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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날숨과 인간의 들숨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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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날숨과 인간의 들숨(요20:19-23) 
성령강림주일(2003.06.08)
 

'살아있는 모든 것이 숨을 쉰다'는 선생님 말씀에 한 주일학교 어린이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럼 하나님도 숨을 쉬시나요?' 그 질문을 받은 교사가 당황해하며 청년부 지도목사인 저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도 살아계신 분이시니 숨을 쉬신다'고 일단 대답은 해주었는데 '이게 어찌 석연치 않은 것 같아'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부분과 관련된 성경을 찾아보았더니 하나님이 숨을 쉬신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고 단지 하나님의 숨결을 '생기', '기운', '바람', '성령'등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살아있는 모든 것이 숨을 쉰다면 생명이신 하나님도 숨을 쉬실까요? 우리처럼 호흡을 하실까요?...' 하나님도 정말 사람처럼 숨을 쉬시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숨이 뭔가부터 규명해야 됩니다. 숨에 대해 가장 진지한 연구를 한 종교를 꼽는다면 힌두교를 들 수 있습니다. 거기서 파생된 요가는 호흡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는 흡식(吸息), 들이마시는 숨이 있고, 둘째는 호식(呼息), 내뱉는 숨이 있고, 셋째는 지식(止息), 멈추어있는 숨이 있습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멈추는 반복적 행동을 통해서 인간의 호흡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정지숨도 둘로 나누어 숨이 폐에 가득찬 상태의 정지숨이 있고 숨을 완전히 내쉰 상태의 정지숨이 있습니다.

저들은 이 들숨과 날숨과 정지숨에 정확한 비율의 타이밍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숨의 깊이와 무게가 있고, 방향과 속도가 있어서 이것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건강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몸에 유익한 호흡은 들숨이 1초, 날숨이 4초, 정지숨이 2초입니다. 1초 들이마시고 2초 쉬고 4초 내쉬고 2초 쉬고 그렇게 호흡하면 건강에 좋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거운 숨과 가벼운 숨, 깊은 숨과 얕은 숨이 있는데, 들숨인 무거운 숨은 눈에 보일 정도로 앞가슴이 움직이고 늑골이 팽창되며, 얕은 숨은 고요하여 거의 알아차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또 날숨인 깊은 숨은 멀리 나가고 가벼운 날숨은 아주 가까이 나가는데 대표적인 깊은 날숨이 바로 한숨이고 그 숨이 너무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참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는 통찰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한숨을 자꾸 쉬면 빨리 죽겠죠. 들숨 날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생명은 죽는 겁니다. 숨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말한다면 호흡은 공기 중의 산소를 우리 몸 안에 들여오고 몸에서 생긴 탄산가스를 몸밖으로 내뱉는 일입니다. 좀 더 의학적으로 말하면 적혈구가 허파에 들어온 공기에서 산소를 자신의 몸에 실어 세포 속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로 옮깁니다. 이 미토콘드리아는 원래 독립되어 세포밖에 있던 것인데 이것이 세포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단세포 동물의 생명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속의 발전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생명 에너지의 근원입니다. 미토콘드리아가 호흡으로 들여온 산소를 이용해서 세포에 에너지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기 위해선 일단 숨이 몸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호흡 중에 흡(吸)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흡호(吸呼)라고 하지 않고 호흡(呼吸)이라고 할까요? 들숨이 흡(吸)이고 날숨이 호(呼)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먼저 내뱉고 나중에 들이마시는 게 '호흡'이고, 먼저 들이마시고 나중에 내뱉는 게 '흡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먼저 들이마시고 후에 내뱉으면서 흡호라고 하지 않고 호흡이라고 하는 걸까요? 왜 이치에 맞지 않게 날숨이 먼저고, 들숨이 그 다음이라는 호흡이라는 표현을 쓰느냐는 겁니다. 먼저 들이마시고 나중에 내뱉는다면 호흡(呼吸)이 아니라 흡호(吸呼)가 되어야 하는데 왜 흡호가 아니고 호흡이냐 이 말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왜 그럴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 숨을 들이마시고 나기 때문입니다. 태생적으로 흡한 상태에서 태어나기에 '호흡'이란 표현이 맞는 겁니다. 창2: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신 후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주심으로 인간이 그 생기를 들이마시고 태어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 몸에 들어옴으로서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날숨인 생기는 우리를 생명체로 만드시는 본질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바로 루아흐, 하나님의 날숨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인간이란 하느님 안에서 숨쉬는 생명체입니다. 인간의 숨은 결코 하느님의 숨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숨은 창조적인 생명력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게하는 동력입니다.

인간에게 숨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몸이 아무리 튼튼해도 숨이 끊어지면 끝입니다. 바람처럼 가냘픈 숨이지만 그것이 육체를 움직이고 활기 있게 하는 힘입니다. 요근래 우리 교우들 중에 크게 어려움을 당하는 환우들이 있습니다. 양계월 권사님이 지금 차병원 중환자실에 열흘 이상 산소 호흡기를 끼고 투병하고 있고 장성규 장로님이 집에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투병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병원엘 갔더니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주 힘들어하는 권사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숨없이는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숨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숨을 주셔야 인간이 사는 겁니다. 겔37:5-6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주어 너희를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져야 하며, 하느님이 그 날숨을 인간의 생명력으로 주셔야 합니다. 힘줄과 살과 가죽으로 덮인 해골 속에 하느님께서 호흡으로 영을 주셨을 때 비로소 그 몸들이 살아나게 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눅1:47절에 보면 메시야를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 앞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리고 내 영이 내 구원자 하느님을 반겨 신명神明이 났노라..." 하나님의 생기가 자기 몸에 들어옴으로써 자기 인생이 신바람나는 인생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마리아가 메시야를 성령으로 잉태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몸에 성령이 임하신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렇게 찬미합니다. 초월적이고 초의식적인 인격의 중심으로서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는 그분을 자기 속에서 체험한 것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된 '영적 실재'로서 생명력, 입김, 숨결, 영, 정서, 의지 등 다양한 뜻을 내포하는 실체로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활력소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새술에 취한 듯 신명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인간에게는 이미 하나님에 날숨에 의해 불어넣어진 숨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호흡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호흡이 멈춰지면 성령이 소멸되고 결국엔 영적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계속해서 우리 안에 채워지는 것이 바로 삶의 비결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생기로 채워져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들숨 없이 날숨부터 시작하되 끊임없이 하나님의 날숨을 들숨으로 받아 자신을 채워가며 살아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기로 채워져 세상에 태어나는 신생아를 보십시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날숨과 함께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그 생기를 내뱉으며 사는 존재라는 의미심장한 선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탄생의 신비입니까? 갖난아이는 하나님의 날숨을 들이마셨다 토하면서 이 세상엘 나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거듭나는 순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창조주 하나님도 부활의 주님도 모두 다 하나같이 숨을 내쉬십니다. 숨을 들이마시는 게 아니라 내쉽니다. 들숨은 없고 날숨만 있습니다.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내쉬시고 제자들은 들이마십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활하셔서 영생하실 주님으로부터 생기를 받아 그 기운으로 영생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별할 때 그 판별 기준이 무엇입니까? 바로 호흡입니다. 생명은 호흡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숨결이 사람을 살리는 겁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몸과 혼과 영의 결합체입니다. body와 soul 또는 mind 그리고 spirit가 합쳐진 전체로서의 실존을 인간이라 하고 이 세 가지가 통전적인 균형을 갖춤으로 건강한 인간인 것입니다.
이 셋이 서로 대립되거나,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거나 종속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통째로의 인간을 만드셨지 결코 어떤 조각들로 짜맞춰진 조립품으로서의 인간을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영혼과 몸과 정신, 지정의가 다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이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 하느님의 날숨이 인간의 육체에 생명을 부여하여 생명체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숨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인간의 숨이 나가면 죽음이 들어오는 겁니다. 하느님은 호흡의 창조자로서 인간에게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숨이 생명을 표시한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떠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주님이 불어넣어 주시는 숨결입니다. 그 하느님의 입김으로 인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왜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야 할까요? 성령께서 저들을 어떻게 이끌어가시기에 주님이 성령을 저들 속에 채우시려는 걸까요?

흔히 호흡과 욕망은 한 마차에 매인 두 마리의 말에 비유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욕망이라는 말과 호흡이라는 말이 끄는 마차라는 것입니다. 두 말 중 힘센 말이 끄는 쪽으로 마차가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다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호흡보다 욕망이 현저해지면 호흡은 불규칙해지기 시작합니다. 정욕에 비례해서 호흡은 거칠어집니다. 이에 반하여 욕망보다 호흡이 강하면 욕망은 제어됩니다. 호흡을 가다듬게 되면 마음이 진정되지 않습니까? 어떤 말이 이끄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삶이 결정되는 겁니다.

제자들은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살아야 합니다. 제자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자가 제자입니다. 21:18절에 보면 주님은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그렇지 않으니 네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혈기, 내 주관, 내 욕심 따라 사는 게 아닙니다. 이제 자기를 비우고, 부인하고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살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이 선교의 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주시기 전에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선교란 말로 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을 하려면 반드시 숨을 내쉬어야 합니다. 내쉬는 숨 없이 한번 목소리를 만들어 보십시오. 만들어집니까? 말이 됩니까? 나옵니까? 안됩니다. 호흡이 없으면 말이 안되지요. 말과 노래는 호흡에 묶여있습니다. 우리는 호흡에 맞추어 말하고 노래합니다. 그러니 호흡은 말과 노래의 전제조건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나아가서 복음을 힘차게 외쳐야 합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케리그마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숨을 크게 내쉬어야 합니다. 그 숨을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날숨의 크기만큼 선교도 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와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성령강림주일에 우리가 성령을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이 날숨으로 불어넣어주시려는 성령을 들숨으로 우리가 크게 받아야 합니다. 우리 몸 곳곳에, 구석구석 폐부 깊숙이 스며들도록 우리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들이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깊은 날숨에 우리는 깊은 들숨으로 응답해야 하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말씀은 얼핏 성령을 받은 자에게 주어질 특권으로서의 사죄권을 언급하시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만은 역설적으로는 성령을 받을 자의 자세를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가 죄를 사해줄 수 있을까요? 죄사함을 받은 자가 죄를 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회개해야 하는 겁니다. 내가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행2:38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회개가 바로 성령을 받는 전제조건입니다.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죄사함의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령강림주일에 하나님의 날숨인 성령을 큰 들숨으로 받아 모시는 우리 영락의 권속들이 되시기 소망합니다. 성령이 소멸되었다면 다시 충만하게 채워야 합니다. 성령 안에 평강이 있고 기쁨이 있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거기에 신명나는 하늘의 인생이 펼쳐집니다.

주님이 주시는 성령을 받아 제자들처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우리 영락의 권속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사모함으로 깊이 들이마시십시오. 하나님의 날숨이 우리의 들숨이 될 때 우리는 성령충만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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