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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름받은 사람들 / 마 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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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18-22
설교자 : 김형준

어떤 목사님이 시골 마을 어귀 정자나무 밑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목사님, 솔직히 말해서 천국과 지옥이 있나요?” 질문을 듣고 목사님 속으로 잘됐구나 싶어 대답했습니다. “예, 그럼요! 천국이 있지요. 천국에는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없이 너무나도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노인이 다시 질문합니다. “목사님, 천국이 그렇게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는데, 그곳에 누가 가 본 사람이 있나요?” 이 질문을 듣고 목사님이 약간 당황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했습니다. “할아버지 천국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라 가본 사람은 돌아오질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 세상일 다 잊어버려 소식도 없어요.” 이 말을 듣고 노인은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말했습니다. “그렇지, 그렇게 좋은데 왜 올까?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신앙 생활하는 것은 참 좋지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에게 부담되는 것이 대략 2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헌금’입니다. 헌금문제로 시험에 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중단한 사람도 보았습니다. 헌금을 강조하기도 혹은 하지 않기도 애매합니다. 두 번째로 헌금보다 더 부담되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를 가르치기에 헌금보다 오히려 명분이 없습니다. 전도에 관한 설교, 전도와 관련한 제도 등 전도와 관련한 무언가를 하자고 하면 왠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것처럼 억지로 끌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부담을 많이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전도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일이 아닌 생명과 관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신앙성숙을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부담스럽게 느끼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주님 주신 사역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를 왜 하지 못하는가 이유를 생각해 보면,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이야기, 이치에 맞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설득하면 듣습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는 사람이 확신이 없을 때는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두려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난 지성인이고 괜찮은 사람인데, 만일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면 나를 달리 보지 않을까?’ 또 어떤 분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특별히 남에게 다가가는 것을 주저하기도 하고, 거절당할 것을 염려합니다. 이렇듯 전도는 어려운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를 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 가운데 있던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반드시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 이라 하셨습니다. 우리 죽음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요, 이것을 자연적인 죽음에서 확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연적인 죽음 이외에 또 다른 죽음, 즉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생명이 가려질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죄는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 보혈의 피로 해결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사망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형벌로 향하던 운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가 좀 더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갈릴리 바닷가를 다니시며 찾으셨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큰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 쉽게 말해 도를 배우고 닦고자 하는 사람은 스승을 찾아 나섭니다. 배우고자 하는 이가 스승을 찾아가는 것이 세상 이치고, 또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일반적인 상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셔서 그 필요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깨우쳐 주시며 초청하신 장면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구원 사역을 위해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 것이라 생각합니까? 교회도 중요한 일 앞두고는 일꾼을 찾기 위해 신중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에 사활을 거는 경영자들은 좋은 일꾼을 위해 심지어 관상가까지 데려다 놓고 신입사원을 뽑습니다. 사람을 선택하는데 있어 중요함을 우리도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을 찾으실 때에, 지혜와 총명이 넘치고 똑똑하고 교양 있고 존경할 만한 사람 가득한 헤롯 궁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또 종교적으로 깨끗하고 윤리적인 생활을 하는 제법 품위를 갖춘 사람 가득한 예루살렘 성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소외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 없이 살다 인생의 벽 앞에 부딪혀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루하루 근근이 벌어 먹고 살아가는 갈릴리 바닷가로 가셔서 제자를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닷가를 거닐었다 할 때, ‘거닐었다’는 ‘묵상하면서 지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또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고 할 때, ‘보았다’는 세심하게 관찰했는데, 어느 정도까지 관찰하되 상대방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까지도 소상하게 들여다 볼 정도로 관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A.D. 1세기 경에 240여 척의 배가 있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찾아가셔서 만나셨다고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다 만났지요? 주님을 만났을 때 여러분이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였습니까? 사람들에게 칭송과 칭찬 받을 때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사업이 번성하고 부족함 없을 때였습니까? 종교적, 윤리적으로 생활을 잘 관리할 때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도 떠나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외롭고 고독한 때에 찾아오셨고 만나주셨습니다.

톨스토이가 쓴 ‘돌과 두 여자’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노인에게 두 여자가 찾아와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고백합니다. 노인이 한 여자에게는 “너는 가서 큰 돌을 하나 가지고 오너라.”, 또 한 여자에게는 “너는 작은 돌 여러 개를 가지고 오너라.” 고 합니다. 각자 돌을 들고 오자 마자 노인은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돌을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아라.” 큰 돌을 가지고 온 여인은 쉽게 그 자리에 갖다 놓습니다. 그러나 작은 돌을 가지고 온 여인은 원래 있던 자리가 도무지 어디인지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내 입장에서 큰 사건들을 통해 받은 하나님 은혜와 구원은 기억하지만, 미처 알지 못하는 수많은 하나님 은혜를 잊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구원 받을 가치 없는 나를 택하여 하나님 자녀 삼아주셨던 그 순간, 인생 고비마다 붙들어 주셨던 은혜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고 맙니다. 큰 돌멩이든 작은 돌멩이든 물속에 넣으면 다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물에 뜨는 공에 돌멩이를 매달아 놓으면 가라앉지 않습니다. 가라앉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주님 보혈의 피로 다시 물위에 띄우시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요청하시는 일 앞에 너무나 무관심하게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마냥 부담스러워만 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가 전도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주님을 따라갈 때 우리를 자연스럽게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 꿈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주님께서 만드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다듬어 가고자 하는 모습이 바로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잘 따르는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모두가 지금 사람 낚는 어부가 돼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신학을 하든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고기를 낚던 어부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다는 것은, 이 땅에 썩어지고 가치 없는 일과 자신을 위해서 살던 인생이 영혼을 소생케 하기 위해서 사는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삶의 목적, 삶의 의미를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는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 주부도 직업입니다. 교사도 있고, 언론에 종사하는 분, 금융업에서 일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주님께서 본업으로 삼도록 우리를 그 직업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직업을 통해 생명을 전하기 원하셔서 그 직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선생님을 예로 들어 봅시다. 선생님은 살아갈 때 필요한 지식을 공급해 주는 것이 그 직무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생활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지식 전달에서 그치지 않고, 그 영혼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전달하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선생님들의 그 선생이라는 직업은 더 이상 본업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란 직업을 통해 진리를 가르치고 생명을 나누도록 하기 위해 그 곳에 두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헌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일을 하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전도하고 또 우연히 기회가 되면 하나님 뜻을 전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본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따라갈 때 내가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만들어 가십니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 ‘진돗개 전도왕’ 이 있습니다. 이분 전도방법을 한마디로 진돗개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번 물면 주인이 놓으라고 할 때까지 놓지 않는 방법입니다. 제목이 재미있어서 읽어보았는데, 순천시청 지방행정사무관을 역임했고 4대 순천시 시의원인 박병선 의원의 간증을 엮은 책입니다. 이분은 350년 전부터 조상대대로 순천에서 살아오신, 장손중의 장손이었습니다.

이분이 예수 믿는 아내와 결혼하며, 교회만 나가게 해달라는 결혼조건에 약속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너무나 많은 제사 때문에 교회에 나갈 시간이 없어 포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합니다.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는데 이유가 없습니다. 병원에 가도 병명이 나오질 않고 이제 죽겠다 싶은 순간에 아내가 “여보, 나 기도원 좀 다녀와야겠어요. 거기 가면 살 것 같아요.” 하더랍니다. 그런 아내에게 “당신이 기도원가서 병 나으면 의사들 다 굶어죽어. 기도원은 무슨 기도원이야. 그냥 병원치료나 잘 받아.” 라고 하며 처음엔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치료에도 차도가 없자 아내를 기도원에 보내게 되었는데, 10일만에 완전히 살아서 새사람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때 ‘어, 뭐가 있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일주일을 더 보내달라는 아내의 말에 이번엔 겁이 나서 보냈다고 합니다. 이후 잃어버린 신앙도 되찾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에는 자신만 빼고 어머니, 누이동생 다 교회를 나가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혼자만 믿지, 가족을 모두 데리고 나가 나를 완전히 고사시키려고 작정을 했구나’ 생각하던 어느 날 이분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한 첫 날, 교회 장로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장로님들, 장로님들도 한명씩 전도 하십시오. 나머지 교회 빈자리는 제가 다 채우겠습니다.” 연약하고 병들어 불쌍한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뜨거운 마음이 솟구쳐 얘기하기는 했는데 집으로 돌아와 생각해보니, 자신은 예수의 ‘예’자도 잘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전도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방 의원 선거 유세 때문에도 바쁜데 그것은 조금도 걱정이 안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전도하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은 한번 딱 물었다 하면 절대 놓지 않습니다. 완전히 골초라 하더라도, 술에 찌든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분에게만 포착되면 반드시 교회 나오게 되었고, 그것도 혼자가 아닌 술친구와 함께 나왔답니다.

여러분, 이 열정과 열심이 어디서 왔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따라가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주시고 인도해 가십니다.

십만 명 이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던 R.A.토레이 목사님도 우리가 왜 전도해야 하는가에 대해 정리한 것이 있어 소개해드립니다. 첫 번째로 전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명령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8장 18절 19절에서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명령하셨는데 이 말씀은 명령이면서 동시에 유언이기도 합니다. 유언은 강한 효력이 있습니다. 평소 부모를 등한시했던 사람도 유언은 듣고 행합니다.

토레이 목사님에 따른 두 번째 이유는 전도가 주님 당신의 본업이었고 삶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여러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식사도 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시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기도 하시고, 슬픈 자를 방문하기도 하시는 등 다양한 일들을 하셨는데 한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근본 동기는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하신 그 일을 우리도 하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도, 병든 자를 치유하신 것도, 귀신을 쫓아 내신 것도, 멸시와 천대 십자가를 지신 이 모든 것이 모두 한가지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도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와 풍성한 관계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 19절 말씀 이후 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모든 사람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며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겠다 말씀 하십니다.

전도 훈련을 하시는 민경석 목사님과 전화통화하면서 들었던 말씀입니다. “김목사,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문제가 너무 많아. 너무 지치고 힘들게 만들어. 근데 말이야, 전도해봐. 교회 본질인 영혼 구하는 일에 초점 맞추면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안되. 문제를 일으킨 사람도 어느새 다 떨어져 나가.” 복음의 본질 앞에 설 때, 즉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교인들이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변하여 활력을 찾고 성령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선교 역사가 증거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면서, 주님께 부름 받은 우리 자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제자들이 ‘나를 따라 오너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즉시’ 떠났는데,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부모를 버려두고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음성을 순종하고 말씀에 순종하려면 옳다고 생각하고, 나를 지지해 주던 생각들을 깨뜨려야만 합니다. 희생이 없이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스트리아에 경제학자인 슘베터 교수도 “경제도 발전하려면 새로운 혁신(innovation)이 있어야 하는데, 이 혁신은 창조적인 파괴(creative destroy)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파괴가 있어야만 새로운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옛 질서를 가지고 살았으나 이제는 죽음의 질서가 아닌 깨어진 옛 질서, 주께서 주신 새로운 질서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생명의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지금 이 시간, 내게 익숙한 고정관념과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부모를 버려두고 떠난 자식이 제대로 된 자식이냐?” “배와 그물이라는 자신의 소유권을 포기했는데, 그게 인간이냐?” 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자들이 그곳에서 멈췄다면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주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 아니 전세계에 생명의 역사를 나누어 주는 큰 구원 방주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가족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많은 생명의 가족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초대교회도 처음에 그리스도인들끼리 좋다고 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지도자를 순교시키면서까지 교회를 흩으셨습니다. 흩어버릴 때에 교회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만약에 흩어지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지류로 끝났을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익숙한 것을 깨뜨려 버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 없이는 창조적으로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주님 말씀에 지금 이순간 완전히 순종할 때, 우리는 전도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있었던 시카고의 한 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은 명문대학이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대학 캠퍼스는 미시간 호수를 끼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이 학교에 에드 스펜서와 윌 스펜서라는 농부출신 형제가 입학합니다. 어느 날 그 지역에 배가 난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펜서 형제와 다른 학생들이 달려갔습니다. 난파한 배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붙들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자 에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옷을 벗어 던지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파편에 눈이 찔려 피가 쏟아짐에도 탈진할 때까지 무려 17명을 구출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계속 헛소리를 했습니다. “저 사람들......저 사람들……저 사람들……”  그러자 윌이 말했습니다. “형, 형 17명이나 구출했어. 대단한 일을 했어.” 그러나 형은 “17명 보다 자신을 좀 구해달라며 외치는 사람들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 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난파당한 배와 같지 않습니까? 가정이 깨져 깨어진 조각하나 붙들고 위태위태한 인생을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사업 터 뿐 아니라 우리 삶의 윤리와 도덕이 난파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살려달라고 외치는 그 사람 앞에 생명의 주님을 증거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참 소망을 가지고 우리 인생의 의미를 다시 발견할 삶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원하십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구하고, 보내지 않았느냐?” 주님 요청 앞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자들은 곧 일어나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 말씀에 순종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순종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계속 순종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침 7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지각하는 학생은, 저녁 7시에 만나자고 해도 역시 지각하는 학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음성 앞에 복음으로 인한 부담감을 가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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