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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백성의 역사관 /엡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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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 백성의 역사관
본문 : 에베소서 1:3~14

  토인비 박사는 역사에 대한 모든 인간들의 태도 가짐을 세 가지로 구분
한 바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떴다는 그런 예화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는 동안의 배 안 사람들의 관심사가 세 가
지로 구분되어 나타난다고, 그것이 인간들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
들은 배 안에서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가장 마음을 둔다는 것입니다. 오
늘 아침은 메뉴가 무엇이고 저녁은 또 무엇인가 오늘 스케줄에 무슨 재미있
는 레크리에이션이 준비되었는가? '재미있는 일이 준비되어 있고 먹을 것
만 풍부하면 아무 걱정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인생이다.' 이렇게 목적을 가
지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일도 하지만 그런 데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고 배가 지나가는 주변에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의 변화가 가
장 즐거운 일이라고 해서 날씨가 좋고 좋은 경치를 만나면 대단히 좋아하
고, 날씨가 굳고 비가 오고 볼 것이 없으면 살맛이 안나는 표정과 기분을
갖는 그런 가치관을 발견하게 된다고 그랬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다른
것도 성실하게 잘 하지만 먹고 마시고 노는 문제도, 주변의 경치도 즐거워
하지만 가장 큰 관심은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마지막 우리가 정착
할 항구는 어디인가를 관심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
은 그 길을 놓치지 말고 이 배가 잘 가주기를 바라고 되는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열심히 도와서 배가 갈 곳을 가도록 노력합니다. 어쩌다 풍랑을 만
나면 이 배가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아니할까 염려하고 제대로 가도록 필요
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 또 그 배 안에 있다
고 합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평가를 했습니다. "첫째의
사람들은 낙천주의입니다. 배가 어디로 가는 것은 따져서 뭘 하느냐? 갈 데
로 가겠지, 가는 동안 먹을 것만 많고 놀 것 있으면 인간의 목적이 달성되
었는데 그 이상 어디간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느냐? 그런 것을 뭘
관심 하느냐?  두 번째 사람들은 정신적 양식을 좀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들은 역사의식이 분명한 사람들입니
다." 이렇게 토인비 박사가 구분을 했습니다.

  어떤 것이 훌륭한 것인가? 사실대로 말하면 인간의 이 고난은 가치관을
따지고 역사 의식을 갖는 때부터 찾아왔습니다. 가치관이 필요 없고 역사의
식이 필요 없는 세상을 우리 인간은 최초에 잠시동안 에덴 동산에서 살았습
니다. 에덴 동산의 인간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들이 가치관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가치관이 아무 필요가 없고, 그 사람들은 옷도 안 입
고 벌거벗고 살아도 부끄럽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으니까, 가치관이 없었단
말입니다. 동물도 옷을 안입고 사는데 인간들이 거추장스럽게 그렇게 많은
옷을 만들어 입어야 사는가? 가치관이 필요가 없습니다. 먹을 것이 많았고
즐거운 일만이 가득했습니다. 그것만 그냥 누리면 됩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철학적이고 역사관이고 하는 것이 하나도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날 그들
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의 금단의 열매를 범하는 순간부터 잠이 들었습
니다. 그리고 깨어나보니 자신이 노출된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운 것으로 느
껴졌고, 나뭇잎을 엮어서 가리워야 하는 새로운 가치관 하나를 발견해서 실
천하게 됩니다. 그리고 석양이 지는 에덴에서 쫓겨납니다. 아담은 별안간
초라해 보이기 시작한 하와의 손을 잡고 서글픈 눈물을 흘리면서 인간 역사
의 고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후 인간은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왜 살아야 하는
가?",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라고 하는 괴로운 역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인간은 끝없이 옳고 그른 가치를 따져야 살아
갈 수가 있고, 해야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에 대한 심판을 항상 받으
면서 일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을 했습니다. 간혹 우리 사회에
젊은이들이 반문화적이고 반윤리적인 행동을 합니다. 의상 문화도 단정하
게 넥타이 메고 빈틈없이 하는 그런 것에 아주 반문화적인, 훌렁훌렁 다 벗
어버리고 옷도 일부러 찢어 가지고 살이 허옇게 들여다보이게, 현재 가고
있는 길에 정 반항적인 모습을 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것
을 뒤엎어버리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60년대 한때 서구사회는 아주 길거리
에서 옷을 홀라당 다 벗어버리고 뛰어가는 스트리킹(streaking)이라고 하
는 것이 유행을 했습니다. 지금도 서구의 아주 유명한 대학이라고 하는 곳
을 가보면 유유히 그런 청년들이 운동장을 지나가는 것을 간혹 볼 수가 있
게 됩니다. 아마 이런 것들은 그 개인의 교육 수준이나 수양 부족에 먼저
초점을 맞출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의 역사관에서 해석
을 하면 인간 세상이 너무 괴롭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신앙 생활을 하
는 사람들도 어떤 때는 괴로운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는 전통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은 금주, 금연한다." 그런 것을 아주 굉장
한 성서적 율법으로 그렇게 정해서 실천해 내려왔기 때문에 어쩌다가 담배
한 대만 피워도 죄의식을 선언하게 됩니다. 술 한잔 먹으면 지옥 가는 것
같이 규정을 해버립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도시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
수록 인간은 소극적이 되어 버립니다. 지나가다가 종이 한 장만 버려도 경
찰에게 붙들려 가서 벌금을 내야 하는 사회! 학생들은 시험 점수를 철저하
게 받아 내야 합니다. 세금도 꼬박꼬박 내야합니다. 거리를 다녀도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차 한번 잘못 세우는 벌을 벌금으로 받아내야 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아니하면 이 사회에서 살수가 없는 문명이 발달하면 발
달할수록 인간은 점점 더 소심하여 지고 복잡해지고 쩨쩨해지는 그런 모습
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반문화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다 훨
훨 더 벗어버리고 싶어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일인가? 이렇
게 복잡한 가치관, 윤리관 역사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이런 모든 것을 초
월하여 전 인류의 차원에서 진실과 교섭할 수 있는 길이 없는가? 오늘 성경
말씀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
의 역사관을 설명할 때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을 이끌고 어디
로 가느냐?" 역사의 원 지점을 향해서 오늘 말씀이 우리를 끌고 갑니다. 이
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
사" 이런 역사 의식을 발표합니다. "우리들이 누구냐?" 우리는 인간 사회
의 이렇게 복잡한 역사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여 괴로운 인간 역사
속에 들어오기 그 이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정의해 주고 있습니
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괴로운 인간 역사 안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원 지
점은 인간 역사 이전 사람들이라고, 창세 전에 우리가 있었다고 이런 역사
를 발표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바로 그 기쁨을 가질 수 있
을 때, 오늘 말씀 가운데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
한 복음 8장에 예수님이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
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그렇게 질문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
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예수님
은 분명히 인간의 괴로운 역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칼 발트의 말대로
Inbreaking 했다! 즉, "역사 밖에 계신 분이 인간 역사를 부수고 들어오신
분이시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의 주제가 언제
나 자신의 원 지점이 이 세상이 아니고 역사 이전의 세계에 있음을 설교를
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앞으로는 내 아버지 집으로 갈 것이
다." 자신의 위치를 인간 역사 이전의 자신임을 항상 밝혀 주셨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역사관이란 무엇인가? 초월적 역사와의 교섭이 이루어질
때 우리 자신의 위치를 그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핍박을 견디지 못한 신자들이 유대 영토를 벗어나서
소아시대 일대로 디아스포라 되었습니다.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외국 땅에
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겪으면서 살아가는데 베드로는 그들을 바라
볼 때 어떻게 보입니까? 초월적 역사관으로 보고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
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
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자
들에게 편지하노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
룩한 나라요 그에 소유된 백성이니라. 이 괴로운 역사 이전에 초월적 세계
에 살도록 계획된 하나님 나라에 소유된 백성이 누구냐? 너희다." 이러한
역사관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살 것을 베드로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
기 때문에 지금 나의 현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늘 9절 말씀에 이렇게
정의를 해줍니다. "때가 찬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즉 구원의 완성이 성취되는 때는, 2003년에 이 세상
에, 바로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지금 대한민국이라고 하
는 땅에 살아야 되고, 갈보리교회에 출석해야 되는 이것은 때가 찬 경륜이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우리의 삶
에 절대적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인간은 똑같은 것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도록 되어 있
습니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를 말하
는 것이지 내 마음이나 감정이 절대 똑같은 것을 두 번 경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우리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
난주에는 다른 설교를 했습니다. 혹 지난주에 했던 설교를 내가 토시하나
변경하지 아니하고 똑같이 한다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릅니다. 인간은
똑같은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9월 7일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이 날을 60번째 맞이하는데 똑같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해마다 나이가
한 살이 더 많아져서 9월 7일을 맞이한다는 그것부터 다릅니다. 작년 9월 7
일은 토요일이었고, 제가 지난해 달력을 뒤져보니까, 로스앤젤레스에서 함
께 일하던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돌아가셔서 이 날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
런데 올해 9월 7일은 똑같은 9월 7일이지만 주일이라서 이렇게 설교를 하
고 있지 않습니까? 작년 이날의 기온이 오늘과 같이 똑같지 아니하였고, 날
씨가 다르고 사회 환경이 변하였고 세상이 바뀌었고 작년의 이날에 만난 사
람과 오늘 만난 사람이 달라졌고,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일을 해도 절대로 마음가짐도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날마다 날마
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어느 글에서 어떤 목사님이 시 하나를 써서 발표한 것을 봤는데,
시 제목이 좀 야하게 됐어요. "두 번째 키스"라는 제목을 붙여서 목사님이
시를 하나 썼어요. 그런데 그 시를 쓰게된 동기까지 거기다 썼어요. 그래
서 읽어봤더니 교인 가운데 청년 하나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결혼한지 한
달 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마음이 변한 것 같다고 원통해 하는, 그래서 그
청년의 하소연을 듣고 나서 정말 신세대 같은 시를 하나 써서 그 청년에게
답변으로 준 것이라고 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번째 키스"라…

  아! 어찌하여 어제 같지 아니한가?
  어제는 영혼까지 흔드는 전율이 있었는데
  그러면 내일은 더 달라지겠지?
  마음이 변했나? 조금은 변했다.
  왜 변했나? 너와 나는 흐르는 역사 안에 살기 때문이다.
  이런 시를 써서 그 청년에게 주는 것으로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참 훌
륭한 감정입니다. 처음 만나서 그런 시간을 가졌을 때는 영혼을 흔드는 전
율이 있었지만, 두 번째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일을
해도 벌써 감정은 변화가 왔어요. 우리가 한 수십 년 살아보세요. 입에서
냄새난다고 보기도 싫어진단 말이에요. 감정이 달라져서… 똑같은 것은 경
험할 수가 없어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죄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를 향하신 때가 찬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고생할 때는 고생
을 해야 합니다. 고생도 똑같지 않습니다. 10년 전 고생하고 지금 고생하
고 또 다르고 똑같은 고생을 해도 그때 감정과 지금 감정이 또 다르고… 배
가 고플 때는 지독하게 고파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우연한 일이 없
다는 것입니다. 귓전에 지나가는 소문 한마디라도 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
의 경륜에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어떨 때
나의 스승이 된 적도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실패가 영혼의 빛이 된 적도
있습니다. 때로는 몸에 병이 든 것도 유익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때
로는 배신당한 것이 내 인생을 새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죄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때가 찬 하나님의 경륜이 네게 임하는 것이다. 하
나님은 우리를 성공할 때가 되면 성공을 시키고 거두어 가야할 때가 되면
거두어 가십니다. 십자가를 질 때가 되면 져야 하고 울면서 겟세마네 산에
있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지금이라는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
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언제인가? 지금입니
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인간관계가 누구인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입
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
다. 그 이유는 과거는 흘러갔으니 똑같은 것이 절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미래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무엇을 하
고 누구를 만나며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때가 찬 경륜이다. 하나님의 우주
적 역사 안에 객관적인 나!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역사관입니다. 그러면 어
떻게 되는가?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종점으로 가야 한다는 것
이 하나님 백성의 역사관입니다. 우리의 성공도 실패도 병들고 괴로워했던
모든 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1절에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
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를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이 내가 이런 날의 역사를 살도록 미리 예정하셔서 그 때가 찬 경륜이 오늘
의 시대에서 나타난 표현이 바로 현재의 나다!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고 있는 백성!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성을 믿을 때 우
리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그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겟세마
네 기도의 해답은 이렇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
옵소서." 그랬습니다. 부활의 아침이라는 미래적 약속을 바라보면서 현재
의 내가 치러야 될 무한한 고통을 가르쳐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대
로 되어지게 하옵소서." 이게 하나님 백성의 역사관입니다. 이제 온 유대
민족이 추앙하여 받들면서 왕이 되시라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존경심
의 민중 앞에 죄수복을 입고 처절하게 끌려 다니며 매를 맞고 쓰러지는 괴
로운 역사의 현실 속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배반자들의 비웃음을 들으면서
십자가 죄수형틀에 매어 달리는 최악의 형벌을 "아버지가 마지막 정하신 내
가 가야할 내 종점이기 때문에 나는 가겠습니다." 하고 단호히 일어서서 로
마 군병들 앞에 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는 인간 역사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
이지만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셨을 때는 인간이 당하는 모든 역사를 똑같
이 살아야 했고 인간 역사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피할 길이 없이 종
점까지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하십니까? 부활하심으로 역
사 이전의 자기 장소로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인간 역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나
같이 살아라. 그리고 초월적 역사의 나라인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
라."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역사관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구속
사적인 역사관!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를 보고 갈릴리 예수 시대의 종말이라
는 선언을 했지만 바로 그 지점이 인간 역사 이전으로 돌아가는 승리의 순
간이 되는 진리를 믿고 살아가는 백성, 그것이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오늘은 2003년 9월 7일이라고 하는 날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과학적으
로 수만 년, 수억 년이라고 말하는데 왜 온 세계는 이 날을 "2003년 9월 7
일"이라고 말합니까?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역사 안에 탄
생하신 때가 그때이기 때문에 그때를 중심해서 세계는 새로운 기원을 말하
기 시작했어요. 무슨 뜻이 있어요? 역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
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내가 누구인가? 창세 전
에 하나님이 미리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때가 찬 경륜이 오늘의 현실로 나타
난 것이 나다! 내가 왜 여기 있는가? 하나님의 계획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
가? 하나님이 주신 일을 위해서!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역사관입니다. 이
역사관이 분명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 훌륭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창세 전에 계획된 인간 역사 이전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과 같이 인간 역사 안에 보냄을 받았습니
다. 때가 찬 경륜을 이루는 여러분의 현실에 많은 고난들을 십자가 안에서
해석하시면서 한 주간도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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