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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가 요한의 신앙따라... / 막 14: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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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가 요한의 신앙 따라...
본문 / 막 14:50-52

  오늘은 마가라는 사람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이 마가에게는 훌륭한 어머니와 좋은 신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행 12:12절에는 마가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성경에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저택을 소유하고 잇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고 물질적으로 넉넉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입니다. 마가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차려서 대접하였고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수 있는 장소로 자신의 집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 강림 후에도 성도들은 이 집에 모여서 정기적인 예배 뿐 아니라 특별 기도회 등으로 (행12:5,12) 모이는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 이곳이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의 삼촌 바나바의 신앙 

  골 4:10절에 보면 바울이 마가를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하고있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마가가 영적으로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삼촌인 바나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그는 최초로 자기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함으로서 교회가 구제와 봉사 활동을 하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입니다.
  (행 4:36-3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2) 마가는 열심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14:51-52 에 보면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청년이 바로 마가 요한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다음과 같이 상상할 수있습니다.
  마가는 그 날 밤 자기 집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이 거행될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마 만찬의 심부름을 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찬이 마쳐지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셨고 그는 자기 집에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한참 잠을 자고 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낫습니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예수님이 군인들에 의해 결박당하여 끌려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가는 황급히 일어났습니다. 미쳐 옷을 입지 못하고 홑이불로 대충 가리고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얼마나 급하였으면 옷을 입을 겨를도 없이 결박당해 끌려간 주님의 뒤를 따랐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열심을 내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따름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따를 대상은 그리스도입니다. 
 

  3) 마가는 인간적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심과 사랑이 있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따르다가 군병 하나가 마가를 이상히 여겨 잡으려고 했습니다. 순간 마가는 두려웠습니다. 그는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사랑하여 따랐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만나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면 주님 따르기를 포기하는 경우를 봅니다.
  진실하고 온전한 신앙은 변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변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히3:14절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처음 시작한 것을 확실히 끝까지 잡는 것입니다.

  마가의 약점은 시작은 잘했으나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싶게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앞 뒤 가리지 않고 벗은 몸으로라도 따라나서는 열심 내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는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런 마가의 약점은 바울과 선교 여행을 동행하였을 때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행13:5절에 보면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종자는 받들어 섬기는 자 또는 협조자라는 뜻입니다.
  알포드라는 신학자에 의하면 마가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를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세례 베푸는 일을 도왔으며 전도 여행의 경비를 관리하고 전도사역의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을 맡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를 수종자로 두고 바울 선교팀은 순조로운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실루기아에서 배타고 구브로 섬에 도착하여 살라미에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구브로 섬을 중앙으로 약 180km를 횡단하여 남서쪽에 위치한 바보라는 도시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을 전도하였습니다.
  바보에서 구브로 총독을 전도한 바울 일행은 사기가 충만해져서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라는 도시에 이르렀을 때에 마가 요한이 일행에서 이탈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마가 요한이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유를 성경은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의하면 여러 가지 이유들을 설명합니다.

  1) 처음부터 구브로 까지만 동행하기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2) 삼촌 바나바를 따라왔는데 바울이 선교의 주도권을 잡고 바나바가소와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3) 고향을 그리는 향수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 그리고 용기 부족 등을 꼽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모두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이유야 어쩻든 이 사건은 은혜 가운데 선교활동을 하던 바울 일행에게 큰 아픔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행 15:38절에 보면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다시 2차 전도 여행을 계획할 때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는 바나바의 말을 용납치 않고 심한 의견 대립을 벌이다가 결국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하여 따로 따로 전도 여행을 하는 것을 보면 마가는 바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즉 선교의 대열에 끼였다가 도중하차 하였습니다.
  그것은 마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선교팀 전체에 상당한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마가를 대단히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4) 그럼에도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쓰십니다. 
  실수하고 실패한 사람 마가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쓰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쓰셨습니까?

  1) 바나바와 함께 쓰셨습니다.
  2차 전도 여행시에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제멋대로 행동한 마가를 다시 데려갈수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한 번 실수 했지만 그에게 한 번 기회를 주자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심한 의견 대립을 보이다가 서로 갈라서서 전도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행15:39) 그리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수리아와 갈리기아로 떠났습니다.
 
  2) 바울과 함께 쓰셨습니다.
  바울은 마가를 못마땅해 했지만 오래 동안 그러지 아니했습니다. 그것은 마가가 한 번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바나바와 더불어서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딤후4:10절에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후에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그를 영접하라고 편지하고 있음을 봅니다.(골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3) 베드로와 함께 쓰셨습니다.
  마가는 베드로와도 깊은 동역자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벧전 5:13절에서 베드로는 마가를 가리켜서 "내 아들 마가"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복음서 중에 두 번째 책인 마가 복음을 이 마가 요한이 기록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실패와 실수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이 악점에도 불구하고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 번의 실수와 실패는 그렇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음에 있는가 입니다. 쉽게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을 하나님은 쓰십니다.

  식물의 사생활이라는 책을 쓴 식물학자 데이비드 애튼보로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의 고대 유적지를 발견했을 때에 찾아낸 작은 씨앗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학자들은 발견된 것들 중에서 흠이 없는 작은 씨앗 하나를 흙에 심었습니다. 그리고 열시히 물을 주며 관찰했습니다. 놀랍게도 거기서 싹이 텃습니다. 자라서 그곳에서 목련화가 피었습니다. 현대의 목련화와는 꽃잎의 수가 다른 고대의 목련화가 피었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꽃씨는 수 백년을 땅 속 깊은 곳에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왔습니다. 수 백년이 지난 어느날 그 꽃씨는 생명의 기운을 찾게 된것입니다.
  무던히 길고 긴 세월동안 기다렸던 그 씨앗이 마침내 싹이텃습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로겠습니다. 아주 작은 씨앗, 보잘 것 없지만 그 곳에 싹을 티울 수 있는 생명력이 있고, 생명력이 있으나 어떤 환경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냥 수백년이라도 뭍혀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작은 씨앗 말입니다.
  인간은 본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창1:26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받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실패와 좌절을 격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바로 오늘의 마가입니다.
  어떤 책에서 실패에 관해 아주 좋은 명언들을 모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실패는 당신이 실패자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패는 다만 당신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음을 의미할 뿐이다. 실패는 당신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패는 다만 당신이 무엇인가를 새로 배웠음을 의미 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있습니다.
  실패는 당신의 위신이 손상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패 는 다만 당신이 무엇인가를 용감히 시도했었음을 의미할 뿐 이다. 실패는 당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패는 다만 당신이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의미할 뿐이다.
  실패는 당신이 인생을 낭비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패는 다만 당신이 다시 출발해야 할 좋은 이유를 갖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실패는 당신이 결코 해 낼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 패는 다만 시간이 더 오래 걸릴 뿐임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습니다.
  실패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계획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879년에 독일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성장하면서 남달리 수줍음을 많이 타고 지적 성장이 늦어 아버지에게 큰 걱정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그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정신적인 진료를 받았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이 아이가 배우는 것이 더딘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1895년도에 스위스 쥬리히 대학 시험응시 했으나 낙방했습니다. 그러나 일년 후에 다시 시험을 치른 결과 합격의 영광을 맞이했습니다. 그 후 부터 그 청년은 배움의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학자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이슈타인 박사입니다. 그는 실패가 자기 인생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실패와 싸워 이긴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용기를 냅시다.
  바울의 곁을 떠났던 사람 그래서 많은 아픔과 상처를 주고 자신도 아픔을 격었겠지만 그의 믿음은 실패했으나 실망하지 않는 믿음이었기에 결국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처럼 우리 모두가 실패 때문에 실망하지 말고 실패  때문에 오히려 더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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