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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도원의 향기 (출 40:24-27, 딤전 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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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향기
(출 40:24-27, 딤전 4:6-8 )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안식 기간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쉴 수 있는 여유를 주신 당회원들과 성도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없는 동안 열심히 교회를 돌보아주신 교역자들과 위하여 기도해주신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집트의 수도원에 가기 전 웨일즈에 잠시 들렀습니다. 웨일즈에서도 저를 위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웨일즈의 재향군인의 한국전 종전 5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에 제가 잠시 감사의 인사말을 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한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말과 비핵화가 세계 평화에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어떤 분이 22살에 한국전에 참전하여 3개월을 주둔했다고 하면서 저를 보고 마치 한국 대사같이 연설을 했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웨일즈 장로교회의 총회에 참석한 일입니다. 거기서도 한국교회를 대신하여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웨일즈 장로교회가 참 좋은 교회였지만 지금은 쇠퇴하여 신학교에 학생이 없어 학교를 유대인에게 매각하였고 선교부 보고는 선교한 보고가 아니라 어느 교회가 문을 닫았고 교회 건물을 어떻게 할 것이라고 하는 보고였습니다.

셋째는 우리 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 목사님을 파송한 하노버교회에서 설교한 일입니다. 지금은 아주 작은 교회로 전락하였지만 토마스 목사님을 파송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저녁에 또 다른 장로교회에 가서 설교하였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수도원 생활을 꼭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정교회의 신학을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가 수도사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적 삶의 자세를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가 가 있던 수도원은 성 마카리우스 수도원이라는 이집트의 ‘와디 알 나트룬’이란 지역의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콥트 정교회의 가장 전통적인 수도원입니다. 이 수도원은 4세기에 마카리우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한 때 400명이 넘는 수도사가 있던 곳인데 지금은 120명이 있는 콥트 교회 최대의 수도원입니다. 콥크란 이집트의 예 이름으로 콥트 교회는 이집트 교회를 의미합니다. 콥트 교회는 동방교회인 정교회입니다. 정교회는 사도나 성자의 유골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선지자 엘리사와 세례 요한의 유골을 보관하고 있는 수도원입니다. 직접 유골이 있다는 굴을 보았지만 유골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 수도원은 엄격하게 제한된 지역입니다. 입구에는 큰 철문이 있어 외부인을 통제하고 있었고 들어가 생활할 수 있도록 허락 받은 것만 해도 행운이라고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13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건립된 고전적인 곳입니다. 책에서만 보던 수도사들의 삶을 함께 살아본 것은 참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카이로에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사막 한 가운데 이 수도원이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막밖에 없습니다. 사막에서 해가 뜨고 사막에서 해가 지는 곳입니다. 해만 뜨면 열기를 뿜어내는 더운 사막에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새벽녘이면 서늘한 바람이 잠시 불고 잠시 후 해가 뜨면 다시 뜨겁기 시작하는 곳입니다. 밤새 더운 열기가 식지 않는 작은 방에서 수도사들은 생활하고 있습니다. 수도원에서 개인의 은둔하는 방을 셀(cell)이라고 합니다. 제가 있던 방에서 밖을 내다보면 사막밖에 보이지 않은 작은 방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나고 있었습니다. 수도사들의 옷은 까맣고 땀에 젖은 옷이지만 향기가 배어 있었습니다. 영성 신학자인 에블린 언더힐은 “영성 생활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전인적 균형을 개발하는 삶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삶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균형 있는 삶이란 기도와 학습과 노동을 통한 영성의 균형을 의미합니다. 일상에서 하나님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은 수도사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수도사들의 삶을 통하여 수도원에서 끊임없는 향기가 풍기는 이유를 살펴봅니다.

첫째, 예수님이 계시는 방이기 때문입니다.
수도원 입구에는 좁은 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문이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입니다. 이 좁은 문은 두 사람이 서면 꽉 막힐만한 작은 문입니다. 그 작은 문안에서는 나름대로 풍성하고, 푸르고,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말 수도사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7:13-14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도 바로 이 길입니다. 넓은 편한 길이 아니라 좁고 불편한 길이 우리의 길입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좁고 험한 일입니다. 세상에 수 많은 것들 가운데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이 좁은 길입니다. 모든 수도사들은 좁은 문을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넓고 좋은 길을 포기하고 좁고 협착한 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부귀와 재물과 쾌락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묵상하며 살겠다고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수도사들의 거처는 두 평 남짓한 작은 방입니다. 수도원에서는 이 것을 셀(cell)이라고 부릅니다. 셀에는 딱딱한 침대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베게는 세상에서 가장 긴 베게입니다. 방에는 담요 한 장이 있습니다. 저는 담요를 덮을 마음이 생기지 않아 한번도 덮지 않았습니다. 왠지 아시겠지요? 그리고 방에는 빈 의자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셀의 전부입니다. 원래 셀은 땅을 파서 석굴 혹은 토굴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건물을 지어 작은 방을 많이 만들어 여러 사람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그들에게 큰방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필요가 없는 방입니다. 장식도 사치로운 방입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되는 작은 방입니다. 셀에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습니다. 지름이 40센티미터 정도 돼 보이는 작은 창입니다. 셀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유일한 사막을 향한 창입니다. 그 창을 내다보고 있으면 사막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수도원에 선지자 엘리사의 유골이 있다고 합니다. 엘리사의 유골은 이곳에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엘리사에게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위하여 지어준 작은 방입니다. 이 작은 방에는 침상과 책상과 의자 그리고 촛대가 있는 방이었습니다. 이 작은 방이 좁은 길로 들어간 사람들의 거처입니다. 오래 전에 베들레헴의 구유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입구가 얼마나 작은지 말을 탄 자는 말에서 내려야 들어갈 수 있고, 서서 가는 사람도 머리를 숙여야 드러갈 수 있는 작은 입구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실 작은 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큰방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는 온갖 방이 다 있습니다. 노래방도 있고 최근에는 찜질방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한 작은 방조차도 없는 마음들입니다. 조급함과 분주함으로 꽉 차 있는 방들입니다. 예수님을 모실 이 방이 있으면 여러분의 마음도 가정도 수도원입니다. 예수님을 모실 마음의 방이 있으면 그 마음은 이미 수도사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기억나는 두 방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국 버밍햄에서 우드부룩이라는 퀘이커 교도들의 스터디 센터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그 곳은 오래 전에 간디가 묵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간디가 묵었던 방에 저도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그 방에는 간디의 그림이 있고 간디의 기념 방이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이 방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방에는 침대가 둘이 있습니다. 간디가 어느 침대에 잤을까 생각하다가 궁리 끝에 침대 둘을 붙여놓고 가로로 누워잤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관리인에게 “간디가 묵었을 때 어느 침대에 잤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관리인은 “간디는 침대에서 자지 않았습니다. 바닥에서 잤습니다” 그랬답니다. 그리고 기억할 만한 또 한 방은 수도원의 작은 방입니다. 우드부룩의 그 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저는 옹색하고 종일 더운 열기를 뿜어내는 수도원의 그 작은 방을 사랑합니다.

둘째, 그 곳은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두 수도사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다가가서 그들에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얘기하는 도중에 저는 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수도사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훈련과정은 어떻게 됩니까?” 그 중에 나이가 많은 수도사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실제 수도사의 자격은 엄격합니다. 우선 남자이어야 하고, 미혼이어야 하고, 대학을 졸업해야 하고, 병역을 마쳐야 한답니다. 그래서 모든 수도사들이 고학력자들이고 영어도 아주 잘 하는 편이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흉악범들이 수도원에 들어와서 숨어지내면서 수도사가 되어 수도사의 질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 후로 스스로 질을 높이려고 대학 졸업자들이 수도사가 되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나 깊이 얘기했던 수도사들 중에도 의사 출신, 변호사 출신, 약사 출신, 교수 출신 등이 있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렸기 때문에 이런 자격이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자격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들이 이 곳에 모여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사랑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녹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만드신 유일한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주신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신 유일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 이 말씀은 루터의 말대로 ‘작은 복음’입니다. 성경 전체의 요약입니다.

요즘 많이 불려지는 복음성가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하나님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순교자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조롱하는 소리도 이깁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세상의 유혹도 이깁니다.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가 됩니다. 수도사들은 이 사랑 때문에 결혼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정결한 신부로 삽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 믿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배하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세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4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강권하시는 그 사랑에 붙잡혀 수도원에서 평생을 보내며 그 사랑을 맛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합니까? 세상의 어떤 것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려고 합니까? 무엇으로 우리가 날마나 만족하려고 합니까? 먹는 것입니까? 마시는 것입니까? 재미있는 놀이입니까? 채팅입니까? 사람과의 만남입니까? 여러분, 재물을 소유하십시오. 소유하되 될 수 있으면 많이 하십시오. 그러나 재물을 사랑하지는 마십시오. 재물이 여러분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권력과 지위도 가지십시오. 그러나 권력과 지위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도구가 아니라 섬기는 도구가 되게 하십시오. 명예를 추구하지는 마십시오. 단지 주어지면 봉사하는 자리가 되게 하십시오. 우리에게 예수님보다 더 나를 사랑할 분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길을 늘 함께 갈 수 있는 동반자가 누구입니까? 남편과 아내입니까?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가 평생을 함께 산다고 해도 죽음에까지 동행하지는 못합니다. 우리 주님은 죽음에까지 동행하시는 영원한 신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베푸는 자리가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수도원이 되게 하십시오.칼를로 카레토라는 사막의 수도사는 말했습니다. “그대가 만일 사막에 갈 수 없다면 그대의 생활 가운데 사막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가정의 수도사, 직장의 수도사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자리를 고요히 하나님을 만나는 사막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 고독과 자기 부정의 자리였습니다.
수도원에서 첫날 밤이었습니다. 사막으로 해가 집니다. 수도사들이 각자 자기 셀로 들어갑니다. 전기불이 하나씩 꺼지고 갑자기 고독이 밀려옵니다. 얼마나 외롭고 두려운지 심리적 공황마저 느꼈습니다.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깜깜한 밤은 처음 보았습니다. 수도사들이 사막을 찾는 이유는 고독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기에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막의 고독은 거룩한 고독입니다. 거룩한 고독을 느낄 때에 사람은 가장 성숙해집니다. 적막감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두려움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해질 무렵 사막은 가장 고독한 장소입니다. 사막에서 해질 무렵은 가장 고독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수도사들은 사막을 걷고 있었습니다. 저녁 시간에 수도사들은 사막을 걷습니다. 짝을 지어 걷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혼자입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홀로 어디론가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들은 사막을 걸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모세가 홀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며 이 고독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 때 모세는 비로소 성숙해졌습니다. 이 성숙한 경험으로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광야로 나오게 했습니다. 야곱의 경험이 그렇습니다. 홀로 광야를 지날 때에 지치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형님을 속인 죄책감으로 원망과 후회도 컸을 것입니다. 마음에 교차하는 온갖 감정으로 외로워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나타나시고 함께 할 것이라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도 야곱의 그 하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밤새 뜨거운 열기에 잠을 잘 수 없고 두려움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저는 반복해서 야곱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하였습니다. 고독은 하나님과 만나고, 자신의 내면과 비로소 만나는 방입니다.

창세기 15:12에는 “해질 때에 아브라함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도 어두워졌을 때에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어두어지면 누구나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창세기 15:5에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합니다. 순서는 좀 바뀌었지만 두려워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하늘을 쳐다보게 하셨습니다. 저도 땅을 쳐다보니 무서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수없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니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무서움 보다 신비함이 더 큰 것이 하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땅은 두려움과 걱정과 무서움을 줍니다. 하늘은 희망과 신비와 용기를 줍니다. 여러분이 두려움이 있을 때에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땅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땅을 쳐다보면 세상 걱정과 근심이 엄습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나라의 소망이 가득 차게 됩니다. 이 수도원에는 세례 요한의 유골이 있는 곳입니다. 세례요한은 철저한 자기 부정으로 일관한 인물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오실 메시야를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오실 메시야라고 여겼습니다. 그에게 와서 “오실 메시야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나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조금만 말을 아리쏭하게 하면 자신이 많은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부정으로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자기부정도 어렵지만 자기부정을 고백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자기 부정은 세례요한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정은 수도사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정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따르는 조건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진 사람들은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 부인을 버림이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다 버렸습니다. 이 때 모든 것을 다 얻습니다. 버리는 사람은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포기한 사람은 채워집니다. 수도사들은 끊임없는 영혼의 채찍을 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죽이고 사는 삶을 삽니다. 제가 만나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웠던 한 수도사는 의사 출신이었습니다. 좋은 자기의 직업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매일 버리고, 순간순간 부정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그들은 영속적 회심(perpetual convers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에게도 자기를 버리고 매일 회심하며 거듭남을 삶을 사는 자기 부정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론
수도원의 뜰에는 수백년된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아침이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로 시끄러울 정도입니다. 황량한 사막이지만 나무가 있으면 새가 삽니다. 생명이 있으면 다른 생명을 살게 합니다. 사막을 향한 창으로 쉴새 없이 바람이 들어옵니다. 사막에는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사막을 살게 합니다. 이것이 사막의 생명입니다. 바람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바람 루아흐는 우리 생명의 근거입니다. 그 바람이 없으면 사막은 정말 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사막으로 변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삭막한 사막 같이 변합니다. 생명이 있으면 다른 생명을 살립니다. 아무리 황량하고 적막해도 사막은 살아있습니다. 그 속에는 바람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사막 같은 세상에 우리가 삽니다. 그러나 사막도 하나님의 숨결이 있고 사막은 살아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바람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막같은 세상도 움직이고 살게 하십니다. 그 바람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있으면 세상은 삽니다. 사막 한가운데의 수도원에도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살 듯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으로 살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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