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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단계-3 / 일꾼은 적으니 / 마 9:35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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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단계 3/ 일꾼은 적으니… 
성경본문: 마태복음 9: 35 - 38


  우리는 신앙의 네 단계에 대해서 지금 나누고 있습니다. 그 신앙의 네 단계란,

  1단계/ 거듭남의 단계-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구원의 확신 속에 거하는 단계

  2단계/ 성장의 단계(은혜의 단계)- 갓 태어난 아기가 젖을 먹고 부모의 사랑과 관심 가운데 자라가듯 말씀과 기도를 통해 훈련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도 경험하고 말씀을 통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아가고 기도의 깊이를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단계입니다. 이 기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단계입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단계/ 사역의 단계(일꾼의 단계)- 영혼을 살찌운 채 가만히 있으면 영적 비만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만하게 됩니다. 이제 성장의 단계를 넘어서서 사역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주님과 교회와 다른 이들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단계입니다.

  4단계/ 성품의 단계(인격의 단계)- 이 단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단계입니다. 목회자도 사역의 단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성품의 단계에까지 올라가야 참된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최종 목적은 이 성품의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단계입니다. 즉 성화(聖化)의 단계입니다.

  오늘은 신앙의 단계 세 번째 단계인 사역의 단계, 일꾼의 단계에 대해 나누고자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듭나고 어느 정도 성장하면 교회에서 각자의 일을 맡아 봉사하게 됩니다.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성숙의 상태에 관계없이 성장의 단계에 따른 알맞은 일을 맡아 담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기를 낳아 기를 때에도 그 아이의 성장 단계에 맞게 어떤 할 일을 주기도 하지 않습니까?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 ‘저기 휴지 좀 가져와라,’ ‘걸레 좀 가져와라’하며 할 만한 일을 시킵니다. 조금 더 크면 간단한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고 간단한 청소를 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자라면 집안일도 좀 돌보게 합니다. 옛날, 주로 종사를 짓던 시대에는 초등학생만 되어도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에 밭에 나가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학교에 다녀오면 밭에 나가서 그 나이에 알맞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성인이 되면 이제 두말 할 것도 없이 자기 몫의 일을 해야 하지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자기의 영적인 성숙도에 맞추어 누구든지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나와서 얼마 안 되어 할 일이 없으니까 신발장을 정리하는 것을 기쁨으로 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또 어떤 사람은 교회 주차장에서 주차관리를 자원하여 하는 사람도 있고요, 주방에서 봉사하는 분들도 계시구요. 자기의 영적 성숙도에 맞는 일은 교회 안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금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찬양팀원으로 섬기기도 하고, 교사로 봉사하기도 합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계시구요, 교회협의회 임원이 되어 섬기기도 합니다. 자신의 영적 성숙도에 따라 알맞은 일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수준에 맞게 할 일을 찾아 해야 하고, 교회에서도 모든 성도들에게 그 영적 수준에 맞는 일들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형태이든, 어떤 모습이든 교회 안에서 섬기는, 일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영적 성숙이라는 것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장해야 하지만 특별히 급격하게 성숙하는 때가 있는 것처럼, 봉사와 섬김도 보다 왕성하게, 본격적으로 교회의 중요한 사역을 특별히 감당해야 할 시기가 있습니다. 가벼운 일들뿐만 아니라, 약간의 시간을 내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많은 시간을 내어 섬겨야 할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일꾼이 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꾼의 자질이 되어진 단계가 일꾼의 단계, 사역의 단계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일꾼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일꾼이 부족하다며 난립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할 것 없이 일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탄식이 나옵니다. “희어져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아직도 말씀하십니다. “할 일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어찌할꼬?”

  교회 안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일하는 일꾼은 적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1. 교회가 할 일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망신을 당하기는 했습니다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책 제목을 바꾸어서 이렇게 한 번 패러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할 일은 많다.” 하나님은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사역을 위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역을 감당할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알고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본연의 사명보다는 별로 중요치 않은 일에 많은 물질과 시간을 드리는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당 건축하는 일에, 먹고 마시며 교제하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드립니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이 중요치 않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것도 분명히 해야 할 일임은 자명합니다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일을 잊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회를 향하여 봉사하는 일,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는 곳에서 선교하는 일에 돕는 일, 복음을 전도하는 일,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잊고 부차적인 일이 더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먼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할 일의 우선순위를 잘 정해서 그 일을 중요하게 먼저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일꾼이 필요한데 정작 일꾼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학교 교사가 없습니다. 찬양팀으로 섬길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행사나 일이 있어서 누가 그 일을 도울 것인가하고 사람을 찾으면 일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들의 현주소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일꾼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목사나 전도사, 집사들이 교회의 일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기관의 임원을 맡아야만 일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담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서비스를 받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일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을 잘 못하면 손가락질하며 비난합니다. 교회의 일부만 헌신된 일꾼으로 사역하고 나머지 성도들은 구경하고, 서비스를 받는 것으로 끝납니다. 구원 받고, 성경공부와 개인의 영적 생활을 통해 이제는 어느 정도 신앙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자란 그리스도인인데도 더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예배에만 참석하고, 무슨 세미나나 성경공부나, 훈련이 제공되면 그러한 것에 대해 선택하여 참석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교회 일에 깊이 들어가면 상처받는다며 늘 교회의 일꾼들이 서비스하는 것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열심히 헌신하여 섬기던 일꾼들이 나중에는 지쳐버립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교회 공동체는 사랑과 연합이 일어나기보다는 매우 삭막하고 건조한 관계들로 바꾸이어져 교회의 생동감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국제 터치사역을 통해 셀교회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랄프 네이버 박사는 교회의 성도 중에 10~15%만이 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주일에 예배 시간에 들어가 보면 10~15% 정도의 사람이 일하면 나머지 85~90%가 되는 성도들이 “쭈~욱”하며 빨아먹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있는 소수의 일꾼들이 금방 지치고 맙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쓴 이 편지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 교회들의 목회자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회람하도록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여러분, 제사장이란 직분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아론의 후손이어야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누구도 탐낼 수 없는 직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제사장”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아무나 하나님의 성소(聖所)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제사장, 그 중에서도 대제사장만 지성소(至聖所)에 나아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졌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의 지성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어 손수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돌아가신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히브리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역을 담당하던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仲保者)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仲保)하여 기도하고 백성들의 영적인 것들을 돌보는 일을 담당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은 사역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제사장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희들은 사역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목회자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역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목회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일꾼입니다. 이 일꾼의 단계에 이르는 사람은 교회 안의 몇 명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성장하는, 부흥하는 교회인가를 보면 얼마나 많은 그 교회 성도들이 일꾼으로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일꾼 중에도 헌신된 일꾼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헌신된 일꾼이 무엇입니까? 그 일에 사명감에 불타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드리는 일꾼입니다.

  지난 우리교회 창립 일 주년 기념일에 서울침례교회에서 뮤지컬 공연을 하고 갔습니다. 그 팀은 제가 예전에 서울침례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와 함께 사역했던 팀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저는 그들과 재미있게 사역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헌신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하고 피곤한데도 모여서 뮤지컬 연습을 합니다. 새벽 한, 두시까지 연습하고 집에 갔다가 다시 아침 일찍 출근합니다. 교회에서 나오는 보조비가 전혀 없습니다. 자기들의 돈으로 밥 사먹고 시간을 드려 연습합니다. 무대 의상이나 소품들을 자신의 돈을 드려 재료를 사고 직접 만들며 준비합니다.

  일 년에 한 번은 전도여행을 갑니다. 그런데 전도여행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자신들이 돈을 냅니다. 교통비, 배삯, 식사 문제, 준비되는 물품들을 자신들이 준비합니다. 내과의사 선생님이신 이현수 집사님은 일주일간 병원 문을 닫으면 몇 백만 원의 손해가 있습니다. 환자도 줄어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병원 문을 닫고 나섭니다. 지금은 의약분업이 되어 약을 마음대로 가지고 다니기 힘들지만 예전에 의약분업이 되지 않았을 때나, 지금도 의약 분업의 예외지역에 갈 때에는 약값까지도 본인이 부담하면서 가져갑니다. 물론 그분의 고백이 하나님께서 환자나 수입에 문제가 없도록 해주신다고 하시더군요.
왜 그렇게 합니까? 헌신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헌신된 일꾼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사역에 미친 자들이 필요합니다. 찬양팀에 미친, 교회학교에 미친, 자기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사명에 미친 헌신된 일꾼이 필요합니다.


2. 주님은 일꾼을 부르십니다.

  “희어져 추수할 것은 많은데…”라며 주님이 한탄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꾼이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사역을 하면서 일꾼이 풍족한 경험을 별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교회학교 교사가 항상 부족했습니다. 성가대원이 항상 부족했습니다.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 일을 도울 일꾼이 항상 부족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미 말씀드리 것처럼 오늘날 교회의 일꾼은 교회 전체 성도 수의 십분의 일도 안 될 것입니다.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도 일하는 사람은 백 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럼 나머지 수천 명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교회에 오십 명의 교인이 있다면 그중의 헌신된 일꾼은 다섯 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직임을 맡은 사람들은 있습니다. 집사도 많고, 찬양대원도 많고, 교사도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헌신된 일꾼은 적습니다. 몇 명은 헌신되었지만 나머지는 마지못해 감당하듯이 사역하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한탄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수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헌신된 일꾼은 없었습니다.

  저 역시 이러한 주님의 심정을 느낍니다.
  교회의 일은 목사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야 아직 작은 교회라서 그러한 일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예전에 어느 정도 안정된 교회, 큰 교회에서 사역할 때 보면 형광등이 교체할 때가 되어도 누구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당이 지저분하고 교회에 올라오는 계단이 지저분해져도 누구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창틀에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어도 누구하나 걸레를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 자신의 집에 문제가 생기거나 지저분해지면 금방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일에는 한 다리 건넌 남의 일처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여서 그런지 그런 것이 눈에 띄고 걸레를 가지고 가서 닦에 되더란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모두의 집입니다. 목사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교회입니다. 물론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청지기의식을 가지고 돌보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가장 외로울 때가 그때입니다. 혼자 일한다고 생각될 때, 교회 일에 아무도 관심 쏟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물론 교회마다 교회 일에 보이지 않게 신경 쓰는 분이 계심을 저는 압니다. 그분들께는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분들의 섬김을 하나님이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교회학교에, 찬양팀에, 각 기관에 혼신을 다 바쳐 일할 사람이 왜 일어나지 않을까요? 일대일 양육이나 교회의 시스템과 관련된 모든 사역에 왜 헌신하는 자들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추수할 때가 되었는데 일꾼은 적으니…”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십시오.


3. 누가 일꾼으로 나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교회 일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안타까워하기만 했지 정작 자기가 그러한 일에 헌신하여 자신을 드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해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아직도 일꾼을 부르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하고 부르시는 음성이 지금 우리에게 던져져 있습니다. 누가 이 부르심 앞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하겠습니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중에서 헌신된 일꾼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일꾼이 없으면 하나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특별히 헌신된 일꾼을 통하여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요나가 잠들어 있을 때에 요나를 깨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닌 선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정작 일해야 할 사람인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일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돌멩이를 통해서라도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제대로 일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일반 사회단체를 통해서라도 일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하지 아니하면 불신자를 들어서라도 하나님이 하시기를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인, 헌신된 일꾼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일꾼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누가 그 일을 담당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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