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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나무의 역사를 극복하라 / 삿 9: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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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의 역사를 극복하라
사사기 9:7-15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가 전 프랑스는 독일의 공격에 대비한 항구적인 방어진지를 구축했습니다. 그 방어선은 당시 프랑스 육군장관이던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을 따서 마지노선이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는 이 요새를 만들기위해 1927년부터 10년간 공을 드렸고 1차 세계대전 때의 경험을 살려 지세도 충분히 활용했습니다. 전차의 침입을 막기 위한 이중 철공벽, 보병을 막기 위한 철조망 지대, 직경6m의 콘크리트벽 등을 설치했습니다. 발전실, 탄약고, 작전실, 통신선등도 지하 깊숙히 설치하여 당시로선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마지노선은 아무소용이 없었습니다. 1940년 5월 독일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로 우회해서 침공, 마지노선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꼭 지켜야 할 한계와 물러서거나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마지노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마지노선이 무너지면 그리스도인의 특성과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지켜야 할 마지노선을 쉽게 무너뜨리고 살아가고 있음을 봅니다. 가서는 안될 곳을 가고, 먹어서는 안될 것을 먹고, 해서는 안될 것을 행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할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 "세상에서 소금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책임져야 할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치 있고 귀한 것입니다. 이 가치는 그리스도인 으로서의 마지노선을 지켜나가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지켜야 할 마지노선을 지키는 데서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사람들의 마음을 향기롭게 하는 것이고 주위에 기쁨, 평강,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움 자체입니다.

300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민족을 해방시킨 당대의 영웅 기드온에게 아비멜렉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성을 배경으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야욕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그가 지켜야 할 한계를 깨뜨리고, 그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기드온이 죽은 후, 그의 외가의 종족인 세겜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자금을 동원하고 불량배들을 고용하여 그의 형제 70인을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형제들을 학살할 때에 숨어 살아남은 막내아들인 요담은, 풍자적인 가시나무의 이야기를 가지고 아비멜렉의 죄악과 세겜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을 꾸짖었습니다. 이 요담의 풍자적인 우화는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영적 깨달음의 듣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먼저 요담의 우화 가운데 가시나무를 보아야 합니다.
나무들은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를 찾아가서 그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나무들이 왕이 되기를 극구 사양하자 가시나무를 찾아가서 왕이 되어달라고 했습니다. 가시나무는 나무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왕이 되었습니다.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 위에 군림하려는 나무입니다. 또한 다른 나무에게 해를 끼치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내 그늘에 피하라고 합니다. 가시나무는 그늘이 될 수 없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의 그늘에 피하다보면 가시나무의 가시에 찔릴 뿐입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은 인격이 부족하고 성품에 문제가 있음에도 자신의 부족함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훌륭하지 못한 자신을 훌륭하다고 자랑하고 뽐내는 사람입니다. 부족함에도 가시나무는 교만해서 자기 휘하에 사람들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끌어 모으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인격과 성품 때문에 사람들에게 가시가 되어 아픔만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가시나무는 스스로 말하기를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시나무는 불을 내는 나무이고 그 기운이 강한 나무입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은 자신의 주장대로 되지 않으면 불과 같은 분노를 발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을 태워버릴 듯 미워하고 증오하며 술수를 가리지 않고 모함하고 해하는 사람입니다.

아비멜렉이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아비멜렉의 형제들 중에는 감람나무나 무화과 나무, 그리고 포도나무와 같이 훌륭한 성품과 인격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그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들 때문에 왕이 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기 외조부 종족인 세겜 사람들에게 지역감정을 부추켜서 적대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자금을 동원했습니다. 그 자금으로 불량배를 동원했습니다. 그것으로 그와 혈육을 나눈 형제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됨으로 사회는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지역간 갈등이 불거졌고, 사회의 질서와 공의가 사라졌습니다. 반란이 일어났고 학살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따라 성 위에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죽고 마는 비참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정치 사회현실이 가시나무들의 역사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각 단체 모임에 가시나무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신성한 교회 안에도 가시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단코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가시나무의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군림하는 자가 아닙니다. 부족하면서도 부족하지 않은 자처럼 자랑하고 자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교만하여 남을 지배하려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시에 찔리는 아픔을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절대로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가시나무의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가시나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느 곳에서나 가시나무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시나무의 역사는 우리가 결사적으로 막아야 할 마지노선입니다.

또한, 요담의 우화는 가시나무를 왕으로 세운 나무들의 어리석음을 보게 합니다.
나무들은 가시나무를 찾아가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시나무를 찾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마땅히 왕이 될 자를 왕으로 뽑지 못하고 교만하여 군림하려는 가시나무를 왕으로 뽑은 것입니다. 가시나무의 잘못된 인격을 칭찬해서도 아니 됩니다. 가시나무의 성품을 찬양해서도 아니 됩니다. 왕이 될 수 없는 나무에게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함으로 가시나무가 지배하는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분별력 없는 존경이나 추종은 그리스도인이 해서는 아니 될 행동입니다. 감정과 이해관계에 의해서 행동화해서도 아니 됩니다. 그렇게 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기 쉽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시나무보다도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게 한 나무들의 잘못이 더 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정당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반드시 정당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흔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편들어주는 것입니다. 줄대기, 뒤봐주기입니다. 이런 것들은 마귀적입니다. 혈연이나 지연과 학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관점입니다. 곧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고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라고 하는 나무들은 그 가시나무에게서 나오는 분노의 불에 타버렸습니다. 왕이 될 수 없는 자에게 왕이 되라고 하는 것과 같은 분별력 없는 존경과 추종은 우리들을 망하게 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은 추종이나 어리석은 분별력 없이 존경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요담의 우화 중에서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봅니다.
나무들의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에 감람나무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요동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왕이 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기름을 내는 일과 열매를 내는 일, 그리고 포도주를 내는 일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 일을 경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맡고 있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왕의 자리를 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이 세상에서의 역할을 깨닫고, 그 책임과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한 농부가 덩치 큰 당나귀 한 마리와 조그맣고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짐승의 생활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당나귀는 낮이면 산에 가서 나무를 져오고 밤이면 방앗간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강아지는 하루 종일 놀기만 하고 잠잘 때에도 주인 침대 옆에서 비비적거렸습니다. 당나귀는 불평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뼈가 부서져라 일만 하는데 강아지는 빈둥빈둥 놀면서도 주인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어쩌면 나도 강아지처럼 재롱을 부리면 주인의 귀여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 그리고는 마구간에서 뛰어올라 냉큼 마루 위에 올라가더니 재롱을 떤답시고 요란스럽게 굴었습니다. 온 마루를 휘 젖고 다니며 강아지처럼 한답시고 주인의 밥상 앞에서 꼬리를 휘휘 저으며 돌아다니다가 그만 밥상을 뒤집어 놓고 말았습니다. 농부는 하도 어이없어서 입을 벌린 채 넋 나간 듯이 바라다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보다 못한 농부는 몽둥이를 들고 와 당나귀를 두들겨 쫓아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나귀의 위대성은 당나귀의 본분입니다. 당나귀의 본분은 강아지의 재롱에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입니다. 당나귀의 수고는 주인을 기쁘게 하는 당나귀의 가치입니다. 그럼에도 당나귀는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자 강아지의 흉내를 내다가 당나귀의 귀한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망각한 사람들이 군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영광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시나무의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배하려고 가시로 아프게 하고 불을 쏟아내어 태워 버리는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삶은 어떻습니까? 가시나무와 같이 아픔을 만드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군림하기 위하여 가시로 찌르고 분노의 불을 쏟아내어 태워버리는 역사를 만들지 마십시오. 가시나무의 역사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진노의 대상일 뿐입니다. 가시나무를 추켜세우는 가시나무의 역사를 조성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 명문대학교 출신으로서 박사학위를 가진 매우 똑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자신을 자랑하고 교회 안에서 군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에 대하여 늘 시비를 걸었습니다. "우리 목사의 설교는 교리에 맞지 않아. 어법이 엉망이야 또 헌금을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도무지 은혜를 받을 수 없어." 어느 날 목사님은 그 집사님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집사님, 나는 집사님보다 공부를 많이 못했어요. 어법이나 맞춤법이 틀리는 일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내가 아는 지식을 모두 동원해서 하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은 그 많은 지식과 박사학위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가시나무의 인생을 사는 우리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타버릴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가시나무인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어 주셨기에 우리는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의 인생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시나무의 삶의 습성을 깨끗이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가시나무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마지노선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와 같이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치료하는 기름과 사랑과 평화의 향기로운 기름을 만드는 감람나무의 삶을 사십시오. 풍성한 삶의 열매를 나누어주는 무화과나무처럼 되십시오. 사람들의 삶에 기쁨과 흥취의 즐거움을 주는 포도주를 내는 포도나무처럼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세상을 즐겁게 만드는 인생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로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지켜야 할 마지노선을 지킵시다. 가시나무의 역사를 극복하여 가정과 이웃과 세상 속에서 가장 필요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나누어주는 축복자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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