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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사의 완벽한 충성 (삼하 2:12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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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의 완벽한 충성
사무엘하 2:12 - 23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완벽(完璧)이란 말의 고사는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국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화씨지벽(和氏之璧) 이라는 천하명옥(天下名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화씨지벽이 탐이 나서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15개의 성(城)과 화씨지벽을 바꾸자고 제의 해왔습니다.

조나라 혜문왕은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제의를 거절하면 강성한 진나라 소양왕이 쳐들어 올 것이고 그렇다고 그냥 줄 수도 없는 입장이라서 혜문왕은 충신들과 의논한 끝에 강자의 비위를 거스릴 수 없다고 하여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지혜와 담력이 뛰어난 인상여(藺相如)라는 자를 발탁하여 이 일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인상여가 가지고 온 화씨지벽을 받아든 소양왕은 구슬을 보고 감탄만 할뿐 준다고 약속한 15개성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때 인상여가 소양왕에게 말하기를 그 구슬에 왕께 보이지 아니하는 흠집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자 소양왕은 무심코 다시 그 구슬을 인상여에게 건네주었는데 이때 인상여는 소양왕을 노려보면서 만약 15개의 성을 주시지 않겠다면 자신의 머리와 함께 구슬을 이 기둥에 부딪쳐 박살을 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소양왕은 화씨지벽이 깨질까 두려워 일단 인상여를 숙소로 돌려보냈습니다. 인상여는 자기부하를 시켜 구슬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소양왕은 대국의 체면 때문에 인상여를 방면하고 말았습니다. 조나라 혜문왕은 화씨지벽이 완전한 구슬로 되돌아왔다고 해서 그 공로로 인상여를 상대부(上大夫)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세상에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소임을 다하여 일을 잘 마무리 지었을 때를 가리켜 완전할 완(完)자와 구슬 벽(璧)자를 써서 완전한 구슬이란 뜻의 완벽(完璧)이란 말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유대 지파만의 왕으로 등극한 후에 유대 지파 외에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 간에 분쟁이 발생했습니다(삼하 2:1-7).

그것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유다를 제외한 이스라엘 온 지파의 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입니다(삼하2:8-9). 이쯤 되고보니 이스보셋에게 속해있는 아브넬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사와 다윗왕에게 속해있는 요압이 이끄는 유다 군사간에 전투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삼하2:12-17). 이 전투에서 유다의 가장 큰 손실은 요압의 친동생이자 다윗왕의 조카가 되는 아사헬의 죽음이었습니다(삼하2:18-23). 그는 들노루같이 발이 빠른 장군이었으며 다윗의 30인 용사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이스보셋을 보좌하는 백전노장 아브넬을 추격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Ⅰ. 아사헬은 다윗의 충성된 용사였습니다.

사무엘하 2장 18절에 『그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같이 빠르더라』고 했습니다.

보편적인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그 계대(係代)를 나타내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윗의 누이가 되는 스루야의 이름으로 기록하게된 것은 세가지 이유로 추측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스루야가 뛰어난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스루야가 일찌기 남편을 사별(死別)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다윗과 이들 삼 형제의 친분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사헬』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만드심'이란 뜻입니다. 그는 요압과 아비새의 동생으로 다윗의 삼십 용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무엘하 23장 24절에 『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삼십인 중에 하나요…』라고 했습니다.

역대상 27장 7절에 『사월 네째 장관은 요압의 아우 아사헬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발이 빠르기로 유명한 장군입니다.
그의 발이 들노루 같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신속히 움직일 수 있는 기구가, 길들여진 짐승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발이 빠르다는 것은 전쟁에서 유리한 재공권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입니다.
결국 그는 빠른 발을 이용하여 당시 다윗왕의 정적 이스보셋의 휘하에 있던 용장 아브넬을 단신으로 추격하다가 장렬히 전사했습니다(삼하2:19, 21).

Ⅱ. 아사헬은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여기 이데올로기(Ideology)의 사전적인 의미는 인간행동의 기본이 되는 근본적인 사고(思考) 혹은 관념형태(觀念形態)를 말하는 것으로 이 말은 사상이나 학문분야뿐만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인문학등 다양한 곳에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면 개인의 자유나 가족의 유대가 위축되거나 파괴되는 것 인류 역사가 자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사헬을 지배하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무엇입니까?
1) 그가 가진 하나님의 계시적 언약입니다.
사무엘상 13장 14절에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왕권의 취소가 아니라 사울 왕권이 당대에서 끝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울이 죽기 전에 왕권이 취소될 것이라는 사실도 밝힌 바 있습니다(삼상15:26,28). 여기 『마음에 맞는 왕』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열방과 같은 왕(삼상8:5)' 과는 극명하게 대조가 되는 말입니다.
여기 본문에 『구하여』라는 말은 '간절한 마음으로 찾는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중에는 이미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로 작정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사울이 죽을 때 다윗의 나이가 23세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때는 다윗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거나 갓난 아이였을 것입니다. .
사무엘상 16장 1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폐위(廢位)를 확정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12-13절에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학자들이 이때 다윗의 나이를 15-20세 가량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가 10-15년 동안 예비 왕으로서의 훈련을 받은 후에 30세에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아사헬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오직 다윗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아사헬을 지배하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계시적 언약이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 에서 얻어지는 체험적인 지식입니다.

(1) 그 지식은 다윗의 믿음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했습니다.

(2) 그 지식은 다윗의 신앙인격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4장 11절에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찌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때는 악신에 들린 사울이 군대를 몰아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6장 9절에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건너편 산에 올라가서 왕을 호위하지 못한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책망하기까지 헸습니다(삼상 26:13-16).

다윗은 사울이 길보아에서 블레셋과의 전투로 인해 그의 아들 요나단과 함께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弔喪)하고 조가(弔歌)를 지어 유다족속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활 노래로 칭하여져서 야살의 책에 기록된 것입니다(삼하1:17-27).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얻어진 체험은 곧 우리의 진리지식이 된 것입니다.

(3) 그 지식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된 사실에서 얻어진 것입니다.
사무엘하 2장 1절에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 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하 2장 4절에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족속의 왕을 삼았더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평생에 세 번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약 15년 전에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받았습니다(삼상 16:13).
두번째는 유다 장로들로부터 받았습니다(삼하2:4).
세번째는 7년 6개월 후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 받았습니다(삼하5:3).
첫번째 기름부을 때 이미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에 의해 유다 왕이 되었을 때 두 번째 기름부음을 받았고 세번째 기름부음은

첫번째의 연장이라고 봐야 합니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첫 번째 기름부음이 현실화 되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삼상15:29).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신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고 만다는 것이 아사헬에게 체험적인 진리 지식이 된 것입니다.
아사헬은 다윗이 세 번째의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죽었으나 일련의 이러한 사건들이 그를 지배하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Ⅲ. 아사헬을 지배하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 로기는 완벽한 충성을 가져왔습니다.

다윗의 유다와 이스보셋의 이스라엘 사이에 싸움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다윗의 유다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왕으로 삼은 반면에 이스보셋의 이스라엘은 아브넬을 중심한 하나님에 대한 반란의 무리가 세운 나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브넬과 요압에 의해 양 진영에서 12명씩 선발된 24명의 병사들이 치열한 전쟁 끝에 피차 치명상을 입고 죽게되자 흥분한 양 진영은 전면전으로 돌입하는 양상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군대도 이 기브온 전투에 20명의 전사자가 나왔다는 것을 감안할 때(삼하2:30) 의로운 전쟁이라고 해서 피해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발이 빠른 아사헬이 쫓기는 아브넬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충성입니다.
본문 2장 19절에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사헬은 아브넬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에게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우회적으로 충고했습니다. 그 내용이 본문 2장 21절과 22절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너는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다른 사람을 잡아서 공을 세우라는 것과 전리품이나 챙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아브넬의 조롱섞인 충고였습니다. 더 나아가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이기를 꺼려했던 이유는 그 형 요압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일찌기 사울 밑에서 지낸 동료이기 때문에 아브넬은 요압의 무용됨과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아사헬을 죽일 경우 요압의 원한이 사실 두려웠습니다. 결국 그는 요압에 의해 죽게 되지만 사실 아브넬은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 하는 기회주의자가 분명합니다(삼하3:17-19)

2) 자신에 대하여 향후를 생각하지 아니하는 충성입니다.
본문 2장 21절에 『…아사헬이 치우치기를 원치 않고 그 뒤를 쫓으매』라고 했습니다.
본문 2장 23절에도 『저가 치우치기를 싫어하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사헬은 자신이 아브넬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왜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다윗의 장수로서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아브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추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3) 죽음을 감수하는 충성입니다.
본문 2장 23절에 『저가 치우치기를 싫어하매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라고 했습니다.
아브넬은 창 뒷부분으로 아사헬을 쓰러 뜨렸습니다(삼하2:23).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아브넬은 사실 아사헬을 죽일 의사가 없었으나 아사헬이 빨리 달렸기 때문에 그 가속에 의해서 찔려죽었습니다.

Ⅳ. 아사헬의 죽음은 오고 오는 세대에 실 물교훈이 되었습니다.

본문 2장 23절에 『…아사헬의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고 했습니다.
아사헬의 죽음은 다윗의 군사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군사들은 더 이상 아브넬을 추격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 요압과 아비새는 계속해서 이스보셋의 군사들을 추격했습니다. 아마 자기 동생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여기 『머물러 섰더라』는 말은 '그리고 그들이 멈추어 섰다( 와야 아므두)'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아사헬이 아브넬을 추격하다가 창에 찔려 피를 쏟고 장렬히 전사한 그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다고 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자마다 만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충성된 용장 아사헬이 엎드러져 죽은 자리에 머물러 섰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아사헬의 죽음에 대하여 저마다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① 어떤 이들은 그의 급한 성격이 그를 죽게 했다고 합니다. ② 어떤 이들은 그가 전공을 세울 목적으로 과도한 공명심 때문에 죽었다고 합니다. ③ 어떤 이들은 빠른 발로 인하여 교만한 결과 그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④ 어떤 이들은 도망하는 아브넬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서둘렀기 때문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사실이라고 해도 아사헬의 충성심에 흠집을 낼 수 없습니다. 충성은 그 자체로서 고귀한 것입니다. 충성은 결과를 보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모험적이지 아니한 충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충성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마6:24; 눅16:13). 아사헬을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의 계시적 언약입니다.

아사헬은 강력하게 자기를 지배하는 그 지배 이데올로기 앞에 자기 목숨을 던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지배하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바로 신구약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이 이 땅에서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우리의 체험적인 진리 지식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강력하게 지배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성경을 빈틈없이 지배하게 됩니다. 성경을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우리되게 하시고 거룩한 교회를 이 땅에 세우도록 하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를 남김과 같이 진리 운동을 위하여 이 땅에 고려파를 탄생시킨 역사적인 사실을 하나님의 섭리로 믿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엄격한 이데올로기입니다. 성령은 이 시간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사명을 절대 이데올로기화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의 절대 지배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37-39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나와 여러분의 충성의 종지부에 그것을 보는 이들과 나의 후손들이 그곳에 머물러 산 교훈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충성이 끝나는 나의 사역지마다, 충성이 다한 나의 손길 하나 하나에, 나의 후손들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완벽한 충성 앞에 기왕이면 침을 뱉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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