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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에 가까운 우리 / 히 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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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가까운 우리
히브리서 6장9~12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아주 무서운 책망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6절 말씀이 동네에 이사온 어느 교인이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 탐방하던 중에 우리 교회도 다녀갔다 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더니 다니고 싶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설교가 너무 무섭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가 설교를 잘 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다시 보면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책망하시고 경고하시는 말씀이 너무나 많이 나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언서를 보세요. 얼마나 무서운 책망이 나옵니까?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책망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책망으로 끝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책망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 깊이 베어 있는 책망을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먼저 우리 지난주에 나누지 못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7-8절 여러분은 7-8절을 읽으시면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여러분! 사람은 관계의 존재입니다. 상대방과 내가 어떤 관계냐에 따라 상대방의 말이 해석이 됩니다. 관계가 나쁘면 상대방이 하는 말을 모두 왜곡해서 해석합니다. 그러나 관계가 좋으면 모든 말들과 행동들을 다 좋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인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맺었는데 좋은 관계이냐 서먹서먹하거나 좋지 않은 관계이냐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우리가 인정하고 다시 7-8절을 보시면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7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면서 나는 7절의 사람이다 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웬지 하나님 앞에 꿇리는 게 있어서 8절이 나의 모습이다 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조금 더 분석 해보세요. 채소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채소는 남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가시와 엉겅퀴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합니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가시를 냅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내 놓은 가시는 결국 남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성도 들 가운데에는 채소처럼 남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철저히 자기만을 위하여 울타리를 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만의 울타리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결국은 남에게 해를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은 복을 받고 한 사람은 불사름을 당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7-8절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밭입니다. 밭은 변하지 않습니다. 터는 변하지 않는다 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 중에는 채소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처가 많아서 늘 가시로 찌르고 엉겅퀴로 긁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채소와 가시는 밭이라는 곳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 터 위에 세워진 구원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에는 어린아이처럼 아직도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가시를 내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성숙하여 남을 위하여 사는 채소를 생산해 내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나타난 삶의 열매이지 근간은 아닙니다. 근간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밭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구원의 텃밭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시를 내는 삶이면 태워서 다시 그 땅에 채소가 심겨지는 성숙한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주 성령이 주시는 사이드 음성을 들을 때가 종종 있는데 오늘도 사이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가시 같은 인생이 불타면 더 탐스런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된다....그렇지요? 가시를 불태워 보십시오. 재가 된 가시 위에 이른 비와 단비가 내리면 일등 퇴비가 되는 거 아닙니까? 거기에 채소를 심어 보세요. 정말 싱싱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겠지요. 저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가운데 가시를 내는 인생이 있다면 성령의 불로 태움 받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이른 비와 단비로 말미암아 기름진 옥토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9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부릅니다. 영어 성경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너를 그토록 무섭게 다그치는 이유는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집에 외삼촌이 놀러 오셨습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아버지는 저에 대한 칭찬을 외삼촌에게 하셨습니다. 저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는 둥... 그 때 외삼촌이 저에게 테스트를 하시는데 영어 문장 5형식에 대해서 설명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마침 제가 책상에서 문장 5형식을 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저는 멋지에 책을 보면서 설명을 했습니다. 외삼촌이 가시고 나서 저는 아주 혼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제가 책을 보고 읽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외삼촌 앞에서는 칭찬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경고를 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9절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영어성경에는 구원을 동반한다 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바이블은 구원으로 가는 길 위에 우리가 있다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경고를 들은 사람들아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 내가 아무리 너희에게 심한 말을 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의 길목에 서 있게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길목에 서 있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은 무엇입니까?--10절 성도를 섬기는 것과 지금도 성도를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와서 성도들을 섬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돈을 벌고 있는데 나는 그 사람보다 쳐지는 거 아닌가? 남들은 지금 놀러 다니면서 연애하기 바쁜데 나는 새 가족 섬기랴 구역장 하랴 혹시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가? 지금 이 시간에 형제 자매들을 섬기는 것을 중단하고 독서실에 가서 공부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성도들을 잘 섬겨도 내가 늘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이 들 때마다 갑자기 하고 싶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회의가 들 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지 않은 채 여전히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볼 때가 왜 내가 목사가 되었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제 속에 이런 마음이 들어요. 너 목사 되지 않았으면 뭐하면서 살 것 같으냐? 없지? 목사 안되었으면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목사 된 것에 감사하고 계속 목사 해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한 선배가 있습니다. 그 선배는 스테반 집사님이십니다. 베드로는 한번 설교에 3천명이 회개했다는 데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이 충만하고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난 분이 설교 할 때 어느 누구도 회개 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사람들은 스테반의 설교를 듣고 회개는커녕 모두 돌을 던져 스데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불의 한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밭 위에서 행하는 모든 사역들을 기억하시고 알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터 위에 서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기분을 오늘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도를 섬기는 사역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공연히 마음에 불편함이 있듯이 봉사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 지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예수님의 영이 내 가운데 없으면 우리는 남을 위하여 섬기는 마음을 가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남을 섬기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사역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배 마친 후에 모른 척 하고 돌아가는 담대한 심장을 구원 받은 사람은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돌아간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나요? 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그 자체를 보시고 너무 너무 기뻐하십니다.

지난 4월 달에 청년 교회에서 또래 찬양 대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당신 아들이 찬양 한다 고 노인 어르신께서 구경하러 오셨습니다. 이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자식이 하는 것이 아름다고 보고 싶었으면 노인들이 20대 후반의 아들이 하는 모습을 보러 오셨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 아들이 베이스기타를 조금 합니다. 중고등부 예배 시간에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이 베이스 기타를 치는 모습이 정말 보고 싶어요. 그런데 볼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에는 재주가 없다고 핑계대거나 시간이 없다고 발뺌하거나 사역이 힘들다고 중단한 채 그만하고 잠수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마도 히브리서를 읽어야 할 독자들 가운데에도 이렇게 잠수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11절은 말씀하십니다.--11-12절 각 사람의 동일한 부지런함을 끝까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끝까지 부지런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소망 때문입니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했을 때 폴란드 유대인 전용 시장에 한 노인이 나타나 빈 책상을 앞에 두고 소리쳐 외쳤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팝니다. 그런데 그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상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어르신 아무 것도 없는데 무얼 파십니까? 그러자 노인이 이 사람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을 팔고 있습니다. 나의 동포여 소망을 잃지 마십시다. 여호와는 우리의 도움이시오 피난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소망이 없는

인생은 내가 가지고있는 것들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아닙니다. 권력입니까? 아닙니다 지식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두려움 밖에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구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란 사람을 아십니까? 이 사람은 늘 불안에 떨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크레믈린 궁에는 8개의 침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밤이 되면 이 사람은 8개의 침실을 다 잠 그어야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안심이 안되어서 이 방 저 방을 번갈아 가면서 잠을 자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여러분! 모든 것을 그만 포기하고 싶은 여러분!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의로우신 오른 손으로 붙잡아 주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소망이 있는 인생은 열심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는 인생은 목적이 분명합니다. 소망이 있는 인생은 도중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루 하루를 창조 해 나가실 때 아침이 되어 저녁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저녁이 되어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루 하루를 창조해 나가시면서 우리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시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아침은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우리의 인생은 어두움의 밤에서 환한 아침의 모습의 창조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게으르지 마십시오. 계속 믿음의 전진을 하십시오. 12절의 말씀처럼 이미 우리 앞에는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을 놓치지 않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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