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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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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 (벧전 4:7-11) 

지난 주간에 영화 한편을 보았습니다. 세계적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영화입니다. 다 보진 못하고 앞부분만 조금 봤는데 영화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50년 후인 2050년의 미국입니다. 톰 크루즈가 맡은 존이라는 주인공은 미래범죄예방국 직원입니다. 미래범죄예방국이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특수경찰국입니다.

그런데 그 범죄를 예방하는 방법이 기발합니다. 지금의 과학 기술도 대단한데 앞으로 50년 후의 과학 기술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어마어마한 첨단 과학 기술이 수사력에 도움을 주겠지요? 그렇습니다. 스필버그는 그때가 되면 미래를 미리 내다봄으로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범죄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소위 예지 시스템의 가동로 범죄자를 미리 추적, 체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경찰 수사력이 막강한 과학의 힘을 빌어 50년 동안 발전한 상황이라고 짐작하시면 될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 사건의 전모가 오늘의 추리작가들의 이름을 딴 세 명의 예언자들을 통해 미리 파악됩니다. 그 파악된 내용이 담긴 정보가 미래범죄예방국에 제시되면 그걸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범죄가 일어날 시간과 장소 그리고 범죄예상자와 피해예상자 등 5W1H가 밝혀져 그것을 토대로 범죄를 미리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서 불행한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고 건전한 미래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미래범죄예방국의 역할입니다. 현재로선 약간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앞으로 50년 후엔 실현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범죄사건을 미리 내다보고 예방을 통해 범죄없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그 영화의 그런 내용을 잠시 보고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래를 본 것입니다. 어떤 미래냐? 그 꿈의 내용은 우리 영락의 교우들 중 세 분이 죽는 꿈이었습니다. 제가 꿈을 잘 안꾸고 또 꾸어도 깨고 나면 무슨 꿈을 꿨는지 꿈 내용이 잘 생각나지가 않는데 이 꿈은 아주 선명했습니다.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 분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30대 여교우 한 분, 40대 남교우 한 분, 50대 여교우 한 분... 누구라고 알려드리면 기분 나빠하실 것 같아서 말은 안하렵니다.

그런데 이 세 교우의 죽음 앞에 우리 교우들이 참 슬퍼합니다. 그리고 저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꿈인데도 마치 생시처럼 엉엉 울다가 잠을 깼습니다. 깨보니 꿈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런데 그후 그 세 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무개 집사, 아무개 집사, 아무개 집사... 세 분 다 집사님입니다. 궁금해 죽겠습니까? 조금 더 힌트를 드리면 30대와 40대는 자녀가 둘이고 50대는 자녀가 셋입니다. 성비까지 말씀드리면 너무 좁아지니 이쯤 하겠습니다. 뭐 꿈은 현실의 반대라니깐 어쩌면 꿈 속의 그 세 분은 장수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서 오늘 제가 그분들을 보았습니다. 어땠을까요? 그런 의식없이 보았던 지난 주일과 오늘의 느낌이 같았을까요? 지난 주일에도 봤고 오늘도 봤습니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지난 주일과 똑같이 오늘도 오셔서 예배드리고 각기 맡은 바 봉사를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릅니다. 제가 그분들을 보면서 느끼는 바는 다르다구요. 비록 현실은 아니지만 가상으로라도 그분들의 죽음, 이 땅에서의 마지막 경험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더라는 겁니다. 자꾸 그 세 분에게 더 관심이 갑니다. 끝을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권면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 때를 눈앞에 두고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촉구합니다. 끝을 받아놓은 인생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할까를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의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척 불리하고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황제 네로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때라 하고 어떤 이들은 도미티안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때까라고 하는 이 시기는 편지의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고난과 시련의 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베드로는 용서를 통해 실증되는 사랑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기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것은 용서를 말합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용서하는 겁니다. 용서하지 않음은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용서가 사랑을 재는 다림줄입니다. 용서는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겁니다.
여러분은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점점 용서가 없어져 가는 세상입니다. 이해는 없고 정죄만 난무합니다. 고백은 없고 고발만 난무합니다. 자기 가슴을 치지 않고 남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이건 뭘 말하는 겁니까?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지식은 많은데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는데 다 까발리지 못해서 혈안입니다. 그리고 또 원망은 얼마나 많습니까? 감사는 없고 원망과 불만 천지입니다. 의무는 행하려 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합니다. 정말 사랑이 식어져 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시절이 하수상해지는 겁니까? 그건 종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내 남은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무얼 하며 살아야겠습니까? 돈 몇 푼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명예와 권력이 그렇게 절실한 것입니까?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권면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정신차려 사리분별을 할 수 있으며 궁극 이전의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실제적인 상황으로 인해 더 이상 기만당하지 않는 이러한 분별력있고 깨어 있는 태도는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즉 기도하지 않음으로서 사랑, 용서, 감사, 환대, 봉사를 상실하며 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종말의식"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비활동성을 초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참여의식을 고취시킨다는 겁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기에 해야할 마땅한 일에 더 최선을 다한다는 겁니다. 기도를 통해 정신이 깨어 있는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영적 차원의 자기계발에 힘쓰며 사십니까? 인간은 신체적, 감정적, 지적, 영적 차원의 자기 계발을 통해 통전적 인간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동을 통해 육체적 자기계발에 힘쓰고, 문화 및 예술, 여가활동을 통해 정서적 자기계발에 힘쓰고, 책을 읽고 다양한 지식을 쌓아감으로서 지적 자기 계발에 힘을 씁니다. 그런데 영적 자기 계발엔 어떠하냐는 겁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이 영적 자기 계발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할 때인데도 여기에 대해서 가장 소홀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니 수천만의 그리스도인이 산다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부터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 답게 살 수 있습니다. 영성의 회복을 통해서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허다한 죄를 덮어주고', 비난이 아닌 격려에 익숙한 성숙한 인생이 되는 겁니다. 일찍이 잠언 기자는 10:12절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이웃의 죄를 덮어주고 용서를 통해 그 죄들을 묵과해 주는 것이 지혜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들추어내거나 표면에 노출시키지 않고 용서로써 그것을 덮어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가 어떻습니까?... 묻어두어야할 것조차 까발려서 어지러워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 사도는 서로 대접하는 삶을 권면합니다. '환대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대접 또한 사랑의 지평에 속하는 행위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그들을 내 삶 속으로 끌어당기는 크리스챤의 영성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점점 환대보다는 적대가 많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공격적이거나 자기방어적이 되어 갑니다. 그럼으로서 사람 사이의 단절과 왜곡은 더욱 심해져 갑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부지중에 나그네를 영접해서 천사를 대접한 아브라함의 이야기, 어려움 중에도 엘리야에게 음식과 거처를 제공한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 낯선 나그네에게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대인들은 이런 환대를 너무도 잊고 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서 점차 고립되고 더욱 외로워져 가는 겁니다.

사도는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당부하는데 이것은 손대접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시간과 돈과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인색한 사람은 환대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게 잘사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움켜쥔 그 손엔 다른 게 잡힐 수가 없는 겁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자연스레 대접으로 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사도는 '봉사'에 대해서 권면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아는 사람은 당연히 봉사의 삶을 삽니다. 그래서 사도는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권면의 초점을 맞춥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인가? 사도는 먼저 은혜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강조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다양하고 여러 형태로 주어졌지 결코 평균적이거나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 가지 형태와 색깔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체 역시 단일색을 띤 획일적이고 단조로운 것이 될 수 없고 또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고립되어서도 안되고 또 그 하나가 절대화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맡은 대리인'으로서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섬겨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섬김의 방식은 '청지기로서의 봉사'입니다. 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은사란 인간 안에 있는 자기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는 자기 힘으로나 혼자 힘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항상 새롭게 주는 힘에서 기인되어야 그게 진짜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해야' 그게 진짜 봉사지 내 힘으로, 내 지식으로, 자기 기분으로 하는 건 진정한 봉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봉사자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또 우쭐댈 필요도 없습니다. 할 수 없다고 발뺌해서도 안되고 자기 혼자 힘으로 한다고 주장해서도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위와 말의 배후에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그 일을 하시는 겁니다. 나만 통해 역사하시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봉사자는 무엇보다 겸손해야 하고 자기를 비울 줄 알아야 합니다. 청지기로 봉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겁니다.

한 예로 11절에서 사도는 말씀의 은사와 남을 돕는 은사를 언급합니다. 말씀 증거는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어야지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는 겁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 스스로가 인간의 말을 이용한다는 것과 인간의 말을 하나님 자신의 말로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는 권면은 약속이면서 동시에 위협입니다. 큰 특권이자 큰 책임인 것을 알라는 겁니다. 남을 돕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해야지 자기가 한다고 깝죽대다간 실족하거나 망신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은사의 활용 목적입니다. 은사는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봉사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자신에게 부여된 특별한 재능들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때 그 은사는 거두어지고 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계속 공급받기 위해서라도 봉사를 계속 해야합니다. 그게 자기 은사를 극대화하는 방법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고 또 우리의 마지막도 점차 다가오고 있습니다. 꿈속에 나타난 그 세 분에게만 끝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받아놓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를 우리가 터득해야 합니다. 내일의 미래는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 결정되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열심히 서로 사랑하며 형제의 허다한 죄를 덮어줄 때에 주님도 우리의 죄를 덮어주며 우리를 보듬어 주실 것입니다. 아니 이미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런 은혜를 체험한 우리들이기에 당연히 그런 사랑을 받은 자답게 열심히 서로 사랑하고 허다한 죄를 덮어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미움과 반목, 폭로와 정죄가 난무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세상을 본받지 아니하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아버지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대접하고 환대하는 삶을 사십시다. 원망보다는 감사, 불평보다는 이해로서 서로를 섬길 때에 우리도 부지중에 천사를 영접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기회를 맛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십시다. 선한 청지기 같이,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각양 은사를 잘 활용해서 공동체를 섬기십시다. 이게 바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에 우리가 이루어가야할 삶의 내용들입니다.

그러러면 무엇보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영성의 회복이 중요하기에 이 9월의 표어를 <영성의 폭과 깊이를 더해가는 달>로 정했습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이 계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성이 더욱 풍성해지고 그득해지길 바랍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덕담을 주고 받는 이 한가위 연휴 기간에 우리의 속사람이 보름달처럼 주님의 영성으로 그득해져서 멋진 종말론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영락의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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