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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치 말라 / 눅 6: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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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6:39-45
제목: 비판치 말라-2 (비유로 말씀하심)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내용입니다. 자신을 통하여 선지자들에게 약속된 종말의 희년의 때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짐을 가르치며 전파하십니다. 이 희년의 때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포로 된 자가 자유를, 눈먼 자가 다시 봄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되는 때 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세우시는 나라가 긍휼과 자비의 나라이며 평지설교도 예수께서 세우시는 긍휼의 나라 법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37-45도 이어지는 계속된 긍휼의 계명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37-38은 직접적인 명령을 통하여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39-45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인데 특별히 제자들에게 내적인 정결을 요구하면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39-45은 비유의 내용에 따라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39-40, 41-42, 43-44, 45입니다. 39-40은 소경의 비유, 41-42은 들보의 비유, 43-45은 나무와 그 열매의 비유를 통한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서로 다른 비유이지만 반복하여 한가지 내용을 말씀하는데 내적인 정결과 온전함의 요구를 통하여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여기서의 예수의 말씀은 어느 누구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며, 또한 누구도 온전한 내적인 정결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비판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기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교회의 해석들은 사람의 본성은 부패하고 타락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도 여전히 옛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죄 없이 온전한 자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제자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을 드러내고 그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비판하지 못하도록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예수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긍휼과 자비를 얻어 온전케 된 백성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그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온전히 이룰 수 없는 내적인 정결을 말함으로 그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로 지켜 순종하여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제자들로 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9-40은 소경의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로 선생처럼 완전할 것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이 소경의 비유는 마태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관련하여 바리새인들을 묘사하는 비유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는 것은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의 핍박과 관련된 문맥에서 사용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는 문맥에서 사용됩니다. 그들은 외모로 형제를 판단하고 형제를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형제의 허물에 대하여 구약 율법처럼 너와 나는 다르다는 방식으로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먼저 제자들은 자신부터 눈을 떠야 하며 선생처럼 온전하게 되어 형제를 인도하고 형제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선생처럼 온전케 되지 못하고 구약 율법의 기준을 따라 형제의 허물에 대하여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한다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도 함께 어둠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이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한 기준에 도달 한 후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존재의 변화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은 이제 주님의 제자들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의 온전함을 따라 살라는 언약적인 온전함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구약 때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에 기업을 주시고 안식을 허락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을 따라 형제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으로 온전하게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자비와 긍휼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해를 성취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어 하나님 나라를 선물 받는 긍휼과 자비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생인 예수께서 긍휼과 자비로 낮고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을 자기 백성 삼으신 것처럼 그들도 그 선생의 온전함을 따라 온전케 되어 형제를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그 긍휼과 자비로 형제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41-42은 들보 비유를 통하여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소경 비유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하여 두 가지 수사적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 둘 질문은 한 내용인데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예수의 질문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입니다.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은 앞의 소경 비유에서 제기 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피조물로서 허물을 가지고 있고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의 온전한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비판해서는 안 되며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 심리와 잘 맞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종교 심리적으로 너희 중에 온전한 자가 없으니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 율법에 토대를 두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성취하여 희년의 때를 선포하시는 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는 종말의 희년의 때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제자들이 지켜야 될 법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옛 가나안 땅 하나님 나라 언약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어서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가르침의 내용을 보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 하나님 나라에서도 긍휼과 자비의 법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객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구약의 근본 질서는 율법의 제도를 따라 비판하고 판단하는 질서였습니다. 자기 자신도 율법 안에서 판단을 받아야 하고 형제도 판단해야 합니다. 그 판단의 질서 아래서는 크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 유대인 중에서도 제사장-레위 지파-일반 백성, 그리고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종과 자유자, 그리고 몸에 허물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외적인 거룩과 부정의 판결과 비판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판단과 비판의 질서를 따라 하나님 앞에 서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온당하지 못한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제 새로운 희년의 때를 선언하였습니다. 이 희년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몸에 허물이 있는 자들이 치료함을 받는 나라입니다. 허물 있는 자들이 죄 용서함을 받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오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는 가나안 땅의 법을 가지고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제는 형제를 판단하고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나라의 왕이신 예수의 제자로 사는 자들은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제 예수의 제자로 온전케 되어야 합니다. 이 온전함은 자기가 온전케 됨으로 이제 다른 사람을 판단 할 수 있다는 온전함이 아닙니다. 예수의 비유는 네 눈 속에 들보를 빼면 이제 형제의 티를 보고 형제를 비판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네 눈 속에 들보를 빼면 형제의 티를 보고 형제의 티를 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형제의 치료자가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모세 율법 아래서는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하는 자였지 치료자는 아닙니다. 만약 형제에게 이런 저런 허물이 있고 죄가 있다면 자기 스스로 형제를 치료하고 형제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형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 형제가 모세 율법의 판단을 받도록 비판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 자신도 율법의 범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우시는 긍휼과 자비의 나라에서는 자기 자신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온전케 될 뿐만 아니라 형제도 온전케 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 온전케 되는 것은 예수께서 세우시는 새로운 긍휼과 자비의 나라 백성으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인 온전함이 아니라 언약적이고 관계적인 온전인 것입니다. 이 온전함은 이 문맥에서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따라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형제를 용서하고 형제를 선한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43-45은 나무와 그 열매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들보 비유와 계속되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비유는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비유로 사용되지만 누가복음은 간접적으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 대한 비유로 사용됩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찔레에서 포도를 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의 말씀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정결과 온전함을 말씀합니다. 앞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여기서 말씀하는 마음의 정결과 온전함도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도 마음이 온전한 자가 없고 모든 사람은 죄인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신앙 고백서와 그리고 이 부분의 해석은 사람은 피조물이며 또한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에 온전함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은 후에 새 본성이 창조 되었지만 여전히 부패한 옛 본성이 남아 있고 우리가 죽거나 예수 재림하실 때 새 본성이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곳에서도 우리 마음의 본성의 부패와 선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 구조론으로 접근하여 마음의 본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존재론적 속 구조로서 마음이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과 관계 곧 하나님 나라 언약에서 사람과 마음을 이야기 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은 속 마음이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의 왕국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세계를 통치하도록 세움 받은 첫 조상이며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순종함으로 그 나라를 생명과 의의 나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범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속한 모든 인류와 모든 생명의 세계는 죄와 사망의 나라를 상속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담 아래 속한 모든 자는 죄와 사망을 열매 맺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하나님 나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 그의 권세에 복종하는 자들은 예수와 함께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고 죄를 이기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 때는 일본의 권세 아래서 일본의 종으로 살았지만 해방되고 나서는 우리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변화는 마음의 본성의 변화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예수의 말씀도 부패한 속 마음이 선으로 가득하면 그 때 선을 낼 수 있고, 너희들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암시를 주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의 비유에 이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선이 가득하면 선한 말을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선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예수께서 세우시는 나라 백성으로 서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로 예수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모세 율법 아래서 가나안 땅 나라의 긍휼과 자비로 선을 열매 맺는 백성으로 남아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것은 악입니다. 그 악에서 열매 맺는 말은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우시는 희년의 때에 이루어지는 나라의 백성으로 서는 자는 예수의 긍휼과 자비를 따라 주님의 백성으로 서야 합니다. 그것이 선을 쌓는 것이며 마음의 정결함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형제를 치료합니다.

평지에서 제자들에게 긍휼의 나라의 법을 선포하신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평지에서 부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체험하고 주의 나라를 선물 받은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 보좌 우편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림을 받아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우리는 그의 나라 백성과 제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는 보좌 우편의 긍휼과 자기의 나라와 성령을 자기 제자들에게 선물하기 위하여 대속죄물로 죽으셨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구약 때 다윗이 고난을 받았고 영광을 받았지만 그의 고난과 영광은 모든 의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본은 되었어도 자기 백성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여 성령을 선물 받아 보좌 우편의 권세로 살게 하는 죽음과 고난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죽음으로 끝난 왕이기 때문입니다.또한 구약의 다윗과 의인들은 오히려 고난 중에 비판 받을 자가 비판을 받고 정죄 받을 자가 정죄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오른 손으로 높이 들리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시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아버지께로부터 약속의 성령을 받아 자기 제자들에게 선물하였습니다. 보좌 우편의 긍휼과 자비의 나라를 선물하신 것입니다. 이 선물은 구약 가나안 땅의 회복으로 말미암는 젖과 꿀의 풍성함과 다릅니다. 예수께서 지상에서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선물과 자비와 다릅니다. 구약 때는 의인들에게 가나안 땅의 부요함으로 복주시고 자기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었고 예수는 지상에서 옛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알리고 선포하기 위하여 이런 저런 자비의 이적을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좌 우편의 나라의 선물과 자비는 세상이 무너뜨리지 못하고 죽음이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천하만민이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을 힘 입어 그 권세 참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 만민의 구주가 되셔서 천하만민을 자기 제자로 부르시는 긍휼과 자비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이스라엘의 비천한 자보다 더 비천한 이방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받아 회개의 세례를 받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에 참여한 자들이 되어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을 회개시켜 보좌 우편의 나라로 세례되어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로 하늘 보좌 우편의 상으로 불러모아 주의 살과 피의 교제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나라를 선물 받았고 그의 아들들이 되었으니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을 따라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고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명의 부요함으로 형제를 섬기고 공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을 선물 받아 보좌 우편의 긍휼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고 우리가 이 관계로 믿음으로 깨어 형제를 섬기면 거기엔 어떤 부정과 흠도 티도 없으며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 율법과 같은 기준으로 너와 나는 다르다는 식으로 형제를 나누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도 옛 방식으로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는 소경이며 악한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 선생이신 주님처럼 온전케 되어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여 자기 자녀 삼으신 은혜와 자비를 따라 형제를 봉사하고 섬겨야 하며 형제의 허물도 치료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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