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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하는 교회 / 왕상 18: 3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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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교회 (열왕기상 18: 30-46) 


「선지가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시로다」 <왕상 18: 36-39>

지난 9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는 단군신전 건립에 대해 전총대원들이 기립하여 반대결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반대 추진위원회도 조직하였습니다. 그 추진위원회 결의에 따라 오늘 우리 장로교단의 전국교회가 이 반대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이어서 그 사건이 주는 오늘날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래 단군은 실재의 인물이 아닙니다. 삼국유사는 일연이라고 하는 중이 쓴 책인데 거기 처음으로 단군 설화가 나옵니다. 환인이라는 천제가 보낸 환웅이라는 아들이 마늘과 쑥을 먹고 여자가 된 곰과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단군이요, 단군이 나라를 세웠고 단군의 자손이 우리 민족이라고 하는, 즉 중이 만들어 낸 설화입니다.

그렇다면 곰이 우리 할머니라는 뜻이고 우리가 곰의 자손이란 말인데 그런 맹랑한 소리는 있을 수 없는 전설일 뿐입니다. 그런 맹랑한 소리를 그대로 사실인 양 받아들여서 단군을 국조라 하여 단군을 신격화하고 신전을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단군이 실재적인 인물이라 해도 그를 위한 신전은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설화 중에 나오는 꾸며낸 이야기를 사실화하여 신전을 짓고 또 단군신화로서 통일을 이룩하고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묶어 보겠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소리입니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민족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문제에는 여나 야의 어느 한편에 설 필요는 없습니다. 또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성서적으로 볼 때 이렇게 해야 된다라는 말 한마디로 끝나면 안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릅니다. 일본 정치 하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문을 닫고 순교를 해가면서도 신사참배를 결사 반대했습니다. 또 참혹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반대하고 일어났습니다. 신사참배와 단군신전참배가 전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신앙적으로 또 성서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에 대해 목숨을 걸고 반대하지 않을 수는 없는 입장임을 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옛날로 돌아가 성경의 교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아합 임금 때에는 하나님께서 무척 노여워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아합이 왕후를 맞이하는데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맞이했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바알이라 하는 우상을 가지고 들어와서 왕후의 권세를 배경으로 바알 종교를 전파합니다. 바알 종교가 어떻게 기승을 부리는지 하나님께서 노여워 3년 6개월 동안 비 한방울 안 주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나타나서 임금에게 얘기합니다. "갈멜산에 제단을 쌓아 놓고 날짜를 정한 다음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놓고 기도를 하여 불로 응답하는 신이 바로 참 신이라는 내기를 한번 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혼자 나가고 바알 우상의 선지자들은 450명이 나갔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바알 제단을 쌓아 놓고 그들의 신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불이 내려오질 않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백성들을 불러 놓고 기도했을 때 불이 내려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년 6개월 동안 비 오지 않던 땅에 비가 내렸습니다. 갈멜산 제단에서 승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과 귀신의 싸움, 하나님의 제단과 바알 제단과 싸움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승리했다고 하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시간 승리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I. 순종하는 교회가 승리했습니다(30-35절)


1) 모이는 순종입니다(30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백성들이 다 가까이 와서 모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다 내게로 가까이 오라 해서 함께 모인 백성들이 조금 전에 어디에 갔던 백성들입니까? 전부 다 하나같이 바알 제단에 가서 모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리로 가까이 와서 모이자"했을 때 다 여호와 제단에 모였습니다. 모이라고 했을 때 그 사람들이 불평을 할 수도 있었고 반항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순종했습니다. 다 내게로 가까이 오라 하는 것은 하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당신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 입을 것을 주었느냐? 당신이 뭔데 그러느냐고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모여들었습니다. 만약 모이라 했을 때 모이지 않았다면 갈멜산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나를 상상해 보십시오. 승리도 성공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같이 모여서 힘을 합쳤을 때 승리가 있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즉 모이라 할 때 모이는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단군신전 건립을 앞에 놓고 우리가, 교회가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은 모이는 일입니다.. 힘을 합쳐야 합니다. 기도하자 하면 모이고, 예배하자 하면 모이고, 성경공부 하자 하면 모이고, 전도하자 하면 모이고, 모일 때 힘이 있고 힘이 있는 곳에 승리가 있습니다. 또 모이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 즉 모이는 일에 순종하는 교회가 승리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협력하는 순종입니다(31-32절)

두 번째 순종은 협력하는 순종이었습니다. 이것이 귀한 까닭은 모이긴 모였지만 협력은 안하고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면 그 모임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모이지 않은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은 나을런지도 모르긴 합니다. 그런데 모인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협력하고 나섰습니다. 하나같이 봉사했다는 말입니다. 제단을 쌓으려고 돌을 주워 오라 하니 그 많은 사람들이 돌을 주워 왔습니다. 열 두 돌을 취했다 하는 것은 열 두 돌을 그 많은 돌 중에서 골라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는 그 자리는 그 전에 여호와의 제단이 있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다 무너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열 두 돌로 쌓았습니다. 그 전에 있던 자리를 다 정리하고 그 자리에 제단을 또 쌓았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상상해 보십시오. 좀 진보적인 사람은 왜 구태여 그 자리에 또 해야 되느냐?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꼭 옛날에 하던 방법 그대로 반복해서 해야 하느냐? 무엇인가를 좀 새롭게 해보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자는 대로 아무 불평 없이 그 자리에 돌을 쌓았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십시오. 제단 주위에 도랑을 팠습니다. 그 전에 없었던 일을 한 것입니다.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랑을 판 일이 전에 어디 있었습니까? 이전에 안 하던 새로운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좀 보수적인 사람은 어찌하여 전에 안 하던 일을 하느냐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하면 큰 변이 아는 줄 압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하는 일에 반항하고 또 딴소리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파자했을 때 팠고, 쌓자 하니 쌓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별별 사람이 다 모였을지라도 묵묵히 하나같이 협력을 했고, 그래서 그 결과는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별 사람이 다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할 때에는 이런 저런 생각은 다 정리를 하고 하나같이 협력을 할 때에 이런 시국 하에서 우리 교회에 승리가 꼭 있을 줄로 압니다.


3) 바치는 순종입니다(33-35절)

처음에는 순종해서 모였습니다. 다음에는 순종해서 협력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순종해서 바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제단을 다 쌓고 그 위에 나무를 벌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주의 종 엘리야가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가져다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한 번 더 그리하라"했습니다. 그래서 또 가져다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세 번째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가져다 부었더니 단에 물이 넘쳤고 도랑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넘치도록 물을 가져다 부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물이나 가져다 퍼부으라면 네 통 아니라 사백 통, 사천 통이라고 가져다 붓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도꼭지만 틀어 놓으면 24시간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오늘의 한국적 상황에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때 당시가 어떤 때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나라에 정월부터 유월까지 즉 반년 도안만 비 한방울이 안 와보십시오. 한강이 바닥 나 버릴 것입니다. 댐으로 아무리 조절해 봐야 6개월 써버리면 바닥이 날 것입니다. 6개월 동안 비가 안 오면 모내기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습니다.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안 왔는데 어디서 물을 얻습니까? 흐르는 물은 전연 없습니다. 웬만한 샘은 다 끊어지고 깊은 심에서만 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십리가 되든 백리가 되든 아무데서고 물을 얻을 수 있다면 가야할 형편입니다. 가서 하룻밤이고 이틀 밤이고 새워가며 물을 한 동이씩 길어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대로 퍼주고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까? 아끼고 감추어둬야 됩니다. 그 때 당시 만약에 싸움이 일어났다면 물싸움이었을 것입니다. 또 도둑이 있었다면 물 도둑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까운 물,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물을 가져다 부으라는 것입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없으면 못 사는 것이고, 꼭 먹어야 되고 꼭 써야 되는 것을 가져다가 넘치도록 부으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반항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당신이 뭔데 부어라 말하느냐고 얼마든지 반항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같으면 큰일날 소리입니다.

우리 교회도 보십시오, 전도하자 하면 십여년씩이나 교회에 나온 사람들도 못 들은 척하고 지냅니다. 그리고 헌금 이야기도 한번만 해 보십시오. 교회 나가니 헌금 얘기만 하더라 하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멜 산상에 모였던 사람들은 순종했습니다. 주의 제단에 필요하다면, 내일은 어떻게 되든지 넘치게 부었더니 그 날 해가 지기 전에 큰비가 내려 문제가 다 해결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바치라 할 때는 벌써 계산이 있어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까워서 아낀 사람이 있었다면 큰비가 내렸을 때 그 아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치라고 했을 때 순종하여 넘치도록 바쳤더니 하나님이 역사하사 승리하게 하셨고 또 그 날 해가 지기 전에 문제에 개입하셔서 해결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치는 순종입니다. 순종하는 교회가 승리하는데 모이는 순종, 협력하는 순종, 바치는 순종입니다.


II. 불붙는 교회가 승리합니다(36-40절)


1) 기도의 불입니다(36-37절).

제단을 다 갖추고 나무를 벌려 놓고 번제물을 갖춰 놓고, 갖출 것을 다 갖추어 놓았다고 불이 내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조직을 다 갖추어 놓았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가 자동적으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곳에, 즉 갖출 것 다 갖추어 놓고 기도했더니 불이 내려왔습니다. 불이 내려와야 그 제단이 살고, 불이 안 내려오면 바알의 제단처럼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하나님의 불에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내려오느냐, 안 내려오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인 다락방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이 열흘 동안 간절히 기도했을 때 성령의 불이 내려왔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열흘 동안 조직이나 하고 앉아 있었다면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조직이 기도를 대신하면 안됩니다. 기도가 우선입니다. 기도하는 곳에 불이 내려오고, 기도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불의 역사가 있는 곳에 승리가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2) 내려 붙는 불입니다.

세상의 불은 나무를 쌓아 놓고 아래부터 올려붙여야 잘 탑니다. 그러나 본문 38절을 보면 하나님의 불은 내려 붙었다는 것입니다. 불이 내려와서 맨 위의 번제물을 태우고 그 밑의 나무, 그 밑의 돌, 그 밑의 흙을 태우고 옆으로 도랑의 물을 핥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하며 내려 붙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불은 성령의 불을 의미하는데 성령의 역사는 내리 역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하는 겁니다.

옛날 초대교회에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이 역사 할 때 맨 위에 있던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열 사도와 그 외의 여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맨 위에 베드로나 사도들은 성령의 불을 못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부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잘못했다고 그 불을 꺼버리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부터 내려 붙으니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온통 성령의 불바다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로 이런 겁니다. 한국교회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붙는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이런 어려운 시국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신앙고백의 불입니다(39절).

본문 39절에 보면 백성들이 여호와가 하나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조금 전에 어디에 갔던 사람들입니까? 바알의 제단에 꿇어 엎드려 거기서 불을 받아보려고 하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알제단과 여호와의 제단을 오가며 방황하던 자들입니다. 그 때 그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라고 하면 했겠습니까? 못합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결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여호와가 하나님임을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은 오늘날 우리들 입장에서처럼 자유롭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왕은 바알을 믿는 자입니다. 그런 왕 앞에서 "여호와가 하나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백했다는 것은 불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불을 받고 불의 역사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습니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은 돈 받고 못합니다. 성령이 임하사 나를 뜨겁게 감동시킬 때 누구 눈치 볼 것이 없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고백케 하는 불입니다.


4) 교회 정화의 불입니다(40절).

교인들 중에는 교회에 나오면서 교회가 망하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가 싸움이 없고 평안할 때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싸우는데는 교회가 부흥이 안되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를 내 쫓는 구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계속 부흥하게 되면 목사를 내쫓을 근거가 없습니다. 부흥이 안되고 줄어야 목사를 내어쫓는 구실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 부흥 안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바알의 족속들입니다.

본문에서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때에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도망하지 못하게 붙잡으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바알 선지자들이 기도를 포기한 후 바로 도망하지 않고 엘리야가 제단을 쌓고 백성들이 기도할 때에 그 속에 섞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섞여 있을 때 불이 내려오길 바랐겠습니까? 내려오면 자기들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이 내려오지 않기를 바라고 이 제단이 망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450명이나 되는 바알 선지자들을 다 골라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가다가 거기서 죽이니라"했습니다. 엘리야 혼자서 어떻게 450명을 죽입니까? 그것은 엘리야 책임 하에 백성들이 처리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 백성들이 교회내의 암적 존재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교회를 정화시킨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물은 교회를 정화하는 불입니다. 교회는 이런 암적인 존재들로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런 암적 존재를 제거하고 교회를 정화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불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III. 은혜 받은 교회가 승리합니다(41-46절)


1) 만남의 은혜입니다(41-44절).

만남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만납니다. 제일 처음 만남은 부모와의 만남입니다. 한 날 한 시, 앞뒷집에 태어나도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일생이 달라집니다. 앞집의 아기는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를 만나 불행해집니다. 그런데 뒷집의 아기는 성실하고, 독실하게 신앙생활하는 아버지를 만나 귀여움 속에 산다면 이것은 귀한 만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는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또한 부모도 자녀를 잘 만나야 합니다.

두 번째 만남은 남녀간의 만남입니다. 이것은 부부의 만남입니다. 누가 무어라해도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야 됩니다. 호박 넝쿨은 동쪽으로 돌려놓으면 동으로 가고 서쪽으로 돌려놓으면 서로 가버립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남편을 잘 만나야 합니다. 또 남편도 여자를 잘 만나야 됩니다. 남편 혼자는 반쪽 구실 밖에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서로 잘 만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만나고 잘 만난다는 것이 큰 은헤입니다.

그런가 하면 선생과 제자 즉 사제지간의 만남도 참 귀합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 잘된 제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제자 하나 잘 두어서 그 스승의 영광이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사제지간의 만남은 참 훌륭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에서 교인들은 목사를 잘 만나는 것이 큰 은혜요 목사는 교인 잘 만나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갈멜산의 칠천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그렇게 순종을 잘 해주었으니 이런 순종 잘하는 교인을 만난 것이 엘리야에게는 큰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교인들은 엘리야와 같은 그런 종을 만났기에 다행이지 발람과 같은 종 만났으면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만남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성경으로 돌아가 봅시다. 41절에 보면, 구름 한 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엘리야는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하였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데 큰비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영의 귀가 밝아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주의 종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보십시오. 바다 편을 바라보라고 사환을 일곱 번 보낸 후 일곱 번째 와서 하는 말이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납니다"고하자 "큰비가 온다고 왕에게 알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큰 장대비가 온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엘리야는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순종 잘하는 교인 만난 것도 큰 은혜지만 그 교인들이 이런 주의 종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요 이런 은혜를 받은 교회가 세상의 불의와 더불어 싸워 승리하는 것입니다.


2) 해결의 은혜(45절)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비가 내렸습니다. 조금 후에 란 말씀은 그 날 해 넘어가기 전을 의미합니다. 큰비는 소낙비가 아니라 장마비를 가리킵니다. 장마철에도 3년 반씩이나 비가 아니 와서 대지는 불타고 수목이 자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너, 나 없이 도탄에 빠져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 제단을 통해서 하나님은 큰비를 주셨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끈질기게 괴롭히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3년 반의 가뭄은 개인적인 문제인 동시에 가정적인 문제요. 민족적인 국가적인 큰 문제였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단군 시전문제도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속시원히 해결하여 주실 것입니다. 갈멜산 제단에서 하나같이 해결의 은혜를 받아 승리했습니다.


3) 능력의 은혜입니다(46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습니다. 엘리야는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마차를 타고 달리는 아합 왕보다도 앞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능력이 없는 자는 항상 패하고 실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항상 뒤떨어지고 맙니다. 엘리야가 앞서 달릴 수 있는 까닭은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능한 사람은 승리하고 성공도 하며 앞에서 달릴 수 있으나 무능한 자는 쇠하고 패하며 망하게 됩니다.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홍해 바닷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 군대와는 상대가 안 되는 입장이었으나 여호와의 능력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역사 하므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애굽 군대는 하나님의 능력을 당할 수 없어 전멸을 당했습니다. 능력이 임하는 곳에 승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능력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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