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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란 무엇인가(2) 무시하고 분노하고 성을 쌓고 / 창 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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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란 무엇인가(2) “가인: 무시하고 분노하고 성을 쌓고”    창34:1-8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성경이 다루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죄의 문제이고 오늘의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성도들이 평생 심각하게 취급하여야 할 문제가 바로 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CIS 선교대회에서 94세 되시는 한국교회의 지도자이신 방지일 목사님이 새벽 시간에 욥기42:5,6 말씀을 가지고 한번 설교하셨는데 성도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자기의 죄를 심각하고 철저하고 처절하게 고백하는 데 있다고 강조해서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시청각과 온 몸으로 보고 체험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고백하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이 그렇게 고백했고 프랜시스가 그렇게 고백했으며 한경직 목사님이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두 주전에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시작했을 때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를 가지고 긍정적인 자세로 설교를 들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김기배 집사님은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주보에서 보는 순간, 수년 전 ‘십자가와 나’ 라는 주제를 보던 때와 같은 기대감을 가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지난 4월 27일 주일 저녁 성찬식을 통해 깊은 은혜를 받은 이혜원 집사님도 같은 기대감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강변교회의 초창기 멤버인 백명희 집사님도 죄에 대한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 가면서 은혜를 받고 행복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박정하 장로님은 아담의 죄에 대한 설교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신구약 성경 전체에 대한 설교를 들은 것과 같은 시원함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영란 전도사님은 죄와 구원에 대한 복음 설교를 들으니 너무 좋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김영란 집사님은 죄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 같다는 매우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강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수준과 설교를 듣는 수준이 매우 높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죄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너무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부담이 안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담이 되면서도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들으면 부담만 됩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관점에서 들으면 은혜가 됩니다. 오늘 아침에는 구약에 나타난 두 번째 죄의 이야기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가인이 범한 죄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가인의 죄를 말하기 전에 어거스틴의 신국론에 대해서 잠간 언급하겠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두 도성의 역사라고 어거스틴이 지적했습니다. ‘신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신의 도성’에 속하든지 ‘지상의 도성’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의 도성’의 창시자는 아벨과 셋이고 ‘지상의 도성’의 창시자는 가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두 도성의 영적인 창시자는 그리스도와 사탄 마귀이지만 인간적 창시자는 아벨과 셋이고 그리고 가인이라고 했습니다. ‘지상의 도성’의 창시자인 가인이 3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첫째,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부를 무시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분부를 무시했습니다. 양을 잡아서 정성을 다해서 인격적인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 양을 잡지도 않았고, 정성을 다하지도 않았고, 인격적인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아벨은 양을 잡아서 정성을 다해서 인격적인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은 마지못해서 제 멋대로의 비인격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벨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받아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었고, 가인은 사람의 영에 따라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아침 제사와 저녁 제사를 정성껏 드리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예배와 삶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예배와 삶을 기쁘게 받으시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가장 큰 축복이 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예배와 삶을 기쁘게 받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가장 큰 불행과 저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도성’이 아닌 ‘지상의 도성’의 일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성이 없는 제멋대로의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불행했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예배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 사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행복하고 기쁩니다. 가인은 행복하지도 기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가인은 두 번째 죄를 지었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둘째, 분노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했고 동생 아벨을 향해서 분노했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할 때 분노를 잘 합니다. 가족에 대해서 분노하고 목사에 대해서 분노하고 은혜를 받은 성도들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분노는 큰 죄입니다. 형제를 향해서 ‘라가’라는 하는 사람 즉 형제를 향해서 욕을 하면서 분노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분노는 매우 위태로운 죄입니다. 저주를 받는 죄이고 지옥 불에 떨어지게 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미리암은 모세에게 분노하다가 문둥병에 걸리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아가서 그의 분노의 죄를 지적해주셨습니다. “가인아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창4:6). 이제라도 분노를 억제하고 바른 제 사를 드리며 은혜를 받으라고 타일렀습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4:7). 그러나 가인은 분노를 억제하기는커녕 분노를 폭발 시키고 말았습니다.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아벨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분노를 품지 않았습니다. 마치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이 순교의 제사를 거룩하게 드렸던 것처럼, 아벨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감사의 제사와 순교의 제사를 아름답게 드렸습니다. 결국 아벨은 순교자의 첫 열매가 되어 천국에 들어갔고 가인은 분노의 첫 열매가 되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가인의 지상에서의 삶을 어느 정도 보호해주셨지만 그것은 악인과 선인에게 꼭 같이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15).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마5:45).

사람에게 분을 잘 내면 그것은 가인을 닮은 것이고 사람에게 선을 베풀면 그것은 아벨을 닮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받으면 선을 베풀게 되고 사람의 영에 감동을 받으면 분을 잘 내게 됩니다. 마귀의 영에 감동을 받으면 욕을 잘하게 됩니다. 욕을 하는 습관을 버리고 칭찬을 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이번 선교대회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항상 제일 앞 자리에 앉아계시는 방지일 목사님과 김계용 목사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깊은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하면서 그분들에 대한 존경의 말씀을 한 두 마디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경직 목사님에 대한 말씀을 전했는데 말씀을 마친 다음 두 분이 저를 보고 제 모습이 어쩌면 한경직 목사님을 꼭 닮았다는 말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그 칭찬의 말씀이 싫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좌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한번 처다 보세요. 칭찬할만한 점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눈, 코, 입, 목소리, 얼굴 표정, 습관, 행동 등등에서 칭찬할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찾아보세요. 이따 서로 인사하는 시간에 꼭 칭찬의 말을 한마디씩 서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벨은 선을 베풀었는데 가인은 분을 내는 죄를 지었습니다.


셋째, 가인은 성을 쌓는 죄를 지었습니다.

땅에 성을 쌓는 것이 반드시 죄는 아니지만 그것이 큰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벨과 셋의 후손들 특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땅에 성을 쌓지 않았습니다. 장막을 치며 가볍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땅에 성을 쌓았습니다. 소위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악기를 만들어 즐겼고(창4:21) 무기를 만들어 안보를 굳게 했습니다)4:22). 가인의 자녀들은 첩들을 두어 향락을 추구했습니다(4:19). 가인이 땅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세상에 애착과 소망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세상적인 것이었으며 현세적 평화와 행복으로 만족한 것이었다. 가인은 ‘소유’라는 뜻이었다. 가인은 세상 것을 소유하는 데로 흘렀다.” 아벨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받아 하늘에 성을 쌓았고 가인은 사람의 영과 마귀의 영에 감동을 받아 땅에 성을 쌓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했습니다(마6:20) 사도 바울도 세상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권면했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사도 요한도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2:15).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가인은 땅에 성을 쌓고 땅의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얼마 후 그의 후손들이 바벨 탑을 쌓았고 나중에는 바벨론 문명과 앗수르 문명과 로마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성을 쌓는 것, 집을 짓는 것, 문명을 이룩하는 것이 반드시 죄는 아니지만 그것이 파멸로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국 사람이 사는 어느 부자집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이방 저 방을 구경 시켜주었습니다. 아주 크고 좋은 집이었습니다. 가구들도 의자들도 너무 멋지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멋진 가구들과 의자들을 흰 천으로 덮어 씌어 놓았습니다. 먼지 앉지 말고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집에다 지나친 정성을 쏟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지상의 도성’의 창시자인 가인의 세 가지 죄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무시한 죄였습니다. 제사를 정성껏 드리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무시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무시했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분노한 죄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고 동생을 향해 분노했습니다. 가족을 향해 목사를 향해 성도들을 향해 질투하고 분노했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성을 쌓는 죄였습니다. 세상적인 것을 소유하고 현세적인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려고 했습니다. 집을 멋지게 짓고 사업을 멋지게 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아침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무시하고 형제에게 분노하고 세상적인 성을 쌓으면 우리도 가인의 후손이 되어 ‘지상의 도성’ 즉 ‘마귀의 도성’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3:12).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조상들을 열거하면서 제일 먼저 아벨을 열거하며 그를 본 받으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아벨은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을 공경했습니다. 아벨은 형제에게 분노하는 대신 형제를 선으로 대했습니다. 아벨은 땅에 성을 쌓지 않고 하늘에 성을 쌓았습니다. 아벨의 발걸음을 따른 사람들 중에 스데반이 있었고 폴리캅이 있었으며 손종일 장로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김계용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과 저는 가인이 걸어간 길을 걷지 말고 아벨이 걸어간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아벨이 걸어간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의 영이나 사탄의 영의 감동이나 인도를 받으면 가인이 걸어간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윤리 도덕의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종교요 성령의 종교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 충만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영을 따라가면 가인에게 속하게 되고 성령을 따라가면 아벨에게 속하게 됩니다. 사람의 영을 따르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정성껏 제사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형제를 선대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성을 쌓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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