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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계신 가정 (막 1: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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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계신 가정 
성경본문/ 마가복음1:29-31

  어떤 부인이 자신의 가정생활이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제가 너무 괴롭습니다. 나, 예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보내주세요. 나, 예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로 보내 주세요.” 너무나 간절히 기도하니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소원에 응답해 주마. 그런데 하늘나라로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좀 요청할 일이 있는데 몇 가지만 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이 부인은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첫째로 네가 하늘나라 오면 장례식을 해야 할 텐데 집안이 너무나 어지럽혀져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장례식에 왔을 때 사람들이 보고 이 사람이 끝까지 깨끗하게 잘 정리하고 갔다는 그런 얘길 듣도록 집안 청소 좀 할래?” “그럼요. 하겠습니다.”

  그래서 집안을 깨끗이 정돈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예수님이 자기의 정원을 가리키시면서 “저 정원 좀 내다봐라. 네 뜰이 작은 정원이지만 풀을 깍은 지 오래된 거 같은데 사람들이 이 사람이 정원에 한 번도 손도 대지 않고 갔다고 하지 않겠느냐? 기왕에 갈 바에야 정원 손질 좀 하고 가는게 어떻겠느냐?” 그래서 “알겠습니다”하고는 며칠 동안 열심히 땀을 흘려서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꽃도 새로 심고, 열심히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러자 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됐다. 자, 한 가지 더 부탁하겠는데 너, 이 시점에서 떠날 때 네 자식들이 마음에 걸리지?”라고 묻습니다. 부인은 “그렇습니다. 주님”하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자식들에게 며칠간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의 표현을 좀 해 봐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해 봐라.” 그래서 부인은 “알겠습니다. 주님”하고 대답하고는 며칠 동안 자식들을 끌어안고, 안아주고, 손을 잡아주고,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고, 특식 만들어주고,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너, 네 남편이 너 속 썩인 거 내가 잘 안다. 정말 밉지? 네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겠느냐? 그러나 내가 마지막 부탁인데 남편이 장례식 치르면서 ‘참 그래도 좋은 여자였는데…’ 이런 추억을 가질 수 있도록 사흘만, 꼭 사흘만, 남편이 뭐라 하더라도 절대로 말대답하지 말고, 남편에게 할 수 있는 한 마지막 친절을 베풀어 보도록 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인은 이를 악물고 “알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사흘 동안 열심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오시더니 “하늘나라 갈 시간이 되었구나. 네 집을 한 번 더 돌아보려무나”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집을 죽 훑어봤어요. 그랬더니 아주 잘 정돈된 정원에서는 꽃이 피고 있었고, 집안도 깨끗이 정돈이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실로 오래간만에 자녀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의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한 구석에서 무척 괴롭고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순간적으로 이 부인의 머리 속에서 ‘아, 내 집이 좋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때 예수님이 곁에 오시더니 “너 가기 싫지?”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부인이 “예, 그렇습니다. 이상한 일이네요.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리고 결혼한 이후로 처음으로 제가 제 집이 좋구나,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왜 그런 줄 아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네가 내가 하라는 그대로 하지 않았느냐?” “예, 그대로 했지요.” “맞았어! 네가 내가 한 말에 순종하고, 복종했기 때문에 네 집은, 네 집은 내가 다스리는 집이 된 거야. 내가 다스리는 집이 된 거야. 그리고 내가 다스리는 집이 천국이란다. 내가 다스리는 집이 바로 천국이란다.”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께서 한 집에 들어가십니다. 누구의 집에 들어가시죠? 시몬과 안드레의 집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형젭니다. 형제니까 시몬의 집, 즉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9절에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배경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21절을 봐야합니다. 마가복음 1장 21절을 한 번 함께 읽겠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 가 가르치시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면 회당으로 모입니다. 그리고 랍비가 오면 그에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회당예배에서 강론을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신 겁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중간에 갑자기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름으로써 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일에 예수께서 관여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었겠죠. 그러나 귀신들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고, 해방을 주시고, 기도하고, 회당의 예배는 드디어 마무리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아 마 피곤하셨을 겁니다. 그때 본문이 이렇게 시작되죠?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성지 순례를 하시면, 갈릴리에 가시게 되는데, 갈릴리에 가면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을 방문하게 됩니다. 가버나움 앞에 이런 간판이 붙어 있답니다. 예수님의 마을, 예수님이 살던 마을, 가버나움. 이 마을에 들어가면, 거기에 회당이 있습니다. 지금도 회당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 복음서에서 강론하셨다고 생각되는 그 회당의 터전 위에 회당을 세워 지금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바로 “시몬의 집”이라는 집터가 있습니다. 시몬의 집이 이 회당에서 가깝답니다. 한 10미터, 20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회당예배가 끝난 다음에 예수님이 피곤하셨겠지요. 그걸 알아차린 제자 중에 하나가, 아마 틀림없이 시몬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제자 중에 항상 제일 먼저 나서는 게 항상 이 베드로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이 베드로가 “선생님, 저희 집에 가서 좀 쉬시죠. 안식을 하시죠.” 아마 이렇게 초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 베드로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시몬은 자기 부인하고 의논도 안 했겠지만, “내가 가면 우리 부인도 기뻐할 거야. 뿐만 아니라 우리 장모님도 기뻐하실 거야.”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시몬의 장모님은 아마 요리를 잘하는 요리사였을 가능성이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시몬은 일종의, 남편 중에서도 분류를 해 보면 쩔처가에 속합니다. 쩔처가. 처 소리만 들으면 쩔쩔매는 사람. 그래서 아주 특이한, 특이한 현상 하나가 있는 데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오직 베드로만 늘 자기 부인을 데리고 전도여행에 동반한 것 같은 흔적들이 성경의 여기저기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바울서신에도 보면 바울이 이런 말을 하죠? “우리가 게바처럼, 저 베드로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없겠느냐?” 생각나시나요? 저 베드로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없겠느냐? 항상 이 마나님을 모시고 다녔을 겁니다. 마나님을 모시다 보니까 자기 집에 장모님까지 모셨습니다. 아마도 자기 장모님 생각하고, 아내 생각하고 예수님을 모셔 갈 그 생각을 했을 때는 장모님이 아프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장모의 발병은 돌연할 발병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식사대접 하려고 모셨을 가능성이 충분히 많습니다. 점심때가 지났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딱 들어가 보니까 장모님이 아파 누워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그건 의외의 사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미안해서 베드로는 아무 소리 못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장모님을 고쳐달라고 말한 것은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이걸 보면 아마도 베드로가 자기의 장모를 고칠 목적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다면 베드로가 처음부터 그 얘길 했을 거예요. 자, 오늘 본문에 보시면 누가 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달라고 말합니까? 누구였습니까? 30절을 읽어보세요.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누가 말했어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안 그랬어요. “사람들이.”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이 집에서 예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들어가는 모든 집에선 항상 역사가 일어나요. 그리고 그 역사는 항상 좋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어가는 집마다 항상 사건이 일어납니다. 항상 좋은 사건이요. 자, 제가 이 사실을 이 서두에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도 여러분, 베드로의 집에서 일어났던 이 사건. 동일한 사건이 우리 집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들어오시면.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갔을 때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 이 놀라움의 사건들, 축복의 사건들, 그 동일한 사건이 오늘 우리의 집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때 일어날 수가 있다. 이 사실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믿으십니까? 성도 여러분, 산다는 것은 문제와 더불어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없는 삶의 장이 있을까요? 문제가 없는 가정이 있을까요? 어떤 인생도 문제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금세기에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유명한 놀만 빈센트 퓨어 목사님에게 어느 날 청년 하나가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다니는 직장에 너무너무 문제가 많습니다. 문제없는 직장 하나 소개 해 주시죠.” 그때 두말 않고, 이 빈센트 퓨어 박사님이 “아, 그래요? 내가 마침 생각나는 직장이 하나 있는데 내 차 타시겠습니까?” “오, 지금 소개해 주신다고요?” “예, 지금 소개해 주겠습니다. 내 차에 타세요.” 그래서 이 청년을 태우고 어디론가 갑니다. 뉴욕 시외로, 교외로 나갑니다. 그리고 빈 센트 퓨어 박사가 공동묘지 앞에서 갑자기 차를 머추더니 “형제여, 여기가 문제가 하나도 없는 직장이오. 문제가 하나도 없는 직장”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살아간다는 것은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없기를 바라는 인생. 이 사람은 더 피곤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제를 도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문제를 피하는 사람마다 언제나 더 커다란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그것이 모든 인생의 경험한 바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피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면 더 커다란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일으킨 상대방을 피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을 바꿔 보려고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남편도 바꾸더라구요. 아내도 바꿔 보고. 그런데 해결이 아니죠. 직장을 바꿔 봅니다. 해결이 아니에요. 심지어는 교회생활도 그렇습니다. 교회 생활하다가 조금 봉사에 어려운 일 생기면 “바꿔 볼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이 아니에요. 피하는 것은 언제나 해결이 아닙니다. 진정한 승리는 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부딪혀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크리스천의 행복이 어디 있을까를 가끔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은 문제가 없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의 장에 아직도 문제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넌 크리스천과, 불신자와 비교할 때 다른 것이 하나 있어요. 우리는 문제의 해결자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내 곁에 계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으십니까?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전지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고, 그리고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저는 믿지 않는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늘 제 마음 속에 어떤 민망함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김이 있습니다. 자, 보통 때는 불신자들도 아주 행복한 것 같지만 인생의 폭풍우를 만나면 저 사람들은 누구에게 호소할까? 누구에게 호소할까? 대부분의 믿지 않는 사람들, 자기 믿고 사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한계에 부딪힐 때, 내 지성, 내 생각, 내 노력 그리고 내 방법이 통하지 않는 절박한 상황에 부딪힐 때, 누구한테 가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붙들고 호소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답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 번은 예수님의 어머님이 예수님 모시고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죠? 그런데 혼인잔치에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건 잔치에서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잔치음식이, 잔치의 가장 중요한 메뉴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황합니다. 걱정 합니다. 그런데 걱정하지 않는 분, 딱 한 사람 있었어요. 누구입니까? 예수님 빼 놓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기에 예수님이 계신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에수님이 문제의 해결자인 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한테 가서 얘기해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뭐라고 말했어요?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생각나십니까?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그 분이 해결자예요. 그 분의 말씀대로 하면 문제는 극복될 것입니다. 극복되었죠? 해결되었습니다. 문제는 있습니다. 더불어 있습니다. 아직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자가 우리와 더불어 함께 있는 한 우리는 문제를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예수님을 문제의 장에 모시면 즉각적으로 해결돼요. 어느 한 순간 눈 녹듯 사라집니다. 그럴 때도 있어요. 본문의 케이스가 그런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 모시고 기도해도 당장은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어요. 오래 갑니다. 오래 가요. 그러나 감추어진 어떤 이유 때문에 오래 지속하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되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수수께끼, 그 삶의 무거운 장벽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길이 보여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침 내 해결될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결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풀렸어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월이 지나간 후, 시간이 지나간 후, 돌이켜 보았더니 주님의 방법이 더 좋았던 방법인 것을 깨닫습니다. 만약 내 요구대로, 내가 주문한 그대로 주께서 응답하셨더라면 나는 더 커다란 인생의 곤고함을 경험했었을 것을. 그래서 주님이 이런 방식으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나보다 내 인생의 형편과 내 가정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이 그래서 이렇게 이 고난과 시련을 허용하셨구나.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오시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해결자이신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집에 오시면 두 번째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냐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은 문제의 해결보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보다도 더 좋은 거예요.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체험한다는 것은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일회성 문제해결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당한테 갈 때 무당하고 계속 관계를 가지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만 해결하면 돼요. 푸닥거리하고 그 문제만 해결 받고 오면 돼요. 그건 일회성 문제해결이에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님 앞에 오라고 초청하실 때 예수님은 일회성 문제해결을 약속하는 분이 아니라 그분은 그보다 더 중요한 영원한 관계 속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가 아니에요. “내게로 오라”하실 때 우리 주님은 우리와 관계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과정에 있어서, 문제의 응답을 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혹은 복음을 수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문제도 해결되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고, 그 분이 얼마나 위대한 구세주요, 주님이 신가! 그 분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 분인가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과 나 사이에 영원한 사랑의 관계가 생기게 돼요. 이것은 더 좋은 축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장면을 보면, 대단히 암시적입니다.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31절을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그런데 이 구절만 딱 읽으면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고치셨을까? 우리가 이런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그러니까 아파서 누워 있는 이 시몬의 장모를 “일어날찌어다!”하며 손으로 잡아 일으키셨을까요? 그렇게 생각되세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8장 15절을 찾아보세요. 마태복음 8장 15절을 보시면 같은 사건과 기사를 취급하고 있던 마태는 마태복음 8장 15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그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똑 같은 사건을 마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잡아 일으키시니”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의 손을 만지시더라.” “만지시더라.” 여기서 만진다는 말은 희랍어의 매우 부드럽고 섬세한 만짐을 표현해 주고 있는 그러한 단어입니다. 그녀의 손을 만지셨다. Touch했다. 만지셨다. 만지셨다. 아마 저는 이렇게 했을 것 같아요. 가서 “아프세요? 많이 아프신 모양이죠?” 손을 잡고 “아유, 고통스러우시겠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고쳐드릴께요. 저를 믿으세요. 한 번 일어나 보시지요?” 그리고 열병은 떠나갔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래요. 확실한 건 주님 나라에 가서 주님을 만나서 확인해 봐야 알지만 말이지요. 제가 생각 할 땐 주님이 그렇게 고쳤을 것 같아요. 여러분, 복음서를 보면 주님이 병자들을 고칠 때,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고치십니다. 한 가지 방법이 아녜요. 어떤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어떤 때는 만지지도 않고 말씀만 하세요. “고침받을지어다.” “가서 봐라.” “나았다.” 또 어떤 때는 진흙을 가지고 눈에 바르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이에요.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 이 여인의 경우, 시몬의 장모의 경우, 말씀으로만 고칠 수도 있는 이 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명령할 수도 있어요. 특별히 귀신과 대결할 때, 그럴 때는 예수께서 단호한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물러갈지어다.” 뭐 이런 단어를 사용 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거 하나만 보고 병 고치는 기도하는 분들이 꼭 한 가지 방법만 쓰시는 분들이 있어요. 어떤 분 은 항상 두들겨 패면서 기도하는 분들이 있어요. “나갈지어다!” 이런 사람도 있어요. 네. 그런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어떤 경우에는 조용히 만지셨습니다. 뭘 느꼈을까요? 시몬의 장모가. “아! 이분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이 분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것은 더 좋은 체험이에요. 더 중요한 체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주 앞에 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더 좋은 주인, 주님이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 분이 구세주라는 것을 안다는 것. 그것은 더 좋은 사실 아녜요? 제가 목회생활 하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계기가 병 때문에 믿는 분들이 많아요. 질병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요. 그런데 교회당 나오고, 예수님 영접하고 어떤 분들은 기도하자마자 병 나음을 얻어요. 실제로. 그런데 저를 놀라게 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자, 병 때문에 교회 나왔고, 병 때문에 기도 시작했고, 병 때문에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데도 병이 났질 않아요. 아, 그러면 믿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런데도 계속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도 계속 예수 믿어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면, 그는 기도하는 과정에 있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놀라운 분인가를 깨닫습니다. 그는 자기 병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깨닫고, 예수님이 죄에서부터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 영접하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체험해요. 그리고 그 분은 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을 이기더라구요, 승리하더라구요. 그것은 더 놀라운 축복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다는 것. 이것은 더 위대한 축복이에요. 더 놀라운 축복이에요. 그렇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그가 우리의 가정 속에 들어오시면,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만져 주시면, 그의 만짐을 경험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신 주님. 그 사랑으로 새로워진 바울. 바울의 한 평생을 지배하던 놀라운 감격의 고백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 “이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 우리가 이 사랑을 체험하고, 이 사랑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보다 놀라운 체험. 우리 가정에,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이 하나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체험이 일어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우리 집에 들어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세 번째로는 섬기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다 섬기는 자가 될 것 입니다. 자, 31절에 다시 보시면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낫고, 나니까 얼마나 감사와 감격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을 수종했다. 여기서는 ‘저희에게’라고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8장 15절에 보면 예수께 수종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쳐주신 주님,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주님, 제가 섬기겠습니다.”
  열심히 밥도 하고, 식사도 준비하고 또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들을 섬기고…. 그때만 했을까요?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여기서 “수종들더라”는 말이 미완료 과거형으로 나옵니다. 계∼속 섬겼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사건이후에도 이 여인이 주님을 계속 섬기는 여자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의 증거입니다. 은혜 받은 자의 증거, 은혜를 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 한 사람, 구원받은 사람, 마음 속에 감사가 있어요, 감격이 있어요, 이런 사람은 가만있지 못해요. 주님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위하여 섬기는 자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저는 한 평생 이 여인이 주님을 섬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사건을 누가복음을 통해서 관찰하면서 그런 느낌을 갖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시면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절 이하에 보시면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이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 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주님이 무엇으로 전도 역사를 계속 하실 수가 있을까요? 주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사람, 특별히 여인들의 헌신-여기 보면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저는 이 여인들 속에는 틀림없이 시몬의 장모도 끼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3장에 보시면, 드디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십니다. 쓰러지고 일어서고, 또 넘어지면서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우고 이 언덕을 오르시던 주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던 일단의 여인들,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그때 예수님을 따르며 울고 있었던 여인들 속에 저는 시몬의 장모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요. 지나친 추측일까요? 자, 누가복음 23장 55절입니다. 예수님은 드디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때 그 분의 무덤과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동산에 올라왔던 여자들이 있었어요. 55절에 그들은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가버나움은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갈릴리에서 여기까지 찾아 나온 여인들. 그분에게 받은 사랑, 그분에게 받은 은혜, 이 은혜를 잊지 못하고 평생에 자기 생애를 걸고 주님을 좇으며 주님을 섬겼던 여인들, 그들은 드디어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부활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부활의 증인으로 서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 중에 시몬의 장모가 있었다고 믿습니다. 한 번 주님의 은혜를 정말 경험한 사람, 한 평생 주님을 섬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가 없어요. 저는 교회에서 가만히 보면, 교회에서 봉사하는 분들 가운데에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을 봅니다. 한 분은 은혜 받지 못하고 그냥 교회에 봉사하는 분들이 있어요. 교회 생활에 익숙해 져서 봉사는 해요. 그런데 구원은 몰라요, 하나님의 영광을 몰라요, 복음의 은혜를 몰라요,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몰라요. 그냥 봉사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분들의 봉사는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해요.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집어치웁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도 봉사하다 보면 어려운 일도 있어요. 끝까지 봉사의 자리에 서는 사람은 사람 생각하지 않고 우리 주님 바라보고 주께서 내게 주신 은혜,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주께서 내게 은혜를 주시고 이 놀라운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들-평생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섬겨요.

  제가 얼마 전에 책에서 재미난 것을 읽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신학교 갓 졸업한 목사님인데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흥분해서 설교 준비 잘 해서 원고도 안 보고 멋있게 설교를 하겠다며 시작했는데 너무 흥분한 나머지 설교의 초반을 이상하게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키가 작은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키가 작은 니고데모는 너무 너무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나머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성도들이 좀 수군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젊은 목사님이 잘못 말한 것을 깨닫고 갑자기 말을 바꾸어서 “그 순간 삭개오가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니고데모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니고데모야. 내가 올라갈 자리에 네가 왜 올라가 있니? 빨리 내려와라. 그리고 그는 그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나서 삭개오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자기 평생을 걸고 예수님을 섬겼고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을 만난 사람을 한 평생 주님을 섬겨요. 저는 시몬의 장모가 인생의 황혼의 마무리가 가까왔을 때 그는 자기 사위에게 얼마나 감사했을까? 어느 날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청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의 고난, 병들었던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구원을 체험했던 시몬의 장모는 얼마나 사위에게 감사했을까요?

여러분, 우리들의 부모님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많이 있습니다. 가정 주일, 어버이날. 우리는 사랑하는 부모님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들 얼마나 하겠습니까? 우리 가 그 분들 곁에서 함께 동행해 드린 들 어디까지 가겠습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부모들이 죽음의 다리를 건너갈 때 아무도 같이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사랑하는 어머니,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 우리의 부모님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면 그들은 예수님 붙잡고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는 예수님을 손을 잡고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 죽음의 다리를 건너 영광 속에 들어갈 줄을 믿습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효도가 어디 있습니까?

  부모님 여러분,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어느 부모인들 최선을 다해서 자식에게 해 주고 싶지 않은 부모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붙잡아 놓고 자식들에게 아무리 사랑과 친절을 베풀어도 끝까지 자녀들을 붙들어 둘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부모의 곁을 떠나갑니다. 걱정해 도 소용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모 여러분,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해준다면 부모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때 부모가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을 때 그들은 내가 소개해 준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의 주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그들은 승리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것이 있다면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식들이 부모를 위해서 해드릴 수 있는 최대의 효도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 만날 수 있도록 해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 부모의 손을 잡고 인생의 황혼을 평안과 여유와 안식 속에 사시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시고, 우리는 내 사랑하는 부모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를 또한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집에 오시면 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구원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주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가족들이 같이 오셨습니까? 곁에 있는 가족들의 손을 잡아 보세요. 친구들, 교회 안에서 믿음의 우정을 나누고 있는 믿음의 식구들과 손을 잡으세요. 기도해 드리십시다. 내 사랑하는 남편, 내 사랑하는 아내, 내 사랑하는 부모님, 예수님 손 붙들고 인생에서 승리하도록, 거친 비바람 광야 속에서 마침내 승리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실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 주님의 손을 든든히 붙잡을 수 있도록, 내 사랑하는 남편, 내 사랑하는 아내, 내 사랑하는 부모님, 자녀들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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