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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답게 살자 / 갈 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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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답게 살자
갈라디아서 2:11-21

어제는 신내교회 목사님과 저녁을 신내동에서 먹었는데 하시는 말씀이 바로 앞에 새마을 금고가 있는데 어떤 아가씨가 결혼자금을 약혼자가 다 날려서 가스총을 들고서 들어갔다가 가짜총이 들통나서 성공도 못하고 잡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가정주부가 유모차에 아이를 데리고 와서 얼굴도 드러내고 아이 장난감 권총으로 돈을 강탈해서 가지고 갔지만 이내 잡히고 말았습니다.
여성들이 무서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무기가 가짜 총이라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놀라서 돈을 주었는데 이제는 청원경찰들도 속지 않습니다. 가짜는 들통납니다. 오래 못갑니다. 진짜가 무섭습니다.
믿음도 진짜를 가져야 합니다. 참된 믿음을 찾아야 합니다.

안디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베드로가 몇몇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정겨운 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바울도 바나바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지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게 되자 순간적으로 일어나 자리를 뜨게 되자 다른 성도들도 일어나게 되고 바울과 늘 함께 했던 바나바조차도 어정쩡하게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에 의해서 이방인의 선교가 확고하게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고넬료 사건이 그의 시각을 열리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방인 형제들을 믿음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할례자들이 나타나자 엉겁결에 피하려는 행동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머리로는 인정했지만 감정적인 면에까지 하나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이 태도가 이방인 형제들에게 아주 큰 영향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만 믿어서 될 일이 아니고 결국 유대인처럼 되지 않으면 아무리 믿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베드로는 누구나 인정하는 공인입니다. 한 개인이 아니에요. 그의 하나하나의 행동은 정말 중요합니다.
저와 권사 집사님들이 말과 행실이 하나이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이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말은 늘 바른 말은 하는데 섬기고, 손해보고, 힘든 일은 슬그머니 빠져 나갈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정말 속았다는 느낌입니다.
가짜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진짜는 한결같습니다.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공개적으로 권면한 바울은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책망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방인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명백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꼭 필요한 책망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할 책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망을 받아들인 베드로도 귀하게 여겨집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한 것은 신앙적인 책망은 그 목적이 항상 사랑에 있습니다. 비난하고 공격하는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말씀과 사랑에 근거한 책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스승으로서 책망하려 해도 학생들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 어른들이 어린 중, 고등학생들의 잘못된 행동들을 보면서도 책망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는 어떠합니까? 신앙적인 책망이 도리어 자신을 비난했다고 생각합니다. 망신 주었다고 말합니다. 상처 주었다면서 얼굴이 어두워지고 서운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심을 만나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형제도 남편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배신합니다. 온통 가짜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태은교회에서는 사랑의 책망이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가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울도 있고 베드로도 있기를 바랍니다. 책망하는 사랑도 있어야 하고 뉘우치는 믿음도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 축복된 미래가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흘러넘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직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면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떠나시면 절대로 이런 축복된 관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의 모든 만남은 껍데기뿐입니다.

사랑하는 태은 성도여러분!
주님이 없는 헌신, 봉사, 열정 그 모든 것은 율법일 뿐입니다. 내가 수십개의 규율을 지킨다해도 하늘의 기쁨이 없는 죄성은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16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면, - “우리는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도 인정하십니까?

예를 들어 말한다면, 규칙이 많은 가정이 좋은 가정입니까?
너는 학교에 갔다가 몇시에 들어와야 한다. 옷은 어떻게 입어라. 누구를 만났는지 보고해라. 말은 어떻게 해라. 걸을 때는 어떻게 걸어라. 친구는 누구와는 사귀지 말아라. 그 아이의 인생이 어떠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며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사사건건 참견을 합니다. 모든 것을! 시간 시간을 확인합니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온갖 욕설을 합니다. 너무나 지겹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빨리 시집가서 벗어나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는 틀렸다고 말하고 남편도 어머니가 골라줍니다. 그래 빨리 이 지겨운 충청도 땅에서 벗어나자! 이쪽 보고서는 오줌도 안 싼다. 
그런데 정작 자유를 얻고 보니 혼란스럽습니다. 과거에는 힘들기는 했지만 시키는 대로 하면 됐는데 ---내 판단이나 책임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결정해야 합니다. 판단이 서지를 않습니다. 살림살이도 규모가 없어요. 안정이 안됩니다.
그렇다고 다시 짐싸들고 충청도 친정집으로 식구들 다 데리고 들어가실래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생활하며 혼란스럽다고 옛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 매였던 사슬을 끊고 내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알아서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율법을 벗어나 자유케 하셨습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때 파고들어 오는 것이 있습니다.
게으름입니다. 무책임입니다. 이 축복된 기회를 신앙적으로 게으르고 열성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그 인생은 불행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너무나 아름다운 축복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복음을 듣고서도 변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습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있을 때 얼마나 참혹한 상황입니까? 하지만 그는 오히려 기뻐합니다. 어떻게? 믿음의 관점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 나는 억울한 상황을 보고 화가 납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을 회복하게 되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눈이 감겨있을 때는 나의 실패만을 보고 괴로워하고 자존심상해 합니다. 지난 인생이 너무나 후회스럽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관점이 회복되니 나의 실패를 통해서 나의 참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실패를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영안을 떠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핑계하지 말고 내 사명을 보아야 합니다.
스스로가 결단하고 자기 자신을 책임져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대신 결단을 내려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다른 사람을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어떤 목사님의 말씀이 “목회가 재미있다”고 하니 다른 분이 반론을 제기하더랍니다. “목사님! 이민 목회가 힘들지 않습니까?” 당연히 어렵지요. 그런데 그분이 답변하시기를 “예, 힘든 면이 있지요. 그런데 제가 재미있다고 말씀드렸지, 언제 쉽다고 말씀드렸나요?”
그렇습니다. 쉽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받아 들였다고 해서 인생이 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가볍지 않습니다. 복음은 중심에서 우러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중심에서 우러나는 것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철저히 썩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장 종교적이면서도 가장 악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안에서 끊임없이 악한 생각이 머리를 쳐들고 올라옵니다. 그것이 나 자신입니다. 복음은 그런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더욱더 사용하시기를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어떤 선한 일을 행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그것이 나의 사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 “우리가 세상을 크게 보면 우리의 하나님은 작게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상은 작게 보인다.”

주님이 나를 사용하시기 쉽게 자꾸 나 자신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여러분의 내면 깊은 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주님의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반응하십시오.
태은교인으로서 몇가지 의무를 행하고 나머지는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깊은 묵상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가 됩니다. 성도답게 살게 됩니다.
베드로처럼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져도 참 믿음이 나를 당황하게 하지 않습니다.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의 사람은 자기 계획이 없습니다. 주님의 계획이 나의 계획이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기쁨이 됩니다. 존귀한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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