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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6) - 요나의 회복 (욘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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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복(6) - 요나의 회복 (욘 2:1-10)   
작성일: 2003/09/19 11:31:30
작성자: 김영수 목사
 

♣ 요나의 회복 ♣ 욘2:1-10

어린아이 하나가 길에서 뛰어 놀다가 넘어져 무릎을 다쳤습니다. 약을 발라 주는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엄마! 온 세상이 스펀지로 되어있으면 참 좋겠어 요. 그러면 넘어져도 안 다칠 것 아니에요." 그때 어머니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온 세상이 스펀지로 되어있으면 저 꽃들은 나무들은 어떻게 자랄까? 농부는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우리 자동차는 어디로 다니면 좋을까?" 의외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철부지 아이처럼 실패 없는 세상을 상상합니다. 스펀지가 되어서 넘어져도 깨지지 않는 인생살이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쿠션 좋은 스펀지로 만들어져 있지 않습니다. 때로 이런저런 실패들이 우리의 인생살이를 난타해 옵니다. 실패와 좌절들이 예고도 없이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과 자신의 사명 앞에 불순종하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컴컴한 물고기 뱃속에서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고 흐르는 위액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살이 녹아 내리는 고통 속에서 요나는 몸부림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성경은 "스올의 뱃속에서 내가 부르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욘2:2)
여기서 말하는 "스올"은 음부, 지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하고 심했던지 이곳이 바로 지옥이구나 싶어서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요나와 같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철제절명의 위기를 경험 해본 적이 없습니까?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카드 빚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부는 카드 빚을 갚기 위해 자식이 갖고 놀던 장난감 총을 들고 은행을 털러 들어갔다가 CCTV에 찍혀 붙잡힌 사건이 있는가? 하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차를 몰고 저수지로 뛰어들거나 집에 불을 질러 자신의 가족은 물론 이웃 주민들까지 죽게 하는 자살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 주위에 경제적인 어려움과 대학입시로 인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자살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 나온 요나의 기적을 통해 실패의 자리, 절망의 자리, 낙심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 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설교제목을 요나의 회복이라고 부쳐 받습니다.


첫째: 실패의 자리에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엊그제 순간초속 60㎧를 동반한 제 14호 태풍 '매미'로 인하여 13일 밤 12시 현재까지 전국적으로 72명이 숨지고 34명이 실종돼 모두 106명의 인명피해와 9000여가구 2만40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가 됐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태풍피해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은 왜 이런 태풍을 만드셔서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시는가?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허버트'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폭풍은 나무의 뿌리를 한층 더 깊이 뻗어가도록 만들어 준다."고 얘기했습니다. '토마스 칼라힐'은 "약한 자의 길에서 장애물이던 것이 믿음 있는 사람, 강한 자의 길에서는 오히려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훌륭 한 세일즈맨 '엘머 레트맨'은 진정한 판매는 거절당한 그때부터 새롭게 시작된 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느 날 갑자기 환란이 다가왔을 때 실패가 내 앞에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이 환란과 실패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요? 환란과 실패를 직면하는 신앙적인 자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환란과 실패를 오히려 긍정적인 기회로 삼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실패의 자리에 빠졌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귀에 들리지 않지만, 심지어는 마음으로도 깨달아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나를 싫어버린바 되지 아니하시고 오늘도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며 돌보시며 사랑하고 계신다는 믿음만 있다면, 그로 예수까지 십자가에 버리시기까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그 믿음대로 되어질 뿐만 아니라 지금은 당장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실패자가 아니고 또한 실패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실패란 사실 환경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정신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외형적인 성공자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그 정신, 그 마음이 실패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는 이미 실패자입니다. 반면 아무리 큰 어려움에 부딪혔다 할지라도 그 정신이 승리의식으로 넘쳐있으면, 회복의식으로 넘쳐 있으면 그는 실패자 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입시에 실패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인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실연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잘 믿어보겠다던 신앙생활에 실패하고 실수하여 넘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과 돼지를 구덩이 속 진흙탕에 함께 쳐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돼지라는 놈은 진흙탕이 마치 자기 집 안방 인냥 반듯이 드러누워 꿀꿀거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은 그 진흙탕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양과 돼지의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너희는 돼지다."하지 않고 "너는 어린양이다. 나의 양이다"(요10:1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이렇게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 양은 목자의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 도움이 필요합니까? 위로가 필요합니까? 쉼이 필요합니까? 요나처럼 목자의 말에 불순종하여 물고기 뱃속에 빠졌든 본의 아닌 실수로 인하여 또는 인간관계에서 상처와 버림을 당하였든 오늘 우리 속에 도움과 위로와 쉼과 회복이 필요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양이 될 수 있으며 아울러 구원과 축복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면 어떤 실패의 자리 환란의 자리에 있다할지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주님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한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럴 때 진흙탕 속에 빠진 양보다 목자의 마음이 더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도 베드로도 예수님의 제자로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실패감을 극복하지 못했던 가롯 유다는 목매달아 자결했고 창자가 터져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회개하고 일어선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초대교회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에 최고의 맹수는 사자입니다. 사자가 한번 나타나면 모든 짐승들이 꼬리를 내리고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무서운 사자도 코끼리 곁에는 함부로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긴 코를 휘저었다가 사자를 한번 내리쳐 맞는 날이면 10m 20m 내동댕이쳐져 갈비뼈가 부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코끼리가 사람이 하라는 대로합니다. 그 사자를 후려지는 긴 코로 1 톤 짜리 통나무를 번쩍 들어 실어주기도 하고 옮겨가기도 합니다. 이 거대한 힘을 가진 코끼리가 어린아이 손에 이끌려서 재주를 부리는 서커스단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코끼리를 아주 어릴 때에 강한 쇠말뚝에 묶어 둡니다. 끊어지지 않는 철사로 꽁꽁 묶어두면 코끼리가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목에 피가 납니다. 그래도 쇠말뚝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말뚝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1년 2년 지나는 사이에 코끼리는 실패감과 좌절감에 젖어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저 말뚝은 절대로 뽑을 수 없다. 이 쇠사슬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쯤 되어졌을 때에 쇠사슬 대신 노끈 하나를 묶어둡니다. 쇠말뚝이야 적당히 그냥 갖다 걸쳐만 놓습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이미 실패의식 좌절감 속에 빠졌기 때문에 저 쇠말뚝은 절대로 뽑혀지지 않는다. 이 끈은 절대로 끊을 수 없다. 그래서 끌어가는 대로 조금만 자극이 되면 질질 끌려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패를 만났을 때 "나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어" 하는 패배감 좌절감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패 자체는 실패일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 실패할 수 있습니다. 확률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실패했다"가 아니라 "나는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빌4:13,막9:23,히12:2) 이렇듯 우리가 실패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실패는 오히려 승리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방 팔방이 다 막혀있고 닫혀있다 할지라도 언제든지 위는 열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의 자리, 낙심의 자리, 절망의 자리, 환란의 자리에서 엎드려 기도하면 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이,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힘들고 어렵다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라파! 치유하시는 하나님이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이 문제에서 실패에서 환란에서 절망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이 귀한 주님을 우리가 믿고 찬양하며 오늘도 주님가신 믿음의 길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는 처절한 실패의 순간 절망의 순간에 가장 먼저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끝없이 도망가던 요나. 자신의 방법과 생각으로 불순종의 길을 떠났던 요나가 실패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이 짐이 됩니다. 그 사명이 부담이 됩니다. 그 사명은 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 사명을 벗어 던지기 위해서 이리저리 도망합니다.

요나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다. 우리 민족만 행복하면 그만이다. 다른 민족들이야 무슨 상관이 있냐? 오직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신앙이 바로 요나의 문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런 문제점을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문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보다 어정쩡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한 발은 교회에 한 발은 세상에 집어넣고 있어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십자가가 살아진 복음, 기복주의 신앙, 인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신앙이 문제점입니다.
하나님을 알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의 유익과 영리만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으로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남이 알아주지 아니해도 하나님의 명령이면 끝까지 순종하고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성도들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너무 계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편의대로 내 생각대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개척교회보다는 쉽고 편안한 교회를 찾아 수평이동 하다보니 오늘날 한국 교회도 부익부 빈익부가 되어 갖가지 문제점을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니느웨보다는 다시스로 가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좋아 보였습니다.

『 어떤 신앙 좋은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청년부 성가대로도 봉사하고 청년부에서 임원을 하면서 일을 잘 감당하는 자매였습니다. 이 자매에게는 단순한 꿈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얼마나 평범하면서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입니다. 뭐 대단한 남자를 욕심내는 것도 아닙니다. 일반 평범한 회사원으로 아침에 빠이빠이, 저녁에 들어오면 오붓하게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일반적인 가정을 꾸미며 살기를 원하는 살림꾼 자매의 단순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결혼을 위해 기도만 하면 자꾸만 생각지도 않은 "사모"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웬일이야"하면서 떨쳐 내버립니다. 그럴수록 "목회자나 신학생과 결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예비해 놓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성가대로도 열심이고 청년부 임원으로도 열심이다 보니 가까이서 중매가 들어오는데 거의가 신학생 아니면 전도사님들입니다.

"하나님! 믿음 좋은 남편, 예수 잘 믿는 가정을 갖기 원하지 내가 사모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기도하는데 기도할수록 사모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이 자매는 술도 먹고 주일도 범해버리고 봉사도 안해 버립니다. 정말 사람이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이 자매의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 보십쇼. 이렇게 타락한 사람도 사모를 시키시렵니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보니 그 쾌락이 정말로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개월이 지나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주일날 회사에서 단풍놀이를 가는데 가다가 차가 빗 길에 미끄러져서 많은 사람이 죽은 대형사고였습니다. 정말 목숨만 건지게 되는 큰 사고였습니다.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이 자매는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고 교회 전도사님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패의 순간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회개하는 기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요나는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내가 당하는 이 고난 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의 이유는 무엇인가?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하나님은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신단 말인가?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주시기 위하여 나를 실패의 자리에 던져 넣었단 말인가?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회개하지 않고 기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평안하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모든 것이 형통하게 잘 이루어져 간다는 사실 때문에 충성하지 못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는 분들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혹이나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큰 풍랑을 만났습니까? 남 모르는 실패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이는 좋은 환경 속에서 아름다운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지 않던 여러분들이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회개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시고자 하는 싸인으로 지혜롭게 깨달으시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4절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평안할 때, 마음놓고 예배할 수 있었을 때에 주일을 범하고 또 의미 없이 예배를 드리고 봉사와 감사에 소홀히 하던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나게 될 때에 기도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히스기야가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고 있다가 위기를 당하여서는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앗수르를 의지하였다가 "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왕하20:1下) 는 경고를 받고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15년 간 연장시켜 주었듯이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교만과 게으름과 욕심과 쾌락에서 다가옵니다.

우리는 고통과 환란을 당할 때 그때가 주님을 깊이 만날 때임을 기억하고 엎드려 회개하며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문제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나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사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 최용덕 집사는 성령 충만한 삶, 기쁨의 시간을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실패로 인하여 영적인 침체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인 침체는 무섭게 중첩되어 찾아왔습니다. 점점 깊어지더니 좌절감이 몰려왔습니다. 너는 위선자다. 자학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 아닌가? 하나님은 나를 떠나신 것 아닌가? 몸부림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84년 9월 어느 새벽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버리시겠나이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몸부림하고 젖은 눈으로 하늘 을 우러러 보았을 때에 그의 등뒤에서 안타까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 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떠난 적이 없느니라. 네가 나를 배신하고 등지고 도망가는 그 자리에서도 나는 너의 등 뒤에서 한번도 눈길을 뗀 적이 없느니라. 나는 언제나 너를 밀어주고 있었느니라. 네가 울고 있을 때 언제나 나는 다시 승리하고 일어서리라 기대하고 잔잔한 미소로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었노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얼굴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하나님. 그랬군요 하나님. 흐르는 눈물을 두 주먹으로 닦아 내리며 가사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고 피아노를 두드리며 곡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노래가 "나의 등 뒤에서"라는 노래가 아니었습니까? 』

어떤 목사님이 고백합니다.
개척교회를 하고 외로워서 울부짖을 때에 교인들이 상처를 받아서 한 사람 두 사람 떠나 갈 때에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때에 혼자 성전에 엎드려 울부짖다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힘조차 잊어버려서 이 노래를 부르며 얼마나 커다란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


셋째: 가장 큰 실패의 순간에 가장 큰 감사를 발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나는 계산이 빠르고 자기 생각과 욕심이 많다보니 평소에 감사하는 말보다는 원망과 불평과 불만족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들을 멸망시키지 않는 것일까? 왜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려고 하시는가? 그 나라는 원수 나라가 아닌가? 하나님은 배알도 없으신가? .....

하나님은 이렇듯 편협한 신앙관과 독선에 얽매여 있던 요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느 민족이나 종파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고자 이방세계에 대한 복음 전달자로서 요나를 선지자로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가서 "너희가 행한 악한 행포에서 떠나라 너희의 악독함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느니라.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회개하면 하나님이 혹시 그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칠 수도 있으리라."(욘1:2, 3:8-9)고 선포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선원들에게 던지어져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암흑공간, 절망의 공간, 죽음의 문턱에서 놀라운 일이 요나에게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가장 큰 절망의 순간에 실패의 순간에 희망의 사람이 되어 긍정적인 언어, 감사의 언어를 회복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마디 감사로 끝난 것이 아니라 구구절절 그의 기도의 전(全) 내용이 감사의 기도로 용솟음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살펴봅시다.
먼저 2절에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아뢰었더니 스올에서 조차 나의 음성을 들으셨다며" 감사하였고, 3절과 4절에서는 "내가 악을 행하여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져지고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나는 다시금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하였으며, 6절에서는 "물이 나를 둘렀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쌓으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막았다 할지라도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고 감사하고 있으며, 7절에서는 "자신의 기도가 주님께 이르렀으며," 9절에서는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질 때에는 오히려 감사를 몰랐습니다.
응당히, 당연히 내가 복받을 만큼 그만큼 했기 때문이라고만 여겼던 것입니다. 당연한 결과일 뿐이니 하나님께 감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나가 불고기 뱃속에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스올에 들어와보니 하나님께서 그동안 나의 삶을 눈동자처럼 돌아보시고 형통케 하시며 축복해 주셨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흑암 속에서 실패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 자체가 감사였습니다.

"이제 저를 고기배속에서 꺼내만 주신다면 이제라도 사명 감당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고백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성공 속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러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요나가 이렇게 감사를 회복했을 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기적입니까?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서 명하시매" 즉 "물고기야 요나를 토해 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순간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었습니다. 할렐루야!

질병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가운데 질병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감사를 회복하는 순간 하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을 묶고 있는 질병 원수 마귀야 그를 토해 내라."

직장과 사업의 실패의 자리에서 신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몸부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넘어 지고 깨어져 피투성이가 되신 분이 계십니까? 그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순간, 더 큰 실패가 아니었음을 감사하는 순간, 지금까지라도 이만큼이라도 더 큰 실패의 나락이 안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회복하는 순간, "사랑하는 내 자녀의 사업을 묶고 있는 물고기야 그를 토해 내라."는 역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감사의 기적 앞에는 안 넘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안 열리는 것이 없습니다.
감사의 능력 앞에 질병이 떠나고 사업이 세워지고 원망과 불평과 낙심이 떠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우리들을 향하여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패는 인생의 낭비가 아닙니다. 새로운 출발이 될 뿐입니다.
실패는 포기하라는 신호가 아닙니다. 방향을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실패는 무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능자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라는 뜻입니다.
실패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셨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향한 더 좋은 생각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안에 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실패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이 그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아픈 실패의 순간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의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지금까지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했습니다. 그 순간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명이 회복되었습니다.

"요나야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욘3:2)

진정한 회복은 사명의 회복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늘찬양교회의 회복과 부흥성장을 위해
"항상 기뻐하며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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