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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부으소서 / 행 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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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부으소서
(행2:14-21)
 
 
  지난 주에 지구촌 곳곳에서는 이상기온 현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에는 극심한 가뭄이 찾아 왔다고 합니다. 또한 인도에서는 두 주일째 50도를 오르내리는 이상 고온 현상이 계속되면서 430여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필리핀에는 열대성 폭우가 덮쳤습니다. 그래서 주택이 무너지고 도로와 마을들이 물에 잠겼습니다.

환경오염과 대기오염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자연의 질서가 파괴되는 무서운 일이 해가 거듭할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2001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농사는 물론이고 먹을 물까지 부족했고, 탈진하여 죽기까지 했습니다. 2002년에는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덮쳤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재민을 내었습니다. 금년에 또 어떤 이상기온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르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의 상황입니다.

  이제 6월 말이면 예년과 같이 장마가 온다고 합니다. 그저 장마로, 자연적인 현상으로 지나가는 기간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장마는 장대와 같은 비가 '하늘에서' 쏟아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과 대지를 흠뻑 적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늘에서 부어지는 것이 장마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성령의 단비, 성령의 소낙비, 성령의 장대비가 우리의 심령에 부어지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역사적으로, 공식적으로 이땅에 성령이 오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말씀을 통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오신 성령을 생각했습니다. 성령이 오셨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성령은 불같이, 바람같이, 물같이 오셨습니다. 특히 하늘에서 쏟아 부어지는 복된 장대비와 같이 부어졌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의 강림이 물같이 부어진 것을 강조합니다. 17절에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라고 말하고, 또 18절에서도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라고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성령을 퍼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촉촉하게 적셨고, 메마른 심령을 시원하게 한 것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성령이 어떤 사람, 어떤 때에 오셨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성령이 오신 결과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이 부어진 이후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 말씀에서 몇가지의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삶의 목표가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17-18절의 말씀에 보면, 성령이 부어지니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강조합니다. 또 남종과 여종들도 예언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언, 환상, 꿈'이라는 말은 '비젼'이란 단어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비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수 있는 일종의 통찰력입니다. 다시말해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그 길로 나아가는 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비젼은 망상이나, 인간의 야망이나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비젼은 방향과 목표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성령이 부어지니까, 120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변했습니다. 그들은 비젼의 사람, 꿈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과 목표가 세워졌습니다. 방향의 감각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사도바울은 푯대를 분명히 한 비젼의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이 임한 뒤, 그는 좌우를 보지 않았고, 뒤를 보지 않았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갔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는 날까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언제나 목표와 방향을 잊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열정이 필요하고 성실도 요구됩니다. 희생과 수고없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열정과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향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한 열정인지는 중요한 삶의 틀입니다. 만약 우리가 헛된 것을 위해 수고한다면, 우리의 열정이 남을 헤치고, 죄를 짓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더디 가더라도 목표가 바르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빨리 가는 것 같아도 방향이 잘못되면 그것은 헛된 수고요,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일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조금 후의 세계가 더욱 중요한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넓게 보고, 멀리 보아야 합니다. 내일을 준비하고, 다음세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30-40년의 일은 그리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진 약점중의 하나가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파트도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도로도 30년을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짓기도 잘 짓지만, 부수기도 잘 부숩니다. 그러나 영국사람들은 어떤 건물을 지을 때 보통 100년, 200년을 내다봅니다. 자기 시대에 편의를 위해 쉽게 짓고 쉽게 부수는 공사를 하지 않습니다. 멀리 봅니다. 이들이 넓게, 멀리 보는 안목은 철저한 기독교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꿈과 비전, 방향과 푯대가 분명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운전을 처음 배울 때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운전을 잘 하기 위해서는 시야가 넓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눈앞에 거리만 보아서는 운전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멀리 보고, 넓게 보는 것이 운전을 여유있게, 그리고 안전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요 삶의 원리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비젼의 사람입니다. 앞을 내다보고, 방향을 잡고, 그 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부어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언제나 현실상황을 끝이라 보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메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살고, 꿈에 살았습니다. 성령과 함께 그들은 삶의 감각을 잡고, 가야할 방향을 정하고 푯대를 향해 자기 길을 갔던 분명한 사람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둘째는 예수님에게 몰입되었다는 것입니다. 19-20절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성령이 임할때 나타나는 어떤 현상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초점은 '징조'입니다. 여기 징조를 다른 말로 이적, 사인,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추구하는 표적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동안 죽었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가장 큰 표적인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이적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성령이 폭포수와 같이 부어질 때, 제자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외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에게 몰입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말할 때도 예수, 생각할 때도 예수였습니다. 예수죽음, 예수부활, 예수생명, 예수천국이 바로 이들이 내건 복음의 슬로건입니다. 입만 열면 예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분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외에 다른 표적, 징조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몰입'이라는 말은 나쁘게 표현하면 '미쳤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예수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말은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기 위해 말한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온전하게 받았습니다. 진정 자신들은 예수에게 미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예수에 미친 사람들,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여기 '몰입'했다는 말은 좋게 표현하면 '시선을 집중했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경우, 어떤 때라도 성령의 사람들은 한순간도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현실, 어떤 위기에 있더라도 언제나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시선집중,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삶의 원리인지 모릅니다.

  저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데 어느 한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림을 보려고 가까이 가는데 워낙 사람이 많아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틈새를 비집고 멀리서 이곳저곳으로 옮기면서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느 위치에 있더라도 모나리자의 눈이 저와 마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그림이 세계적으로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나리자의 그림은 어느 각도,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언제나 보는 이와 시선이 마주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나리자의 눈이 살아서 자기를 따라온다고 표현합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언제나 예수님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사람입니다. 한 순간도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어느 상황, 어떤 삶의 각도에서든지 예수님에게 집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이요,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셋째는 영광을 예수님에게만 돌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이렇게 끝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베드로 설교의 중심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4장 12절에서 베드로는 이것을 이렇게 바꾸어 말했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베드로를 포함한 성도들이 예수님을 목표로 삼고, 예수님에게 몰입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만이 유일한 소망인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외에는 어떤 구원, 어떤 복음, 어떤 길, 어떤 진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주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소원했습니다. 자기들은 자리에서 빠지고, 예수님만 영광을 받으시게 했습니다. 피를 흘려 죽어가면서도, 사람들에게 커다란 칭송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예수님만 높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변화산에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찬란한 모습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되실 때, 모세와 엘리야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예수님만 자리에 남았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대하는 당시 제자들과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기 위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참 놀라운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 자리에는 어떤 사람, 어떤 것도 대신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신앙을 삶의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존경받는 지도자였지만 영광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앞에 절하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며 '나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세계선교에 커다란 공헌을 했지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만 외치고 살았습니다.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로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섬겼지만 오직 예수님만 보았습니다. 살아도 죽어도 오직 예수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당시 그들이 볼 수 있었던 인생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그림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럽을 여행하면 웅장한 성당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그 웅장한 성당에 이상하게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성당에 가보면, 제일 중앙의 가장 귀한 자리에 베드로의 동상과 관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양 옆으로는 역대 교황들이 누워 있습니다. 이 성당은 주님을 위해서 지은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을 위해 지은 것처럼 보입니다. 중세의 타락한 시대를 대변하는 모습입니다.

  반면, 종교개혁자 칼빈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 가시면 그가 얼마나 큰 업적을 남겼는가를 한눈에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교회가 속한 장로교의 창시자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제네바라는 도시는 칼빈이 세운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칼빈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현재 칼빈의 묘에는 비석하나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안내자 없이 그의 무덤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 배경에는 그가 죽을 때 이런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면 나의 추종자들이 예수보다도 내 묘소 비석을 더 우상시 할것이므로 세우지 말라" 만약 그 시대에 화장제도가 있었다면 칼빈은 자기시신을 화장해 강물에 뿌려 흔적이라도 없애라고 유언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커다란 일을 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모세를 존경합니다. 그가 나라가 힘들 때에 헌신한 삶의 흔적은 너무도 귀합니다. 그런 모세를 사람들은 오래토록 기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묘는 지금까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 모세는 스스로 자기를 숨겼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다가 마지막에는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의 결과를 잘 압니다. 모세는 누구보다도 하늘나라에서 큰 상을 받았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날 만큼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묘는 없지만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소중하다는 진리를 그는 우리에게 큰 교훈과 메시지를 주고 간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한 것은 반드시 남이 알아 주어야 합니다. 조그만 업적도 크게 부풀립니다. 늘 경력과 이력에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연기처럼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기 이름이 지워져 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존귀하게 되는 것은 우리 인생이 끝난 뒤 주님이 해 주십니다. 세상에서 상을 다 받으면 하늘에서는 받을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성령을 부으소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성령이 부어지면 분명 우리도 사도행전이 아니라 목사행전, 집사행전이 쓰여집니다. 우리는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에게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삶은 결코 그냥 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져야 합니다. 성령의 쏟아 부어지는 장대비와 같은 역사가 성령강림절에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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