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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어디 있느냐? / 창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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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1-12
네가 어디 있느냐?

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어서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느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가끔 보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불평 불만이 많은 그 교인을 특별히 집으로 초대해 잘 준비된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이제 막 음식이 담긴 그릇 뚜껑을 열고 식사를 하려는 참인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목사님은 먼저 식사를 시작하시라고 권하면서 한 가지 당부를 했습니다. “저 식탁 가운데 놓여있는 저 그릇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뚜껑을 열지 마세요” 하면서 옆방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내외가 도대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식탁에 놓여있는 음식들만 해도 진수성찬인데, 저 뚜껑 덮인 그릇에는 무슨 음식이 담겨 있을까? 그래서 살며시 뚜껑을 여는 순간, 푸드득 하며 갇혔던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 살아있는 새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새를 잡아넣을 수도 없고 참 난감하고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들어오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당신도 틀림없이 아담의 후예이군요. 아담과 하와를 원망할 것 없이 당신 자신이 아담이 아닙니까? 이렇게 음식이 넉넉한데도 뭐가 또 아쉬워서 열지 말라는 뚜껑을 열었습니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에덴 동산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내 속에 있는 악한 본성을 지적하고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아담이란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장로님은 병원에 가서 종합 진단을 받았는데, 결과가 다 좋은데 콜레스테롤 수치가 조금 높아서 몇가지 음식을 조심하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콜레스테롤의 함유량이 많은 굴이나 새우, 오징어, 장어 같은 것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돌아온 바로 그날 점심 식탁에 마침 새우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왜 그렇게 새우가 맛있는지 자꾸 먹게 되더란 것입니다. 먹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먹으니까 더 맛이 좋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은 혼자 속으로 말하기를 “너는 틀림없이 아담의 후손이구나”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그렇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더 하고 싶고, 호기심이 가고, 더 마음이 끌리는 법입니다. 음식 뿐 아닙니다. 도덕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 그러하고, 신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식욕이 당기는 대로 먹으면 몸에 다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은 몸에 나쁜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짠 것을 먹어서는 안 될 사람이 짠 것을 좋아하고, 단 것을 먹어서는 안 될 사람은 죽어라고 단 것만 좋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을병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만 하면 참 좋은데, 분명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사람은 이렇게 고약한 존재입니다. 실제로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여 죽을 병에 걸린 인간을 향하여 물으시는 하나님의 세 가지 질문이 창세기에는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여 두려워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있는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네가 어디있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지금 아담이 있는 장소를 물으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아담의 상태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네 영혼이, 네 인생이 어떤 형편에 있느냐, 나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두 번째는 동생을 죽인 가인을 향해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갈에게 “네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사람이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 곧 나와 내 자신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내가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우리 인간됨의 본질을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단지 아담, 가인, 하갈에게만 묻는 하나님의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모두에게, 지금 네가 하나님과, 네 이웃과, 그리고 네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질문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찾아 오셔서 묻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혜를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인생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전 역사를 통하여 타락 이후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을 찾고 부르십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잊으나 하나님은 죄인이라도 잊지 않으십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고, 멀리하고, 피하고, 숨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까지 부인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죄인이라도 찾으시고 가까이 오셔서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 말씀은 그 전체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절정이 범죄한 우리 인간을 찾아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친히 오신 사건이며,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달려 죽으심으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가 완성된 것입니다.

실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 의사가 갑자기 체중이 줄면서 몸이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고 친구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습니다. 진찰 결과 위암 3기였습니다. 수술을 할 수도 없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한 것은, 그 의사는 바로 위암을 전공한 의사였던 것입니다.

자신은 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정작 자신은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진단조차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 자기가 자신을 몰랐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정작 자기는 예외시 했기 때문입니다.

환자를 보면서 나도 환자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나도 죽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죄지은 것을 보면서 나도 죄인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습니다. 사실 인생에 있어서 자기 자신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큰 문제요, 자기 인생을 진단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느 시점에 서 있는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며 신앙 안에서 내 자신을 점검하는 일이야 말로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담은 우리 인간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범죄 했으니 죽으면 그만이겠으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십니다. 여기에 종말론적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은총의 기회입니다.

자, 다시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첫째로 하나님 앞에는 숨길 것이 없다는 진리가 담겨있는 질문입니다.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고 하나님을 두려워 한 나머지 하나님을 피해 동산 숲 속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숨은 아담과 하와를 내버려 두지 않고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숨을 수가 없습니다. 동산 나무가 범죄한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숨기워 주지 않습니다. 무화과 나무 잎으로 자기 수치를 가렸지만, 그것은 아침 해가 뜨면 곧 말라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숲에 숨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허무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담의 후예인 오늘 우리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언제까지 살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도, 숨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을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속이고 숨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는 없습니다. 남을 잠시 속이고 숨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분, 영원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속이거나 숨을 수는 없습니다. 나의 추한 모습을 인간적인 공적이나, 명예나, 물질이나, 어떤 세상 자랑거리로 잠시 치장하고 감추고 장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내 자신을 가리우고 숨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자기의 현재 실력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그것에 대한 솔직한 학습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실력이 남에게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부끄럽게 여기다가는 실력의 향상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인격 형성도 그렇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약점을 숨기려고 합니다. 감추고 안그런 척 합니다. 그러나 정신 건강에는 약점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 오히려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숨길 수도 없습니다.

시편 139편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 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옵니다.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하나님의 질문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위치, 지리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느냐 혹은 그 밖에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그래서 나를 돌보시고 찾아오시고, 품어 주시고, 용서해 주기를 기뻐하는 하나님 안에 늘 거하며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둘째로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 말씀 밖으로 떠난 인간을 부르시고, 말씀 안에 살도록,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범죄한 인류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피하고, 숨고, 하나님께 도전하며 살아 왔음에도,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버리지 않고 계속 불러 오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서 1장 18절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어다.” 요엘서 2장의 말씀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아담처럼 그 영혼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사람은 없습니까? 몸은 이 자리에 있으나 그 영혼은 탕자처럼 아버지를 멀리 떠나 이방 사랑들의 돼지나 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혹 우리 가운데 길 잃은 양처럼 갈 길을 잃고 허둥지둥하는 이는 없습니까? 요나처럼 위대한 사명을 받고도 잠자는 이는 없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영접하소서 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에 찾아야 합니다.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불러야 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겨주실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가 널리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아멘으로 응답을 해야 합니다.

셋째로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하나님의 질문은 아담을 새 출발시키기 위한 사랑의 물음입니다. 아담은 분명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에덴 낙원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이 질문 가운데 갖게 된 것입니다. 에덴에서 즉시 쫓겨난 것이 아니라, 회개와 용서의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은 질책하고 심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하여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아담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회개하고 뉘우친 것이 아니라, 변명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남에게 책임을 미루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종신토록 수고해야 먹고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삶의 모든 확녕을 고난 속에서 만들어 나가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죄의 값이기도 했지만, 결국 회개와 용서의 기회를 놓친 결과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지만, 다른 한편 하나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덴을 떠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창세기 3장 2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밉지만 죄의 값을 치르는 고난의 길을 걷는 아담과 하와를 측은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 크신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라고 해석합니다.

사람은 죄와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랑 잎으로 가리우지만,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그 생명의 값을 치르고 든든하고 헤어지지 않는 옷을 입혀 보내십니다. 그 생명의 값은 바로 내 죄의 값을 대신 치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번 주일부터 사순절의 귀한 계절을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은 후 사흘만에 부활한 부활절을 바라보며 40일 간을 경건한 신앙의 계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사순절에 우리 인간됨의 본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드러내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다시금 회복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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