처럼 보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의 심령 속에는 예수의 생명이 담겨있습니다. 아무리 외모가 추하다고 해도,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볼 때 형편없는 존재라고 해도 하나님 보실 때는 보배함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의 생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치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져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다른 것들이 담겨져 있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 그 안에 의인 10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의인 10사람 그들이 다른 사람들 수십 수백 만 명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우리는 주님 보실 때 귀한 존재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보는 올바른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그릇의 가치가 그 안에 담긴 것에서 결정되듯이 사람의 가치도 그 안에 담긴 것으로 결정됩니다.

  사람의 가치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외면적 가치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 가치입니다. 외면적 가치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사람의 가치를 말합니다. 외모, 학벌, 능력 같은 것입니다. 반면에 내면적 가치란 선한 양심, 깨끗한 마음, 사랑으로 충만한 성품 같은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말씀하는 예수의 생명입니다.

  이 세상 풍조는 외면적 가치에 초점을 맞춰서 사람을 인정합니다. 특히 여성의 가치를 외모에 두는 풍조 때문에 세상이 혼탁합니다. 학벌 지상주의가 만연해서 교육문제를 풀 길을 찾지 못합니다. 능력 여부 때문에 연공서열이 파괴되고 공동체에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눈으로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외면적 가치보다 내면적 가치에 초점을 맞춰서 사람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을 귀하게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반대로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외면적 가치가 뛰어나더라도 불쌍히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람 보는 눈을 제대로 가져야 하겠습니다.


보배가 능력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약한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경험을 들어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복음을 전하느라 수많은 고생을 했지만 그런 고생 속에서도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안에 있는 이 보배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고생을 8-9절에서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 우겨쌈입니다.

  8절을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적이 공격해 와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견디고 끝내는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보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견디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고전 10: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며 또한 시험 당할 때에도 피할

길을 주심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당해서 피할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앞에도 뒤에도 양쪽 옆에도 어디에도 피할 길이 열리지 않아서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피할 길은 앞에서도 뒤에서도 양쪽 옆에서도 열리지 않습니다. 바로 저 위에서 열리는 것입니다.


둘, 답답한 일입니다.

  8절을 보면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답답한 일은 억울한 일, 황당한 일, 기가 막힌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너무도 억울하고 기가 막힌 일을 당했을 때도 낙심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우리로 하여금 낙심치 않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믿었던 신복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했습니다. 너무도 기가 막힌 상황을 맞았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시 28:7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시면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찬송할 수 있고, 나아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 핍박입니다.

  9절 전반부를 보면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자기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당하고, 예수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수 없이 받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신 3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안에 보배를 담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끝까지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모른 채 하지 않으십니다.


넷, 거꾸러뜨림입니다.

  9절 후반부를 보면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오뚜기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홍수환이라는 복싱선수가 생각이 납니다. 카라스키야라는 선수와의 세계 타이틀 매치는 복싱 역사상 길이 남을 명승부로 꼽힙니다. 이분이 7번이나 다운을 당해서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결국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KO로 이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보배는 우리가 넘어져도 일어나게 해주고, 다시 세워주어서 결국은 승리하게 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보배가 담겨있습니다. 바로 예수의 생명입니다. 이 보배가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합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어 승리하게 합니다.

<간구의 기도>

          우리가 질그릇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보배이신 예수의 생명을 바라보게 하시고 의지하게 하옵소서
          어려움가운데서도 늘 승리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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