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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성령으로 되느니라. / 슥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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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가랴 4:6
제목:오직 성령으로 되느니라.

  세상은 힘있는 사람은 건전하게 살아 남을 수 있고 힘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힘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힘입니까? 재력 소위 말하는 돈이 힘입니다. 돈 있는 사람은 대접받습니다. 어디를 가도 그렇습니다. 그걸 아는 이들은 입만 열면 돈 돈 그럽니다. 한국 교회를 잘 아는 어떤 유럽의 목사님이 한국교회 신자들은 세 가지 밖에 모른다고 하더랍니다. 첫째, 하나님 둘째, 자기 자신 그리고 셋째는 돈 이랍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잘 섬깁니다. 새벽부터 섬깁니다. 그런데 자기 중심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나 외에는 보이는 게 없습니다. 나에게 좋지 못하면 상대가 누구든지 등을 돌립니다. 다음은 돈입니다. 누군가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 다음 돈은 힘이 있습니다. 군사력도 힘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힘이란 바로 전쟁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강력한 무기의 힘을 말합니다. 북한은 핵을 가지고 협상하자고도 하고 다른 나라들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능(能)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힘을 말합니다. 지혜와 지식이 능입니다. 힘을 동원하고 능을 다하여도 사람은 할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는 할 수 있고 되어집니다.

1. 오직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요한복음 3:1~이하를 보면 바리새인이요, 공회원인 니고데모라는 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영적인 호기심을 갖는 것은 대단히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려고 온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성경을 상당히 아는 사람이었으나 주께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자신이 거듭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지금은 변화를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무엇이 변화되어야 합니까? 나 자신이 달라져야 합니다. 달라진다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요,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변화를 말 할 때에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변화입니다. 내용은 달라지지 않고 겉만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음은 화학적 변화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는 물리적으로 변화된 신자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찬송 잘 부릅니다. 아멘도 잘합니다. 봉사도 하고 말도 잘합니다. 그런데 삶의 내용은 달라지지 아니 하였습니다. 이는 거듭난 게 아닙니다. 생명이 바뀌어지는 게 중생입니다. 일시적으로 열심도 냅니다. 그러다가 자기 기분에 들지 아니하면 별개 다 나옵니다. 진정한 변화는 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겉모양도 달라졌고 내용도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즉, 거듭나야 구원받는 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교회에 오랫동안 나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봉사하고 충성하였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받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언제 거듭났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거듭남이란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죽은 생명이 산 생명으로 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생명이 바뀌어진 이후에 행동도 달라집니다. 생명이 달라지는 게 먼저입니다. 생명이 바뀌어지지 않는 사람에게 행동의 변화를 강조하면 이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옷만 갈아입었다고 그 사람이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돼지에게 비단 옷을 입혔다고 돼지가 아닙니까? 돼지입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옷만 갈아입었다고 사람이 달라진 건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바로 사람 자체가 달라진 것을 말합니다. 감투라는 옷을 입었고 부자라는 소문을 들을 만큼 소유가 많아졌다고 그 사람이 변화된 건 아닙니다. 생각을 달리하였다고 거듭남입니까? 아닙니다. 거듭남이 지성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되어집니다. 성령이 역사 할 때에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는 죄를 죄로 알아야 가능합니다. 적은 죄라도 죄라고 깨달아져야 회개하게 됩니다. 이는 성령이 역사 할 때에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내가 회개하여야 하겠다는 의지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즉,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란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되는 것을 말합니다.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육은 무엇입니까? 흙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것이 생령의 사람입니다. 이것이 본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교만하고 불신앙으로 불순종하여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범죄하여 생령은 떠나고 육체 즉 흙만 남았습니다. 육만 남아있으니까 교회 안에는 육을 생각하고 육의 소리만 납니다.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원망, 불평의 소리가 납니다. 영의 사람들이 모이면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육의 인간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육체의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입니다. 왜 마귀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제는 죽은 자들입니다. 성령은 이런 사람들이 영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2. 성령은 사명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인간은 사명적인 존재입니다. 길가에 버려진 돌도 사명이 있습니다. 석공에게 발견되면 쓸모 있게 됩니다.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은 누구에게라도 하나님을 위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각자 다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솝의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덩치가 큰 당나귀와 작고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두 짐승의 생활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당나귀는 낮이면 산에 가서 나무를 져오고 밤이면 방앗간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강아지는 하루종일 빈둥대며 놉니다. 잠잘 때는 주인의 옆에서 누워 비비적거립니다. 다만 주인을 보면 꼬리를 흔들 뿐입니다. 그럼에도 주인이 사랑해 줍니다. 사랑을 독차지합니다. 이것을 본 당나귀는 불만을 품고 있다가 자기도 강아지처럼 해 보려고 작심을 하고 마구간에서 뛰어나와 갑자기 마루위로 올라와 익살을 부립니다. 밥상머리에서 꼬리를 흔듭니다. 그러다가 밥그릇을 엎어버립니다. 주인 옆으로 다가갑니다. 보다 못한 주인은 몽둥이를 가지고 와서 사정없이 떼립니다. 당나귀가 불평을 합니다. 아니 강아지는 그렇게 하면 사랑해주고 나는 때립니까? 그건 강아지가 하는 거고 너는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더랍니다.

각자의 사명이 다릅니다.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다릅니다. 주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고 내가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알고 그 일을 잘하면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무엇 하는 사람인지를 모릅니다. 근자에 은혜 받았다 하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의 일하여야 하겠다고 그리고는 신학교를 찾아갑니다. 신학교 가서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면 주의 일하는 거고 평신도로 말없이 봉사하는 건 주의 일 아닙니까? 지금은 참신하고 충성스러운 평신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문제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명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왜라는 말에 답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 일을 하느냐? 나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면 사명이 아닙니다. 직장도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일을 하는 데 나만 좋은 게 아니라 주인에게도 도움이 되고 다른 이들이 편안하게 사는데 공헌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 나라에 공헌하는 것이다 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같은 일을 해도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같은 일을 해도 사명감으로 하면 보람됩니다.

커다란 성당을 건축하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기술자 양반 지금 무엇하십니까?” 물었더니 하는 말, “보면 모릅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일을 해야 가족과 함께 먹고 사는 거 아닙니까? 참 고달픕니다.” 옆에 다른 사람에게 “지금 무엇하십니까?” “이곳에 큰 성당을 짓는데 나도 한 몫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묻습니다. “지금 무엇하십니까?” “예, 나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러 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웃으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더랍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사명의식 갖고 살아야 합니다.

사명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재능입니다. 재능이 없는데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늘이 들려주는 소리입니다. 엘리사가 낙심되었습니다.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세미한 음성을 듣습니다. 새 힘을 얻고 마지막까지 사명을 다하게 됩니다.(왕상 19장)

재능을 발견해야 합니다. 일을 잘할 수 있는 즉 What의 분야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다음은 열정입니다. 열정이 없으면 사명을 다하지 못합니다. 열정은 사명을 다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흥분하는 상태입니다. 너무나 좋고 보람을 찾아서 가슴이 설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흥분하니까 그 일이 기다려지고 하고 싶어 미쳐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허무하게 생각하고 힘들어합니다. 일에 열중하지 못하는 이는 허무함과 공허감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흥분하지 못하는 것은 사명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한 예를 들어봅니다. 전도하자고 말합니다. 전도해야 한다는데 아니라는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못합니다. 왜? 전도에 대한 열정 없이는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가슴에서부터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이 생겨나야 합니다. 셋째는 가치입니다. 가치 그러면 직장인들은 시장 가치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장 가치에 우선하면 이기주의자들이 됩니다. 일 자체에 대하여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주 앞에서 충성하는 사람을 보세요. 그 일에 대해서 보람을 찾습니다. 돈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돈을 위하여 일하기 때문에 돈 많이 주는 곳을 찾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일의 가치를 찾았기에 사명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음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내가 이 복음을 증거 하는 데는 결박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복음증거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삶에는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그 가치 중에 핵심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혜나 지식에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세미나에 참석하고 성경공부를 합니다. 돈을 드려서 라도 책을 삽니다. 핵심가치가 돈인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돈을 모읍니다. 그런데 그 돈을 유용하게 써보지 못 합니다. 어떤 이는 구제에 두는 사람은 무조건 남을 돕는데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핵심 가치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대로 이어야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들은 주님의 일을 하는데 우선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데도 주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영혼구원에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이들이 증인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증인의 사명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무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사명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오늘날 교회현실을 봅니다. 성령 받은 분들은 자기가 맡은 일 외에도 충성 되이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사명을 다하는 데는 희생 없이 못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집에 가서 청소해 주고 아기 낳은 젊은 자매를 위하여 빨래해 주고 밥해주는 일을 한 달 이상하였더니 교회에 따라 나오더랍니다. 이런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은 희생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성령 충만한 좋은 일꾼이 많다는 게 자산입니다. 자랑입니다. 전도자가 필요한 때에 성령 받고 전도하는 이들이 많다면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한해에 한 사람이 몇 백 명을 전도하였다고 하는 이가 있는데 그런 이들이 세 명 만 있어도 교회는 새롭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 의하여 교회는 부흥되기도 하고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성령의 능력 받아 맡은 사명 온전히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은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러나 그분과 연결되어야 힘이 전달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무엇이라도 할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인간은 무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언제 알았습니까?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인간은 자기들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성과 과학을 통하여 지상에 낙원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떠나는 탕자문명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세계 제1차, 2차 대전을 치루면서 인간의 이성과 과학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행복하리라고 기대했던 과학이 무기를 만들어내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그것이 핵이라는 무서운 무기입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나 능력으로는 인간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마음도 약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쉽게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신비한 어떤 힘이 아닙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영통 신통한 게 아닙니다. 지적인 힘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윌리엄 제임스(W, James) 라는 유명한 심리학자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영감(Inspiration) 이란 무엇입니까? 제임스는 난 설명할 수 없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분은 보스턴에 있는 필립스 브룩스(P, Brooks) 라는 목사님이오. 그 분께 물어보시오 라고 대답했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한계를 초월한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이 변화되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어떤 분이 예수 믿고 거듭났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갑니다. 그걸 본 친구가 묻습니다. 자네가 교회에 나간다며. 그래 무얼 알고 나가나? 알지 그래 예수님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야 미국이겠지. 그가 몇 살에 세상을 떠났는지 아나? 적어도 환갑은 넘겼겠지? 이 사람이 그렇게 모르면서 무슨 예수 믿는다고 그래. 그때 그가 말합니다. 나는 예수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몇 살까지 사셨는지는 모르지만 나 자신이 달라진 것을 보면 예수 믿는다는 증거가 아니겠나? 내가 게으르고 술주정뱅이였는데 지금은 부지런하고 술 끊고 착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몰라. 그렇습니다.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게 능력입니다.

성령은 치유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상처입고 신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모욕을 받고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슴속에 한 맺힌 잊을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기쁨도 없고 의미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게 치유입니다. 병중에 어려운 병은 마음의 병입니다. 마음에 공허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금실 좋은 부부가 같이 살다가 한쪽 편이 세상을 떠나면 심하면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마음에 우울증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이런 병은 약으로 치유되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웃기라는 겁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웃어주라는 겁니다. 같이 있어주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기쁨이 생깁니다. 마음에 치유가 나타납니다. 성령이 역사 하시면 세상에서 불치의 병도 고침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우리의 죄와 질병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흉악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 믿고 내가 범한 죄를 회개하면 죄가 없어집니다. 이는 사죄의 복음입니다.

이와 같이 내 몸에 세상에서 치유 불가능한 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 믿고 기도하면 병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신유의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마태복음 9:35절의 말씀대로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병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지금도 예수 안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통하여 육신의 병도 고치십니다.

신유의 역사는
1)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병 보따리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병을 크게 보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병보다 크십니다. 암이라는 병보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나의 병을 책임져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믿을 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2)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잘못된 이들은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는 기적의 우선입니다.
3) 쉬지 않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병을 위한 기도입니다. 주여 내 병을 고쳐 주옵소서.
4) 나는 병에서 고침 받았다고 선언하여야 합니다.
5)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병마는 물러가라. 내 병은 주님이 고치셨다 라고 선언하여야 합니다. 나는 환자라는 의식이 없어져야 신유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6) 간증하고 전해야 합니다. 나는 병에서 나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고쳤습니다. 그때부터 건강이 옵니다.

능력 중에 능력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통제력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을 때 성령은 안돼 그러면서 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성령은 되게 합니다.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령은 누구라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사명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령으로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령 받기를 사모합시다. 성령 받기 위하여 강청 기도하여야 합니다. 먼저 회개하고 간구 하다가 성령 받고 성령으로 되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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