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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단계-4/ 거룩성을 회복하라 / 벧전 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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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단계 4/ 거룩성을 회복하라 
성경본문: 베드로전서 1: 13-16

  우리는 신앙의 네 단계에 대해서 지금 나누고 있습니다. 그 신앙의 네 단계란,

  1단계/ 거듭남의 단계-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구원의 확신 속에 거하는 단계

  2단계/ 성장의 단계(은혜의 단계)- 갓 태어난 아기가 젖을 먹고 부모의 사랑과 관심 가운데 자라가듯 말씀과 기도를 통해 훈련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도 경험하고 말씀을 통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아가고 기도의 깊이를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단계입니다. 이 기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단계입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단계/ 사역의 단계(일꾼의 단계)- 영혼을 살찌운 채 가만히 있으면 영적 비만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만하게 됩니다. 이제 성장의 단계를 넘어서서 사역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주님과 교회와 다른 이들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단계입니다.

  4단계/ 성품의 단계(인격의 단계)- 이 단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단계입니다. 목회자도 사역의 단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성품의 단계에까지 올라가야 참된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최종 목적은 이 성품의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단계입니다. 즉 성화(聖化)의 단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의 네 단계에서 세 단계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정말 성숙했다”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이 네 번째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은 신앙의 단계 마지막 네 번째 단계인 성품(性品)의 단계, 인격(人格)의 단계에 대해 나누고자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참 많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는 열심히 주님께서 맡겨주심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도 많지는 않더라도 찾아보면 꽤 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주의 사역을 감당하다가도 그 열심이 열매를 맺기보다는 그 열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다 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할까요?
그것은 열심은 있으되 그 성품이, 그 인격이 못 미친 이유입니다. 성품이, 인격이 성숙되지 않은 사람이 사역을 잘못하면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를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흠, 그러니까 나는 성품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으니까 하던 일들도 이제 그만둬야겠구먼.”

  이런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주님의 일에 합당하게,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성품을 달라고 기도하고 그러한 성품으로 자신을 연단해야지, 자신이 하고 있던 일도 손을 놓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밴댕이 소갈딱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밴댕이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청어과에 속하는 바다물고기로 약 15㎝정도의 크기인데 강화도에 가면 이 밴댕이회가 유명하더라구요. 그런데 이 밴댕이는 워낙 성질이 급해서 그물에 닿기만 하면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금방 죽어버린답니다. 그래서 속이 깊지 못하고 금방 금방 자기감정을 표출하고 성질을 내는 사람을 일컬어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말을 쓴다고 합니다.

  아무튼 주님은 그 성품과 인격이 성숙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신앙의 마지막 단계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노력만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부단히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도 덧 입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성품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그 성품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1. 우리가 이루어야 할 성품은 거룩성입니다(15, 16절).

  오늘의 본문 15, 16절에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하십니다. “거룩하라”는 말은 하기오스(ἃγιος)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구별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비신앙적인 것, 세상적인 것과 철저히 구별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적 기준에 의한 좋고 훌륭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에 좋고 훌륭한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성품은 세상적 기준보다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합니다. 세상에서는 원수 같은 사람,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사람 등은 미워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원수조차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은 적당히 수단과 묘수를 부리는 것이 괜찮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철저히 정직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권세를 누리며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낮은 자의 자리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철저히 종 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거룩성입니다. 거룩성이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표정을 엄숙하게 하고 무조건 TV나 영화를 안보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에만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거룩성은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TV나 영화를 보더라도 분별력을 가지고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인간에게 주어진 성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은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성품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이 성품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성품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성품은 우리의 인생을 마치고 주님의 나라에 서면 완전하게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화(靈化)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은 그 거룩성을 점차 회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단계입니다.


2. 우리의 성품의 목표는 예수님의 성품까지입니다(15절).

  그러면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거룩해져야 합니까? 오늘 본문의 15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性品)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의 성품”에 이르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조금 더 거룩한 삶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사랑이 있고, 좀 더 인내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신의 성품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어느 정도 되었다고 만족하지 마십시오. “이만하면 되었지”라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항상 부족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빌립보서 3장 12절에 “내가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언제나 아직도 부족한 자인 것처럼 여기며 정진합니다. 그는 물질이나 환경에 대해서는 자족하기를 배웠으나(빌 4: 11, 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의 사역과 온전한 성품을 이루는 일에는 늘 부족하다고 여기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위대한 주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3. 우리는 온전한 성품을 위해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14절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私慾)을 본받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욕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성품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도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라고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에는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것은 가만히 있어서 될 일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계속하여 27절에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시키지 않으면 그 성품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즐기기를 원하는 것, 자기가 편한 대로 다하고 어떻게 그 성품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화를 내고 싶을 때 다 내고, 짜증낼 때 다 짜증내고, 욕하고 싶을 때 다 욕하고, 다른 사람 흉 볼 것 다 보고, 자기 이익은 다 챙기고, 어떻든지 간에 다른 사람에게 안 지려고 하고, 자기 맘에 안 들면 픽 토라지거나 어렵게 하고, 자신을 높이려 하는데 어떻게 신의 성품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겸손할 수 없습니다. 온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 내 욕심이 드러낼 때마다 “나는 죽은 자다”라고 늘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따라해 봅시다. “나는 죽은 자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원래 죄인이 십자가형을 받을 때 죄인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면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 그는 죽은 자로 인정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이 박혔어도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습니다. 꿈틀거리며 움직입니다. 자기 의지대로 발버둥치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순간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자기의 자아(自我)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나 자기 의지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무엇이라고 말해야 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나는 죽은 자다!”

  자신을 죽은 자로 인정하고 죽은 자처럼 살 때 우리에게는 신의 성품이 조금씩 더 자라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바보 같은 삶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이것을 이용해서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사는 동안 우리의 삶이,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4.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옛말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말입니다. 또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라는 말도 많이 사용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유유상종(類類相從)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린다는 말이지요. 디모데후서 2장 22절을 한 번 읽어봅시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라고 이야기 합니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어울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성품은 보다 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도 교제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제는 그리스도인들끼리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신앙이 성숙해져 가면 세상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져 가게 됩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직장이나 학교,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기 위해서입니다.

  경건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거룩해질 수 있다면 완전하게 거룩하신 분이신 우리 주님과 깊은 교제를 더하면 더할수록 우리의 성품은 거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카톨릭 신부는 그 성품이 참으로 거룩해진 사람이 개신교 목사님들보다는 많습니다. 왜냐하면 카톨릭 신부님들은 깊은 명상을 통해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시간을 많이 갖기 때문입니다. 반면 개신교 목사님들은 심장이다, 설교 준비다, 교회 행사다 하여 주님과 그렇게 깊이 있는 교제를 가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깊이 있는 교제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그 시간을 누리십시오. 주님의 거룩함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Q.T.가 그러한 주님과의 교제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Q.T.를 생활화하는 것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첫 번째 단계가 될 것입니다.
  우리 새비전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거룩함에 한 걸음씩 나아가는 자들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다함께 머리 숙여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저희도 거룩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겸손함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것처럼 저희 그렇게 겸손한 종의 자세를 가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모든 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던 것처럼 저희도 오래 참게 하옵소서. 주님이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인내하셨던 것처럼 저희도 모든 핍박과 고통과 어려움을 인내로써 견뎌내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를 위해 매일매일 “내가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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