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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시리즈② - 듣고 돌이키라 / 잠 1: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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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지혜시리즈② - 듣고 돌이키라 
본문 : 잠언 1:20~33 

지혜시리즈 두 번째 말씀이다. 지난 주에 지혜는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지혜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바르게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 곧 지혜라는 말씀을 드렸다. 탕자가 아버지의 곁은 떠나는 선택이 있어고 다시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오는 선택이 있었다. 아버지의 곁을 떠난 선택은 어리석은 판단이었지만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오는 선택은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 영생의 길을 묻자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말씀을 듣고 이 청년은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부자이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결단하자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다. 삭개오가 바른 판단할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이같이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지혜이다. 바르게 선택하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지혜라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면 우리가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 중에 하나는 내가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선택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가는 선택인가? 이것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선택은 지혜롭지 못한 선택이지만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가는 선택은 참으로 지혜로운 선택이다.

교회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오 백원짜리 동전을 두개 손에 쥐어 주었다. 하나는 헌금하고 하나는 떡복이를 사 먹으라고 주었다. 아이는 양 손에 하나씩 들고 신이 나서 교회로 향하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오른 손에 쥔 동전을 놓치고 그 동전은 대굴 대굴 굴러서 하수도 구멍으로 쏙 빠져 들어갔다. 이 아이는 이 때부터 고민한다. 내 손에 남은 오백원짜리는 헌금할 동전인가? 아니면 떡복이를 사먹을 동전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이렇게 두 가지 속에서 바른 판단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가? 여기에 기준이 있다. 내가 하는 선택이 과연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만일 이 아이가 빠진 동전은 헌금할 돈이 빠졌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판단이고, 내 손에 남은 동전은 하나님께 바칠 동전입니다라고 고백할 것이다.
이같이 바른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까이 가는 선택인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선택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잘 보면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 자체를 부인한다. 그러기에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선택을 할 수 없다. 시편 14편의 말씀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니 판단해야할 때에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가? 에 대한 관심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바른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의 기초는 하나님이 계심을 먼저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요즈음에 인기있는 책 중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 보면 쓰쿠바 대학 명예교수 무라카미 가즈오 씨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레닌이라는 효소 유전자 암호를 해독하여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생명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 정보를 읽으면 읽을수록 미세한 공간에 이렇게 치밀한 정보를 적어 넣은 어떤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무라카미 씨는 그런 위대한 존재를 ‘Something Great’라고 하였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위대한 존재가 인간의 유전자 속에 엄청난 암호를 넣어 두었다고 고백한다. 바로 그 위대한 존재가 누구인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살아가는 자는 지혜로운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다음 단계 거만한 자들이 된다. 하나님께로 가까이가는 선택보다는 자신의 재물과 자신의 명예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진화론을 주장하였던 다윈을 보라. 그는 무신론을 주장하기 위해 진화론을 주창한 것은 아니다. 다윈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성직자가 되려고 했다. 신학 공부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신학에 대해서도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다윈은 특히 신학 외에 식물학 강의에 열심히 귀를 귀울였다. 이 강의에 심취해서 쓴 책이 [종의 기원]을 쓰고 생물진화를 주창했다. 그는 최초의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고 생각하였다. 다윈은 진화라는 발상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조화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의 기원] 초판의 권말에 이렇게 기록했다. '생명은 최초에 하나님에 의해 불어넣어졌다‘고 기록하였다. 초판은 즉각 전 세계에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성공에 취한 다윈은 재판부터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삭제해버렸다. 그러던 중 다윈 자신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을 떠난 다윈은 결국 자신의 명예와 성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책에서 삭제해 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다.
이같이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부정하고 자신의 명예와 재물을 더욱 높이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니 바른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지혜로운 자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듣고 돌이킬 줄”아는 사람이다. 말씀을 듣고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바른 판단의 근거이다.

본문의 말씀에 미련한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에 표현된 미련한 자는 막대기로 때려야만 잠시 동안 돌아서는 사람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미련한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미련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긴다. 그러다가 나라를 빼앗기는 아픔을 경험하고, 혼란에 빠져서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선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회복되면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점저 멀어진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였다. 하나님의 막대기 맛을 보면 잠시 돌아섰다가 평안하면 다시 제 멋 데로 사는 인생이다.

우리도 이렇게 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어떤 성도가 암 선고를 받았다. 교회에 와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하나님이 고쳐만 주시면 내 목숨 바쳐 헌신하겠다고 약속한다. 주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각오한다. 함께 기도한다. 수술할 때에도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그리고 수술하고 점점 회복된다. 경과가 좋다. 죽을 먹기 시작하고, 밥을 먹기 시작하고, 마음 데로 먹고 싶은 음식 잘 먹는다. 그 다음부터는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제 다 낳았으니 괜찮다. 살만하다. 교회도 가끔 한주씩 빠지더니, 한달에 한번씩 빠지더니, 한달에 한번씩 나온다. 그러다가 아예 교회하고 발 걸음을 딱 끊고 마음데로 산다. 먹고 살기 바쁘다고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선택을 한다. 이러한 사람은 본문에 미련한 자라고 말씀한다. 막대기로 때려야만 잠시 동안 하나님 원하는 방향으로 가까이 가다가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판단을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거만한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미련한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혜로운 자가 되라. 지혜로운 자는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돌이킬 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들, 하나님이 없기에 자기 마음데로 살아가는 거만한 자들의 결과는 어떤가? 본문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은 결과가 좋을 수가 없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글을 집필해 자신이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책을 출간했다. 프랑스 국민들은 볼테르의 글과 연설에 갈채를 보냈다. “100년 후에는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미신가들이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렇게 욕을 퍼붓는 나를 가만 두겠습니까” 결국 볼테르도 나이가 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몸을 떨며 의사에게 6개월만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애원했다. “오,이제 나는 지옥불에 들어가는구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수는 점점 늘어간다. 볼테르가 운영하던 인쇄소에서는 지금 성경을 찍어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는 지혜로운 자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는가? 평안히 살 길을 열어 주신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평안이 없다. 안전이 없다.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 자에게 평안히 살 길을 열어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만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평안과 기쁨이 없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 지혜로운 자에게 평안히 살 길을 열어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다. 그들에게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선택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면 나의 일꾼으로 다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다시 살 길이 열려진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 약속의 말씀이 더욱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나에게로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다시 너를 나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듣고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듣고 돌아서는 자에게 평안히 살 길이 열리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호세아서의 말씀에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때에 두려움과 고통스러운 일이 계속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면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에게 평안히 살 길을 열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귀에 부담스러운 말씀도 듣고 돌아서자.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도 듣고 돌아서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는가? 내가 하는 이 선택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선택인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선택인가? 듣고 돌이키는 선택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히 살 길을 열어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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