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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용서하며 삽니다 (마 6: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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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용서하며 삽니다(마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지금부터 4년 전인 1999년 7월 4일이었습니다. 그날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이었습니다. 또한 주일날이기도 했습니다. 윤원준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와 같이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불루밍턴에 있는 한인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교회로 들어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는 난데없이 날아온 총탄에 맞아서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습니다. 벤자민 스미스라는 백인우월주의자가 무차별로 난사한 총에 맞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몇 일 뒤 그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는 당시 미국의 법무장관을 비롯해서 약 1500명의 조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장례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그의 사촌형이었던 박승호 목사님이 유족들을 대표해서 조객들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 그의 인사말을 들었던 어떤 사람은 이러한 표현을 했습니다.
"저는 제 몸이 감전된 것처럼 온 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의 인사말은 이러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분명하고도 큰 소리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벤자민 스미스를 용서하며, 미국을 용서하겠다는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우리 가족을 대표해서 내 사촌 동생을 죽인 벤자민 스미스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아울러 내 형제의 꿈을 빼앗아가고 그의 피를 흘리게 한 이 미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족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벤자민 스미스와 미국을 용서합니다."
그의 인사말을 들은 조객들은 모두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눈시울을 붉히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흔히들 우리 기독교를 가리켜서 사랑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사랑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용서 없는 사랑은 결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도 결국은 용서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아직도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서 풀지 못하고 맺혀서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다 풀어버리고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난 뒤에, 오늘 본문에서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기도에 관한 가르치심을 끝맺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주기도문 안에는 모두 6개의 간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다섯 번째 간구가 무엇이었습니까? 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용서에 관한 간구였습니다. 6개의 간구 가운데서 예수님이 보충적으로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신 것은 다섯 번째 간구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용서가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기도에 관한 가르치심을 용서에 대한 말씀으로 마무리하셨겠습니까? 우리의 용서가 우리의 기도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체험적으로도 얼마든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에 미움의 쓴 뿌리를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으면 우리의 마음이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기도 생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 생활을 못하는데, 어떻게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 받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 생활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도 용서하는 일이 먼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하면서, 용서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용서와 관련해서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용서의 이유입니다.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합니까?
둘째로, 용서의 방법입니다. 어떤 식으로 우리가 용서해야 합니까?
셋째로, 용서의 비결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 세 가지를 차례대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용서의 이유입니다.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14-15절에서 예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은 똑같은 내용을 14절에서는 긍정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부정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용서하면 용서받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죄를 짓고 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그 죄를 그대로 가지고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죄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가 있습니까? 원리는 간단합니다. 용서하면 용서받고,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옛날 어떤 나라의 왕궁에 사람들을 웃기면서 즐겁게 하는 어릿광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행동으로 왕과 신하들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어릿광대가 공놀이를 하다가 그만 실수로 왕이 가장 아끼는 도자기를 깨뜨려버렸습니다. 왕은 그의 경솔한 행동에 너무나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왕은 자기도 모르게 그 어릿광대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잠시 후 왕은 마음에 진정을 찾고 나자 자기의 명령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왕으로서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 명령을 다시금 돌이키는 것은 왕의 권위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곰곰이 생각하던 나머지 그를 사형에 처하기는 하지만,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줌으로서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로 했습니다. 어릿광대는 왕 앞에 섰습니다. 왕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너의 마지막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 그러니 네가 죽을 방법을 스스로 선택해서 내게 말하도록 하라. 자, 지금 해가 중천에 떠 있다. 해가 서산에 질 때까지 잘 생각해서, 네가 죽을 방법을 내게 말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어릿광대는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보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드디어 해가 서산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어릿광대는 다시금 왕 앞에 섰습니다. 왕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 이제 죽을 각오가 되어 있겠지? 그래 어디 죽을 방법을 말해보아라."
그때 어릿광대는 만면에 미소를 띄면서 태연한 모습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저는 폐하의 은혜로 제가 죽을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었습니다. 저는 늙어서 죽는 방법을 택하겠습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입니까? 물론 왕은 약속대로 그를 살려주었습니다.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만일 그 어릿광대가 왕에게 불평을 말한다든지, 원망을 한다든지, 또는 살겠다고 도망을 쳐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필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릿광대는 자기를 살리고, 자기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오직 왕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이 시키는 대로, 왕의 말대로 해서 왕의 용서함을 받고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용서하면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하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용서하면서 삽니다. 따라서 우리는 용서받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강퍅했습니다. 그들은 용서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도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요한복음 8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하루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에게 끌고 왔습니다. 그들은 그 여인을 가운데 세우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그 여인을 정죄했습니다. 그리고는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들었던 돌을 모두 내려놓고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다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강퍅해서 용서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도 용서받지 못하는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서 용서하면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우리도 용서받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복된 자들입니까?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용서하면 용서받고,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랑하면서 용서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용서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용서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방식대로, 예수님의 방식대로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두 번 다시 우리의 죄악을 기억조차도 아니하십니다. 용서는 한 마디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일단 용서했으면 깨끗하게 잊어야 합니다.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그때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할찌니라."
예수님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7×7=49,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입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수첩에 용서할 때마다 한 번, 두 번 기록을 해서 490번까지만 용서하고 491번째 용서하지 않는다면, 애당초부터 그는 용서하지 않은 셈이 됩니다. 실제로는 그의 마음 속에 처음부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490번이 아니라, 4900번, 그 이상까지라도 무제한적으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과거를 들추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과거를 추궁하면서 그를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베드로의 아픈 과거를 들추어내면서 그를 질책하셨다면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베드로야, 네가 다른 사람은 나를 다 버린다 할지라도 너만큼은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큰 소리하지 않았느냐? 그러던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말이냐? 내가 너에게 그토록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했건만, 네가 잠을 자더니 결국은 나를 이렇게 부인하고 말았구나!"
만일 예수님이 베드로의 아픈 과거를 들추어내면서 그를 책망하셨다면,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주여, 그렇습니다. 저는 구제불능자입니다. 저는 도무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아마도 제자의 길을 극구 사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과거를 들추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 가지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음에 따라서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되었다. 너는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과거를 기억치 않으시고, 그의 모든 잘못을 깨끗하게 용서해 주셨습니다. 일단 용서하면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합니다. 용서는 잊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개구쟁이 소년이 살았습니다. 그 아이는 장난기가 매우 심했습니다. 아이가 가는 곳에는 어디에나 사고가 잇따랐습니다. 그릇이 깨졌습니다. 유리창도 깨졌습니다. 아이는 두들겨 패든지 두들겨 맞든지 늘 사고뭉치였습니다.
아이의 부모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아무래도 불량배가 될 것 같습니다. 하루는 그의 부모가 기도를 하고 난 뒤에 아이를 불러놓고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얘야, 네가 한 주간만 아무 일 없이 잘 견디면 우리가 너에게 큰상을 주겠다. 한 주간 동안 아무 일 없이 잘 견뎌보아라."
아이는 용케도 일주일을 잘 견뎌냈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부탁을 지켰습니다. 부모님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들은 약속대로 아들에게 후한 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신기한 듯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착하구나! 용케도 잘 참았구나! 그런데 그토록 착한 아이가 왜 지금까지는 그 모양이었느냐?"
그러자 아이는 벌떡 일어서면서 부모님에게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아빠! 엄마! 아빠, 엄마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도무지 예수님을 닮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저의 과거를 기억치 아니 하신다는데 왜 아빠, 엄마는 저의 아픈 과거를 다시금 들추어내세요?"

그렇습니다. 용서는 잊는 것입니다. 나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기억나게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되 우리의 죄를 두 번 다시 기억조차 아니하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옮기셨습니다. 일단 용서하면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려야 합니다. 다시금 기억조차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용서해야 될 방식인 것입니다.


셋째로, 용서의 비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비결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될 사람을 밉게 보지 말고, 곱게 보아주면 됩니다. 잠16:4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악을 행했습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비록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를 너무 밉게 보지 말고 곱게 보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 캐나다의 토론토에 거대한 수족관 하나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속에 태평양 연안에 있는 물고기들을 수집해서 전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트럭으로 두 주일에 걸쳐 운반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었습니다.

태평양의 물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온도와 햇빛의 양까지 적절하게 조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조심스럽게 운반해도 막상 토론토에 도착해 보면 이상하게도 물고기들이 다 죽어서 물 위에 둥둥 떠있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이고 시도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똑같은 결과였습니다.
전문가들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그 결과 비로소 물고기들을 죽이지 않고 성공적으로 운반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방법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물고기들 사이에 상어 새끼, 문어 새끼 등과 같은 바다의 악동들을 함께 집어넣어서 운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물 속에 바람을 계속 불어넣어서 인공적으로 물살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마리도 죽지 않고 다 살아왔습니다.
바다 속의 물고기들은 바다 밑을 흐르는 거센 조류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기 마련입니다. 또 언제 자기들을 해칠지 모르는 수많은 악동들 틈바구니 속에서 긴장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오히려 물고기들로 하여금 삶의 강한 의지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트럭 안에서도 물결에 흔들리고, 또 악동들로 인해 물고기들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바짝 긴장해 있는 가운데 순식간에 두 주간이 흘러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환난의 바람이 불어닥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에 활력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우리를 위해서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코 형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곱게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애굽에 종으로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들 앞서 나를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면서 형들을 기꺼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형들을 밉게 보지 않고 곱게 보아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우리에게 피해를 주었습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가 망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사람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겸손해 지고,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더욱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용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정신을 차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계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밉게 보지 말고 곱게 보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 그 사람이 내게 행한 한 두 가지 잘못 때문에 미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에게는 그것 이외에 좋은 점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그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사람이 내게 행한 한 두 가지 잘못 때문에 그를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에게 있는 훨씬 좋은 점들을 생각하면서 그를 곱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얼마든지 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해 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용서와 관련해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용서의 이유입니다.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합니까? 용서하면 용서받고,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용서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용서해야 합니까?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일단 용서하면 두 번 다시 기억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용서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용서할 수 있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비록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밉게 보지 말고 곱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나와 너와의 인간관계 속에서 아직도 풀지 못하고 맺지 못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다 풀어버리고 마음에 자유함을 누리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그는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리할 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습니다. 그의 마음은 천국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할 것을 다 용서해 줌으로서 마음에 평강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의 얼굴이 그 옛날 스데반의 얼굴처럼,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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