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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동체 직분의 규칙 / 고전 14: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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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공동체 직분의 규칙
본문 : 고린도전서14:26-33                                 

교회 직분(은사 사용)의 규칙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26-33)


공동체와 개인의 행복

  미국과 이라크 사이의 전쟁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는 우리가 이라크 사람이 아닌 것이 "퍽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사담 후세인 같은 지도자를 만나지 않은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개인의 행복은 공동체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네팔이나 감비아에 태어났더라면 우리도 그들처럼 살고 있을 겁니다.  행복한 가정에 태어나면 행복해지고, 불행한 가정에 태어나면 불행해집니다.  개인과 공동체는 不可分離的 관계에 있습니다.  개인이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함께 행복해야만 같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21세기는 개인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에는 오히려 개인주의 시대가 아니라 공동체의 시대입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시대입니다.  반드시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어야만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상 종말이 다가오면 세상은 두 공동체로 양분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와 사단에게 속한 공동체입니다.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이 존망의 열쇠입니다.  국가든, 가정이든, 기업이든 마찬가집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교회 공동체를 인체에 비유합니다.  손이든 발이든 어떤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함께 아픕니다.  각 지체들이 편안해야 몸도 마음도 평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나는 항상 공동체 속에 있습니다.  앞으로는 점점 더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로마 시대부터 주후 1500년대까지 세계인구는 5억 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제가 태어났던 1950년 무렵에는 25억이 되었고, 2000년에는 60억이 되었습니다.  2010년에 70억, 2050년에는 98억이 넘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제 당대에만 세 배 이상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구가 많아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 대고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혼자 살려고 해 봐야 어디서 혼자 살 만한 구석이 없어요.  그러므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앞으로 개인의 행복은 전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은 매우 유익한 삶의 원리를 제공합니다. 

  좋은 공동체가 되려면 구성원들이 지켜야 될 일정한 원리가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다 좋은 공동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은사 받은 사람이 많다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난 사람끼리 만났다고 좋은 부부가 되고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잘난 것과 공동체의 행복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구성원들 사이에 직분을 감당하는 일정한 원칙이 있습니다.  이 원칙을 잘 지켜야만 좋은 공동체가 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로 그 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ss


파괴자가 아니라 건설자가 되라

  첫째로, 공동체의 파괴자가 되지 말고 건설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절)  여기서 "덕을 세우라" (edify ing, KJV)는 말은 헬라어로 "οικοδομην"인데 명사로써 건물, 빌딩이란 뜻입니다.  동사형 "οικοδομεω"은 집을 짓는다, 건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덕을 세우라는 말은 건물을 세우듯이 건설하라는 뜻입니다. 영문 성경에 보면 "strength ening"(강화시키라, NIV), "Be for the common good"(共同善을 위하라, JB) 등으로 번역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라는 말은 곧 교회 공동체를 허물지 말고 세우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첫 번째 규칙입니다. 

  먼저 고린도교회의 예배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예배 시간에 회중들이 모여 함께 찬송을 부릅니다. 당시 교회는 시편이나 혹은 그와 같은 가사의 찬미에 서로 화답하는 형태의 찬양을 불렀습니다.  찬양이 끝나고 지도자나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이 성경을 가르칩니다.  또, 예배 중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새롭게 깨닫고 회중에게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합니다. 그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당시 예배는 상당히 자유로운 형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전이나 회당에서 모임을 가졌는가 하면, 때로는 가정에서도 모였습니다.  찬송, 기도, 성찬, 애찬, 말씀 강론의 순서들을 자유롭게 배열했습니다.  만일 이런 예배에서 어떤 사람들이 임의로 찬송을 부르거나, 몇몇 사람이 한꺼번에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졸지에 예배는 무질서해집니다.  아무리 찬송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때에 맞춰서 불러야 됩니다.  아무리 신비한 방언이라도 공동체 예배가 방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계시라도 서로 먼저 하려고 하면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각자 가진 은사는 공동체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사용해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든 직분도 그렇습니다.  어떤 직책이든지 공동체를 헐면 안됩니다. 반드시 세우는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허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자기 모습만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힘드는 일은 피하고 얼굴 파는 일에만 나섭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을 헐뜯거나 흉을 봐서 품위를 손상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다른 사람의 얼굴을 세워주세요.  다른 사람으로 기뻐하게 하세요.  일군들로 하여금 의욕적으로 일하도록 격려하세요.  우리 교회는 이런 점이 나쁘다고 말하지 말고 이런 점이 좋다고 말하세요.  목사가 비록 별 볼 일이 없어도 최고라고 칭찬하세요.  그러면 정말 그런 줄 알고 열나게 일할 것 아닙니까?  모래와 진흙을 비교해 보세요.  모래는 아무리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다 허물어집니다.  진흙은 쌓아 놓을수록 단단하게 뭉쳐집니다.  왜 그럴까요?  뭉쳐지지 못하는 것이 모래알의 특성입니다.  잘 뭉쳐지는 것이 진흙의 특성입니다.  공동체가 얼마나 잘 결속되느냐 하는 것은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세우는 역할을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국가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지도자든 백성이든 공동체를 위할 때에 국가는 번영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중에 "The young king"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16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소년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국왕의 딸인 공주였습니다.  그러나 평민과 결혼함으로써 아버지에게 쫓겨났고, 그의 아들은 숲속에 버려졌습니다.  국왕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왕은 한가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쫓았던 공주의 자식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한편 숲속에 버려졌던 공주의 아들은 한 나무꾼 부부가 데려다가 기르고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들은 들에서 양을 치면서 아무렇게나 자란 그를 찾아서 왕궁으로 데려왔습니다.  왕궁에 온 소년은 너무나 황홀했습니다.  좋은 집에, 좋은 옷, 좋은 보석, 좋은 음식이 즐비합니다.  그는 정신 없이 이 방 저 방을 뛰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대관식을 앞둔 며칠 동안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첫 번째로는 창백하고 야윈 사람들이 자신이 대관식때 입을 찬란한 옷을 만들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에게 고용되어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노예나 다름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노예들이 선장에게 채찍질을 당하면서 노를 젓는 장면입니다.  배가 어느 해변에 도착하자 젊은 노예를 줄에 묶어 물속에 들여보내서 진주를 따게 했습니다.  여러 차례 진주를 주워 올리는 동안 노예는 피를 쏟고 죽었습니다.  선장은 만족한 듯이 진주를 모았습니다.  그 진주는 바로 왕의 대관식때 장식할 진주였습니다. 세 번째 꿈은 많은 사람들이 마른 강바닥을 파고 돌을 깨뜨리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왕의 대관식에 쓸 보석을 찾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련의 꿈을 꾼 어린 왕자는 고민했습니다.  내가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옷과, 왕관을 써야만 할까?  그리고 마침내 결심했습니다.  황금 옷 대신에 목동 차림의 옷을 입고, 보석 왕관 대신에 야생 장미로 만든 관을 머리에 쓰고, 목동의 막대기를 들고 대관식을 하겠노라고!  예배당에서 대관식을 하려는 순간 대신들과 군중들은 왕자가 미쳤으니 다른 왕을 찾아야한다고 떠들면서 다가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찬란한 햇빛이 창문을 통해 그의 옷을 비쳤습니다.  그 옷은 황금 옷보다 더 멋져보였습니다.  막대기에서는 진주보다 아름다운 흰 꽃이 피어났습니다.  머리에 쓴 장미 왕관은 어느 보석보다도 빛이 났습니다.  하늘의 빛이 왕궁 가득히 채워졌습니다.  음악과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전의 어떤 왕보다도 위대한 왕으로 등극한 것입니다.  왕이 백성을 위할 때 그 나라는 번영합니다. 

  공동체를 위하는 방법은 거창한 지위를 차지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예를 들면 개인의 신용을 지키는 일입니다.  개인의 신용은 곧 국가의 신용입니다.  세계적인 신용 평가 회사들은 기업의 신용 등급과 함께 국가 신용 등급을 매깁니다.  국가의 신용 등급은 어떻게 평가됩니까?  국가 안에 있는 주요 경제 지표들을 총합하여 매기게 됩니다.  기업들의 경영 상태, 정치 현황, 국가적 리스크, 외환 보유고, 경제 동향, 국민의 의식 수준 등등, 여러 가지를 평가합니다.  이러한 모든 경제 지표의 기본은 국가 안에 있는 경제 주체들의 신용 상태입니다.  결국은 개개인의 신용이 기본이 된다는 뜻입니다.  총 들고 싸우는 것만이 애국애족이 아닙니다.  각자 신용을 지키는 것도 애국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카드회사들이 적자라고 야단입니다.  지불 능력이 없는 젊은이들이게 마구잡이로 카드를 발급해 주고, 연체하면 연리 30%에 육박하는 고율의 이자를 받아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용불량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니까 경영난에 빠지게 된 겁니다.  신용 사회에서 공동체의 신용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고 어떻게 장사가 됩니까?  신용 불량자들도 마찬가집니다.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무조건 남의 돈을 갖다 쓰면 어쩔 것입니까?  최근 "신용회복 지원 위원회"에 상담을 신청한 72,000여명의 사람들 가운데 절반이 넘는 4만여 명이 구제 불능의 악성 채무자들로 지원을 거부당했습니다.  이들의 평균 월소득은 70만원 정도인데 평균 부채액은 4천만 원이 넘어요.  결국 국가적 손실이 되는 겁니다.  기업 등급이 떨어지고 국가 신용 등급이 떨어져요.  공동체를 망쳐놓고 개인이 잘 될 수는 없습니다. 

노사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떤 노조원들은 회사가 망하고 거덜날 때까지 투쟁만 합니다.  회사가 망하면 개인이 살 수 있습니까?  기업주도 마찬가집니다.  불법 상속만 획책하지 말고 종업원 먹여 살릴 생각을 해야 됩니다.  공동체를 살릴 때에 개인도 잘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사망과 지옥에 떨어진 인류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인류 공동체를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전 인류가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을 희생하여 전체를 살리는 정신으로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고, 국가도 살게 됩니다.  공동체를 세우십시오! 


차례를 지키라

  둘째로, 차례를 지키는 일입니다.  공동체는 질서의 사회입니다.  질서의 첫 번째가 바로 次例입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27-30절)  우선 예배의 질서를 생각해 봅시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고린도 교회입니다.  예배 때에 각자 감동을 받은 대로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고 말씀도 전합니다.  방언도 하고 통역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순서대로 해야 됩니다.  만일 누구에게 방언이 임하였다면 여럿이 한꺼번에 하지 말아야 됩니다.  최대한 세 사람 이내로 하되 순서를 정해서 하고 반드시 통역을 해야 합니다.  만일 누구에게 예언이 임했다면 역시 세 사람 이내에서 차례대로 하고 나머지는 그 진위를 판단해야 됩니다.  만일 이런 규칙을 무시하고 저마다 찬송하고 방언하고 예언하고 통역한다면 예배는 엉망이 될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세세히 설명한 것은 그만큼 예배의 질서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秩序의 세계입니다.  겨울에 기러기 떼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셨습니까?  수 십 마리가 V字 대형으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이동합니다.  어떤 놈이 앞으로 삐죽 머리를 내밀 수도 있는 데 전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개미 사회는 모든 동물 중에 가장 모범적인 공동체입니다.  개미 사회에서 여왕개미는 놀고 먹으면서 알만 낳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시기하지 않습니다.  일단 어떤 여왕개미가 선정되면 나머지 자매들은 모두가 不姙者들이 됩니다.  오직 일만 열심히 하는 일개미가 됩니다.  어떤 수학자가 수학적인 이론으로 연구한 결과 그것이 번식에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 사회는 어떻습니까?  모두가 윗대가리만 되려고 합니다.  도대체 꼬리가 되겠다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차례를 지키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학교에 들어가면 초등학교에서부터 일등만 하라고 합니다.  2등, 3등 이하는 등수로 인정도 안해요.  회사에 들어가든지, 결혼을 하든지 항상 항상 일등만 하라고 합니다.  일등 아닌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해요.  그러니까 죽어라 하고 먼저 가려고 하지요.  강변 도로를 가다 보면 도로가 합쳐지는 지점이 자주 나옵니다.  그러면 영락없이 옆으로 삐져 나와 곁길로 갑니다.  가다가 보면 다시 합쳐져요.  그러면 거기서 다시 합쳐지느라고 시간이 더 걸립니다.  차례를 지키는 것이 곁길로 빠지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훨씬 능률적입니다.  곁길로 가는 사람들은 IQ검사 좀 해 봐야 됩니다. 

  차례가 지켜지는 공동체는 번영합니다.  차례가 지켜지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러나 엄마가 아빠가 되고 아빠가 엄마가 되는 집안,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아이가 되는 집안, 여자가 남자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는 집안, 다 이상한 집안입니다.  가족들은 각자 자기가 있어야 될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시128:3-4)  차례가 지켜지는 회사는 좋은 회사입니다.  그러나 사장이 사원이 되고 사원이 사장이 되는 회사는 뒤집어질 회사입니다.  학교도 그렇습니다.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고 총장은 뒷 길로 다니는 학교는 입학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 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잠30:21-23)  차례가 없고 질서가 무너진 집단은 하나님께서 견딜 수 없다고 하십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철저한 질서가 있습니다.  목사는 목사의 순서가 있고, 장로는 장로의 순서가 있습니다.  구역장은 구역장의 순서가 있고, 교사는 교사의 순서가 있습니다.  남의 차례에 나서지 마십시오.  남의 위치에 서지도 마십시오.  오직 내 차례에 내 일만 충실히 하면 됩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바로 세워집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지만 다른 교회에 보면 그런 사람이 종종 있어요.  평신도가 목회를 하려고 하고, 목회자는 소신도 없이 오락가락 합니다.  그런가 하면 혼자 온 교회를 휩쓸고 다니면서 별 것을 다 참견하는 사람도 있어요.  누가 이러니 저러니, 좋으니 나쁘니...  여러분, 만일 우리 교회에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면 왕따를 시키세요.  저는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리고 해치는 사람을 최악의 인물로 생각합니다. 

  차례와 질서는 과학적으로 말한다면 장소와 시간의 배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 세계의 존재 법칙입니다.  원자핵을 돌고 있는 전자들도 각자의 궤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산소 원자는 8개의 전자가 서로 다른 궤도를 돌고 있지만 서로 부딪치지 않습니다.  태양계를 순환하는 행성들도 각자 자기 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대기권 안에서 일어나는 물의 순환, 기압의 변화, 바람의 이동, 모든 것이 질서 있게 배열됩니다.  밤과 낮의 변화, 계절의 변화, 생태계의 순환도 다 때와 장소에 따른 배열입니다.  누군가는 앞에 있어야만 되고, 누군가는 뒤에 있어야만 됩니다.  국군의날 군인들이 행진하는 것을 보세요.  전후좌우 위치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먼저 가고 나중 가고 시간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순서와 차례가 지켜질 때 멋진 행진이 됩니다.  인간 사회도 그렇습니다.  각자 자기 차례가 있습니다.  올 때의 차례가 있고, 갈 때의 차례가 있습니다.  男女의 차례가 있고 老少의 차례가 있습니다.  지위, 능력에 차례가 있고 일의 차례가 있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3:1)  차례대로 사십시오! 


자신을 제어하라

  셋째로, 자신을 제어해야 합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32-33절)  여기서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란 누구의 영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언을 말하는 자들의 영일까요, 예언을 듣는 자들의 영일까요?  둘 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찌 됐든지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언자들도 누군가 제어해야 된다는 점입니다.  남이 제어하든지, 스스로 제어하든지 자신을 제어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각 사람의 자기 통제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어떻게 내 속에 있는 욕망을 다스릴 것인가?  그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서 가인의 집안은 깨졌습니다.  그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서 아브라함도 하갈을 취하고 이스마엘을 낳고 가정 불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서 다윗도 밧세바 사건에 빠져서 자식들이 싸우게 되고, 왕의 위엄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가?  여러분, 자신이 있습니까?  누구도 자신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여 계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매일 같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이기도록 도움을 청하세요.  이성을 잃지 않도록 도움을 청하세요.  아는 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세요.  우리는 하나님도 아니고 천사도 아닙니다.  다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감사하노라"(고후2:14)  내가 이기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이기게 해 주십니다.  모든 일에 성공적인 자기 통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해 봅시다.  우리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행복은 철저하게 공동체의 운명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 중요한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허는 자가 되지 말고 세우는 자가 되십시오.  둘째로, 자기 차례를 지키십시오.  셋째로, 자신을 제어하십시오.  각자가 이 원리를 지킨다면 가정이든, 교회든, 국가든 제대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자신도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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