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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과 행함 / 약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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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과 행함
본문 : 야고보서 2:5~26

19세기의 작가로서 『죄와 벌』, 『카라마죠프의 형제들』이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가 맨 처음 발표한
『가난한 사람들(Bednye lyudi - title means "Poor Folk", 1846)』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책 제목이 시사하듯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기엔 너무나 힘든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늙은 하급관리 제브시킨과 박복한 소녀 발바라와의 사랑을 그리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난이 주는 아픔과 상처 그리고 굴욕감을 심리적으로 잘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사람이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내면의 아름다움인 인간됨 즉 인격으로 보지 아니하고
그가 부유한 사람인가 아니면 가난한 사람인가, 지위가 높은 사람인가 낮은 사람인가 하는
외모로만 판단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좋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 즉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는 모습이 교회 안에서는 없어야 하는데
이렇게 사람을 외모로 취급하는 모습이 교회 안에까지 밀려들어 온 것을 보면서
오늘 말씀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교회 공동체 속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를 든 것이 바로 2-4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을 사람으로 보아야지.. 사람을 돈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물건이 다 제 가치가 있어서
예를 들어 한 꽃이 여기 있다고 할 때 우리가 꽃 그 자체를 볼 줄 알아야지
꽃을 보면서도 아름다움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꽃을 돈으로만 본다면 그 눈이 문제이듯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사람으로 안보고 지위나 권력이나 돈으로 본다는 것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노라 하는 사람들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을 외모로만 보고 사람을 구별한다면
어떻게 그런 믿음이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믿음과 행함입니다.

믿음이 제대로된 믿음이라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겠지만
그 믿음이 제대로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다.
여기 한 형제나 자매가 있습니다.
그는 가난합니다. 혹시 못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혹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하기도 하고, 슬슬 피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을 위하여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고, 그들을 싫어하고, 그들을 피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면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1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사실 우리는 아담의 후예로서 다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을 외모로 밖에 볼 수 없는 상태 속에 출생하여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고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에
오늘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른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바른 믿음이 바른 행함을 낳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른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도 외모로 취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생활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심한 질병 가운데 있기 때문에... 너무나 어려운 사건 속에 휘말려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끼며 자조하고 자학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그것은 바른 믿음에 따른 바른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렇다면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를 점검해 보아야 하는데
그럴 때 그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함께 살펴보았던 야고보서 1장 중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장 9-10절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무슨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이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형제는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것을 기뻐하고
부요한 형제는 하나님께서 낮추어 주시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아무리 부요한 사람이라도 들에 핀 꽃처럼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이제 이해가 좀 되시지요? 문제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죽을 병에 걸렸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같은 나를 위해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의기소침하고 우울해하며 자학하던 것에 종지부가 찍히고 그때부터
평안해 진다는 것입니다. 부유해 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유한 사람에게 믿음이 들어가게 되면 마음의 눈이 달라지게 되어
그동안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부자냐.. 얼마나 높은 사람이냐.. 그의 집안이 어떤 집안이냐...
이런 식으로만 사람을 보고 판단하며 살다가
완전히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 되어야 하느냐?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믿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2장 5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데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까지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기독교회사를 보면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과 정신 때문에
당시대 속에서 사람취급 받지 못하고 숫자에도 들어가지 못하며 멸시받고 천대받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어린이들, 여성들, 가난한 사람들, 각색 병자들, 심지어 노예들....
그들이 왜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믿음에 부요하게 되었습니까?
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남자의 공동체만이 아닙니다. 부자의 공동체만도 아닙니다.
어른들만의 공동체도 아니요 건강한 사람들의 공동체만도 아닙니다. 
교회공동체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러한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공동체요 주님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요
세속적인 공동체와 구별되는 거룩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교회 안에서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사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가난하다고 괄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고 질병에 걸렸다고 소외하는
그렇게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범죄자라고까지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제가 직접 본인에게 들은 얘기입니다마는
한번은 한라그룹의 정인영 회장이 런던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업차 방문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회장께서 교회에 나가진 않고 호텔 숙소에서 예배드리려고 저를 초청했습니다.
그리고는 비서들과 런던에 있는 이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예배가 끝나고 나서 저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제가 런던에 있는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지 않고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저를 자꾸 알아보고 인사하고 불편하게 해서 여기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자기를 외모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그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공동체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이 천대받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되며
세상에서 우대받는 사람이 우대받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도 언급하다시피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교회에 들어왔다고 해서
대단한 그룹의 회장님이 교회에 들어왔다고 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해서도 안될 뿐 아니라!! 또 중요한 것은!!

혹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게되면.. 정신과 자세가 복음 안에서 완전히 달라져서
교회 안에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좋은 자리 제공해주지 않아도...
전혀 불편함이 없고 평안함 가운데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른 믿음이며 바른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왜 이 교회 사람들은 나를 특별 대우해 주지 않는 거야' 하면서
섭섭한 마음이 들거나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덜된 사람이므로 먼저 자신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바른 믿음인가 아닌가를 먼저 점검한 후 온전히 회개하여
특별히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더러 느끼셨으리라 생각하지만 저는 목회하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인 지위가 높거나 부자라고 우대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낮거나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그런 목회를 하지 않아왔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가 참 좋다.. 편하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는
개중에는 또 그래서 섭섭해 하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우리는 좀 특별대우 해 주십시요!!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야고보서 2장은 믿음과 행함이라고 하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행함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포인트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믿는 자의 행함이 어떠해야 하는가?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그렇게 해야만 바른 행함이다..
이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믿음이 있어" 라고 말하는 그 사람의 행함을 볼 때
그의 행함이 믿음과 일치하는 행함인가 아닌가.. 이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본문 14-16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무슨 말씀입니까?
바른 믿음이란 믿음과 행함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
즉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은 말로만 믿음이 있노라 하고 떠들 뿐이지 실제적으로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17절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말이 죽은 믿음이지 사실은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14절에서 아무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17절에서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을 보아서
우리의 믿음이 말로만 소리치는 믿음 즉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야 하고 떠들지만
그의 삶에서 그가 말하는 믿음의 행위,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자기가 말하는 그 믿음이나 그 행위는 사실 헛것이며 실제적으로는 죽은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솔직히 실제적으로 믿음이 없으면서도 남의 눈을 의식해 있는체 하고.. 또 있다고 말하면서
그 믿음의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는 그 믿음이 헛 것이며
그렇기에 그는 주님과 사람들을 기만하는 죄와 스스로를 속이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조해서 말하면 이런 질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행함 없는 믿음이나... 믿음 없는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까?

본문 18절입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앞 절 17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했으므로
행함은 이미 없고 믿음도 죽은 믿음이기에... 실제로는 믿음과 행함 둘 다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22절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성경 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믿음을 행함으로 입증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찼습니다.
그 예를 두 사람 들고 있는데 한사람은 21절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고
또 한 사람은 25절에서 기생 라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바로 그 점을 인정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한 믿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 말로만 믿습니다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이냐? 아니면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난 믿음이냐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이라고 하는 주제를 놓고 생각해 볼 때 가장 극적인 장면은
이삭을 제단에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일은 믿음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세기 22:2)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데리고 가서 바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니 바치는 시늉을 한 것이 아니고, 쇼를 한 것도 아니고
정말 제물로 잡아 바치려 했다는 것입니다. 감정 다 버리고... 말씀에 순종해서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00세에 얻은 독자(獨子)였지만 잡아 바치라 하시는 분이 전능하신 분으로 확실히 믿었기에
잡아 바치려 했으며... 만일 정말 자식을 죽여 잡아 바쳤다고 할찌라도 다시 살려 주실 줄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는 믿음이 확실했기에
행함이라는 행동이 그렇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잡는 행위가 의로운 행위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들을 잡는 아버지의 행위가 과연 선한 행위이고 의로운 행위이냐.. 이러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본문 21-24절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무슨 말씀인가 하면... 믿음과 행함은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을 예로 들었는데 기생 라합의 예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브라함 한 사람의 예(例)로도 족할 것 같은데 라합의 예는 왜 들었는가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은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실천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기생 라합은 비록 그가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행함으로 실천함으로
자신을 구원한 대표적인 케이스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 강림주일을 맞이하면서 이 본문을 연결시켜서 묵상해 보니
더욱 새롭게 깨달아 지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며 성령의 역사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믿음,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으로
그렇게 믿는데는 우리의 이성이나 감정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의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도
우리의 이성이나 감정이나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잘 이어져서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행함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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