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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절제하며 삽니다 (마 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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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절제하며 삽니다(마6:16-18) 

마6:16-18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늘은 우리가 금식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마태복음 6장 전반부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힘써야 할 의가 세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가 구제였고, 둘째가 기도였고, 셋째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금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불의는 멀리 해야 되지만, 의는 늘 가까이하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구제는 우리가 이웃을 향해서 행해야 할 의이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행해야 할 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금식은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향해서 힘써야 할 의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줄 압니다.

남극에 가면 작은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남극의 신사라고 불려지는 펭귄들이 알을 낳기 위해서 모여드는 곳입니다. 그리고 펭귄이 알을 품고 새끼가 부화되면 그 새끼를 기르는 섬이기도 합니다. 따뜻한 봄이 되면 수많은 펭귄들이 알을 낳기 위해서 그 작은 섬에 모여듭니다. 수천 마리 아니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모여들기 때문에 그 섬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빽빽합니다.

펭귄의 암컷은 보통 한두 개 정도의 알을 낳습니다. 그러면 암컷과 수컷이 번갈아 가면서 알을 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끼가 알에서 나오게 되면 펭귄들은 새끼를 그곳에 놓아두고서 먼바다로 먹이를 찾아 나섭니다. 펭귄들은 새끼가 좋아하는 작은 물고기, 오징어, 새우 등으로 잔뜩 배를 채워서 새끼가 있는 작은 섬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보통 보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보름 동안에 새끼 펭귄들은 작은 섬에 남아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내면서 엄마펭귄, 아빠펭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드디어 보름이 지난 뒤 펭귄들이 배를 가득 채워 가지고 섬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면 부모펭귄은 자기 새끼를 찾아가 배속에 가득 채워온 먹이를 토해내서 자기 새끼들에게 먹여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천, 수만 마리가 되는 펭귄들 가운데서 어떻게 자기 새끼를 용하게 찾아내느냐는 것입니다. 펭귄들은 겉으로 보기에 똑같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펭귄들은 절대로 혼동하는 법이 없이 자기 새끼를 정확하게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펭귄들은 자기 새끼를 찾을 때 모양으로 찾는 것이 아니고, 울음소리를 듣고 찾는다고 합니다. 펭귄들은 새끼의 울음소리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새끼들도 부모펭귄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펭귄들이 먹이를 배속에 가득 채워 섬으로 되돌아올 때, 새끼를 찾는 소리와 또 부모를 찾는 소리로 얼마나 시끄럽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펭귄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정확하게 자기 새끼의 소리를 분간해내고, 또 새끼펭귄들은 자기 부모의 소리를 다 분간해낸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영적인 견지에서 보면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늘 끊임없이 우리 귓가에 들려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우리 마음의 초점을 하나님에게 맞추면,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세상 일로 얼마나 분주합니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분주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을 찾아서 그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는 육신의 욕구를 쳐서 복종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마저도 단념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금식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주기도문 안에는 모두 6개의 간구가 들어있습니다. 그 가운데 네 번째 간구가 무엇이었습니까? 6:11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거부하는 금식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시고, 또 한편으로는 오늘 본문에서 금식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심을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과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금식과 관련해서 간단하게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행했던 잘못된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이 행해야 할 바른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로, 오늘날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 모두 절제된 삶을 통해서 모든 일에 승리함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6절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금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가 금식을 했습니다. 다윗도 금식을 했습니다. 다니엘도 금식을 했고, 엘리야도 금식을 했습니다. 개인적인 금식뿐만 아니고, 단체가 더불어서 함께 금식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선지자 사무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했습니다. 또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면서 금식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유다 백성들과 더불어 사흘을 밤낮으로 금식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이 금식하라고 명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금식하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금식을 한 경우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에 단 하루만 금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레위기 16장에 기록된 대속죄일의 경우입니다. 그날만큼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스스로를 괴롭게 하면서 온종일 금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대속죄일의 규례를 문자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단 번에 제물로 드림으로서 대속죄일의 모든 규례를 이미 다 성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우리가 더 이상 구약의 성도들처럼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지 않는 원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스스로 어떤 일이 있을 때 자발적으로 금식을 행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던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는 자신이 이레에 두 번, 곧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하필 월요일과 목요일을 택해서 금식했겠습니까? 물론 명목상의 이유는 이러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모세가 금식을 하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간 날이 바로 목요일이고, 시내산에서 내려온 날이 바로 월요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이기 때문에 모세가 40일 동안 금식한 것을 기념해서 자기들도 그 두 날 곧 목요일과 월요일로 정해서 금식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월요일과 목요일은 전통적으로 장날로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터에 모였습니다. 농사꾼들도 모이고, 장사꾼들도 모이고, 또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과 구경꾼으로 왁자지껄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일부러 월요일과 목요일을 택해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16절에서 그들의 외식적인 모습을 두 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
첫째, 그들은 슬픈 기색을 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옷 가운데서 제일 헌 옷을 골라 입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옷을 잡아 찢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재를 뿌렸습니다. 몸에는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슬픈 모습을 가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금식한 티를 내려고, 멀쩡한 얼굴에 재를 발라서 얼굴이 상해 보이도록, 창백해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왜 그들이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을 흉하게 했다고 했습니까?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이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의 목적은 온전히 금식하는 자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금식을 한답시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로 가 있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사람에게 향하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외식적인 금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6절 하반부입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미 그들은 받을 상을 다 받았습니다. 더 이상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사람들의 인정은 받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서 받는 인기는 쉽게 사라져버립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생각해 보세요. 누구나 취임할 때는 인기가 하늘을 찌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인기는 곧 떨어지고 맙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힘들게 금식하고서도 그들이 받은 상이라고는 쉽게 사라져버리고 마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기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리실 화뿐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행해야 할 바른 금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7절입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내기 위해서 일부러 머리를 헝클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재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금식할 때 머리를 깨끗이 빗고 기름을 바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얼굴에 재를 발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금식할 때 우리의 얼굴을 씻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8절입니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의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은 하나님은 보지 않으십니다. 고개를 돌려버리십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상대로 하는 금식은 하나님이 반드시 보십니다. 6:1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무슨 의를 행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상대로 해야지, 사람을 상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제를 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을 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금식을 할 때는 티를 내지 말고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평소와 같이 밝고 명랑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나님만 아시도록 금식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생을 아프리카의 복음화를 위해서 애썼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였습니다. 그러니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한 번도 자기가 주를 위해서 헌신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이요,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생을 하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기뻤습니다.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 가운데서도 언제나 밝고 명랑한 유머가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나운 사자가 갑자기 그를 습격해서 그의 한쪽 팔을 물어뜯었습니다. 그의 살점이 떨어져나갔습니다. 그의 팔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 그의 하인이 얼른 달려와서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그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띄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나의 몸은 나의 모든 사명이 다하기까지 죽지 않을 불사신인 모양이다!"
그래서 "사명자는 죽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바로 이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사나운 사자에게 물어 뜯겼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생각하면서 미소를 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입니까?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욕구 가운데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식욕입니다. 마음 속에는 그와 같이 엄청난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연 내색하지 않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은 채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참되고 바른 금식입니다.
그러면 참된 금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8절 하반부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을 상대로 한 금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금식은 반드시 하나님이 보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가 먹을 것을 먹지 않고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그러면 그가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되면, 그 어떤 부모가 모른 척 하고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 사랑하는 자녀가 금식하면서 매달리는데 그냥 무심히 쳐다만 보고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게 사랑이 부족해서 자녀들이 금식하면서 매달리고 있는데 가만히 쳐다만 보고 계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고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보이려고 금식하십니까? 사람은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금식에 대해 반드시 잊지 않으시고 속히 좋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오늘날 금식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7절입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금식할 때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금식할 때란 과연 언제입니까?
마9:14-15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루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9:15입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이 멀리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는 우리의 영적인 각성을 위해서 금식을 해야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멀리 빼앗긴 것처럼 느껴지겠습니까? 육신의 일에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등 육적인 일에 얽매이다 보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영적인 일에는 아무래도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그러한 때는 우리의 영을 맑게 하기 위해서,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 받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는 육신의 욕구를 쳐서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니가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에게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살이 너무 쪄서 탈입니다. 그래서 살을 좀 빼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살을 뺄 수 있겠습니까? 좀 가르쳐 주십시오."
의사는 아주머니를 여러모로 진단하고 난 뒤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아주머니의 살을 빼는데는 그저 식이요법이 제일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제가 일러드리는 대로만 하십시오. 현미밥 한 그릇에 묽은 야채국물을 만들어서 함께 드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곁들여서 과일을 하나만 드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살이 빠질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하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무엇인가 궁금한 점이 있다는 듯이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방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제가 식전에 먹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식후에 먹어야 합니까?"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먹는 것을 참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과 관련된 속담이 많습니다. 예컨대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목구멍이 포도청," "수염이 대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할 놈이 없다," "먹는 개도 아니 때린다."

그만큼 인간의 욕구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바로 식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몸을 쳐서라도 복종시키겠다는 심정으로 식욕을 잘 절제하면, 그만큼 우리 몸의 다른 욕구들은 쉽게 절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9:25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육체의 종노릇하면서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일에 절제하면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돈을 너무 헤프게 쓰는 사람은 돈금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몇 번 입지도 못할 사치스러운 옷을 자꾸 사는 사람은 옷금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잠이 너무 많아서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에 잘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잠금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 아침잠이 너무 많습니까? TV 드라마를 너무 오래보아서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TV금식하는 법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을 함부로 남발함으로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은 필히 말금식, 수다금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금식에 대한 교훈을 주셨겠습니까? 금식을 함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자랑하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육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모든 일에 승리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라고 금식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 모두가 절제된 삶을 통해 매사에 승리함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라고 칭찬 받고, 또 주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아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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