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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 전 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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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본문말씀 : 전 7:1-14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조금 전에 해금 독주 “주 안에 있는 나에게”를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똑같은 찬송인데 네 가지 방식으로 연주하는 것을 보면서, 찬송도 어떻게 연주하는가에 따라서 느낌도, 은혜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도 그냥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이 그런 말씀입니다. 지혜롭게 사는가, 어리석게 사는가?

  솔로몬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1절). 무슨 말입니까? 이름이란 자기 자신을 말합니다. 내 인생이 어떻게 끝나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마지막에 좋은 이름, 아름다운 이름, 덕이 되는 이름, 모든 사람에게 유익과 축복이 되는 이름으로 인생을 끝내는 것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기름은 성경에서 기쁨, 축제, 번영을 상징합니다. 그저 잠시 잠깐의 기쁨, 행복감, 금방 지나가는 것들보다도 마지막 가서 어떤 사람으로 끝날 것인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아, 죽으면 그게 최고구나, 죽어버리자’ 그런 뜻이 아니고, 그 사람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죽는 것이 좋은 집에서 좋은 환경에서 출생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보잘 것 없거나 비극으로 끝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지요. 사실 아기가 태어나면 참 기쁘지요. 조금 전에도 제가 아기들을 위해서 축복했지만 아기들이 앞에 나오면 앉아 계신 여러분의 얼굴이 모두 다 환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기들은 기쁨을 주는 귀한 생명이요, 그 아기를 기다려온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다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자마자 축하하고, 백일이 되어서 축하하고, 돌이 되면 축하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 아기의 생명이 자라가는 것을 보면서 모두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부부가 결혼한 지 1년쯤 되면 서로 시들해 지기도 하는데 아기가 태어나면 부부관계에도 새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러므로 출생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아기가 인생의 마지막에 어떤 이름을 남기고 죽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기는 하지만 어리석은 인생을 살고 지혜롭지 못하게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 번 이라크가 전쟁에서 패하고 바그다드에서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넘어질 때 제가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태어났을 때 그 부모와 온 가족이 얼마나 기뻐하며 축하했을까?’ 60대 중반에 그 동상이 끌어내려지고 초상화가 구둣발로 밟히는 사람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지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요. 마지막이 어디인지, 결과가 어떤지, 내가 죽을 그 날이 어떤 날일지를 생각하면서, 영원한 결과를 놓고 하루하루를 살았어야지요. 히틀러, 스탈린, 무솔리니도 태어날 때는 큰 축하들을 받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의 인생이 끝났을 때는 더러운 이름이요, 망할 이름이요, 악한 이름을 남겼습니다. 몇 년 전에 ‘막가파’라는 젊은이들이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재판을 받아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아들을 낳았다고 그 어머니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 아버지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 젊은이들이 그렇게 인생을 마칠 것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지혜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길을 걸으면서 사사건건이 지혜롭게 살지 못해서 마지막에 처참하게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죽는 것이 축하를 받으며 출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끝이 더 중요합니다. 결과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의 제목이요, 목적이요, 또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려면 몇 가지 유념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인생이 짧다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인생, 살같이 빠른 광음, 안개 같은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인생은 잠간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초상집은 슬픈 집입니다. 초상집에 가면 죽음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초상집에는 여러 번 가셔야 됩니다. 자주 초상집에 가서 인생이 무엇인지, 이 분이 어떻게 인생을 끝냈는지, 어떤 이름을 남기고 세상을 끝냈는지 보면서 나에게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두고 늘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살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이에요. 마지막을 보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장례식에 가는 것이 결혼식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은 금방입니다. 어른들과 대화해보면 연세가 많을수록 ‘아, 어느새 인생이 지나갔다. 아무것도 안 해 놓았는데 인생이 갔다’고 말씀합니다. 무얼 하고 살았는지 기억도 없는데 벌써 한 인생이 갔다는 것이에요. 인생은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여러분의 행복이 20년 후에 오는 것이 아니고 오늘입니다. 오늘 내가 어떤 지혜를 가지고 어떻게 사는가, 어떤 결정을 하며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 살아야 어느 날 어느 시에 이 세상을 떠나도 후회가 없어요. 왜? 날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신실하고 선하게 살았기 때문이지요. 인생의 마지막 호흡을 하는 그 순간에 후회가 없는 거지요.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새로운 것을 깨닫기 때문이에요. 암을 이긴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겪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인생의 전망이 완전히 바뀝니다. 인생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내 옆에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지요. 그래서 “눈물을 뿌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웃음으로 거두리라” 하셨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였습니다. 하루라도 의미 있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삶이 지혜롭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어디인지,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지혜가 여러분과 제게 있기를 원합니다. 모세도 시편 90편 12절에서 “우리가 지혜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의 날을 계수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를 가르쳐 주셔서 매일의 삶을 계수하면서 살게 하시고 이 삶의 과정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그저 쾌락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로, 인생의 쾌락도 결과를 생각해야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칭찬과 노래 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자의 노래보다 낫다”(5절)고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책망하면 듣기 싫어도 들어야 됩니다. 부모가 책망을 하면 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들어야 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고 연구하면서 날마다 삶의 참된 지혜들을 배워서 그 지혜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하고 그 지혜대로 나 자신을 훈련해서 나의 인격이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 차서 여러분의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때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를 알아야 하루하루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 수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웃는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것처럼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이 짧은 인생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지혜롭게 살지 못하고 밤낮 술이나 마시면서 허송세월하고 모여서 어리석은 사람들의 헛소리나 듣고 껄껄대며 사는 그 인생... 여러분! 삶의 지혜를 찾아서 지혜로운 자들의 책망과 경고와 교훈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끼리 모여서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왜? 마지막 결과가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서 오늘의 결과가 내일 나타나고 내일 산 것이 모레 나타나고 그것이 다 모여서 인생의 마지막 결론이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생에는 고난도 있고 번영도 있는데 다 우리의 반응에 달렸습니다. 반드시 고난이 나쁜 것이 아니고 번영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없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에 대해서 어떻게 지혜롭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복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악한 것인가? 고난은 피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 때문에 우리들은 많은 성장을 도모하게 됩니다. 슬픔이라는 것이 우리 영혼의 좋은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다 노출시켜 주거든요. 고난이 오면 자기를 살펴봅니다. 자신의 동기와 의도와 관심과 자기 속에 있는 것들을 적나라하게 바라보면서 관찰하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성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고난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서 언제 변화가 나타났습니까? 그 당시에는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고난이 닥쳤을 때 내 인생의 변화를 체험했고 성숙을 체험했고 인생을 깨달았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성경이 무엇이며 기도가 뭔지를 알았고 예수 믿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인생의 고난 속에서 배운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많은 사람을 보아 왔는데 고난을 당하니까 그 고난이 유익하더라구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고난 앞에서 감당을 못해서 완전히 망해버립니다. 훈련이 안되고 지혜가 부족해서 고난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 때문에 발전합니다. 더 지혜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경건해집니다.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하느니라”(7절). 무슨 말입니까? 본래 그 사람은 지혜로웠던 사람이에요. 아주 지혜가 있고 훌륭한 사람인데 욕심이 생겨서 뇌물을 받더니 형편없는 인간으로 타락하고 부패해 버리더라는 겁니다. 머리도 좋았고 공부도 잘하고 일류학교를 나와서 대한민국 최고의 인물이라고 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그 자리가 사람을 망하게 만들더라는 거에요. 우리가 매일 보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신문에서 매일 읽고 TV에서 매일 보고 방송으로 매일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들이 젊었을 때는 공부 잘했고 똑똑했고 일류학교를 다녔고 승승장구 인생을 살아왔지만 마지막에 가서 지혜가 모자라서 패가망신하는 모습을 우리 한국에서는 날마다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엇이 모자라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지혜가 부족해서 입니다. 그래서 유명해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유명해져서 그 삶의 다 드러내보니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서 살았는지 어리석게 살았는지는 그 결과가 달라지더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번영을 할 때도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잘 될 때에도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해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11절). 무슨 말입니까? 부모로부터 유산을 받아도 지혜가 없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많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식은 그 유산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식은 아버지가 죽으면 ‘잘됐다. 저거 다 내 재산이다,’ 하는 자식도 있잖아요. 그러나 지혜롭게 사는 것을 배우지 못해서 결국은 그 유산 때문에 자신을 망쳐버리는 경우는 우리는 종종 보고 있습니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12절). 지혜도 돈도 다 좋지요. 그러나 마지막 가서는 지혜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므로,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있을 영원한 결과를 바라보고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니까 매일의 삶이행복하고 가치가 있고 만족한 것이지요. 행복은 20년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행복을 다 사용하셔서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절). 하나님께서는 행복도, 고난도주시며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원하시는 마지막 결과들과 아름다운 이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지금 나에게 고난을 주시는지, 하나님께서 왜 지금은 나를 행복하게 하시는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인생은 미스터리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어요. 우리에게 행복이 오든지 고난이 오든지 14절에 보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깊이 사색하라”고 합니다. 행복한 날에는 생각이 안나요. 고난이 와야 인생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고 뉘우치면서 거기서 지혜를 얻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숙한 삶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하나님이여, 나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옵소서. 참된 지식을 주옵소서. 하루하루 어떻게 사는 것을 보여 주시옵소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금방 회개하고 깨닫게 하시고 실수했으면 그것을 통해 성숙하게 하시고 나 자신을 살피고 정결케 하고 새롭게 만들어서 내면의 사람을 성장하게 하옵소서.” 심지어 우리가 화내는 것에 대해서도 본문에 보면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를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하였습니다. 성격이 급해서 아무데나 화를 낼 때 결과를 생각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점점 사람들을 잃고 어떤 때는 자기 말을 안 들어 준다고 ‘사임하겠습니다’ 합니다. 그 때부터 3년 동안 직장 없이 헤매고 다니게 되더군요. 참고 견디면서 결과를 생각해야지요. 지혜롭게 판단을 해야지 그저 화난다고 화를 내어버리면 그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지요. 언제든지 인생은 결과를 보면서 가장 선한 결과를 찾아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 모든 인생이 끝나면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루를 살면서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든지 간에 언제든지 결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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