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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 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 마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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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마 22: 1-14

  오늘은 마태복음 22장 1절에서 14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왕 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왕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왕이라면 나쁠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인 하나님은 만 왕의 왕이십니다. 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왕이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미 초청한 사람들에게 종들을 보내어 오라고 했더니 일제히 사양하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그리고는 네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데려와서 잔치자리를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데리고 왔더니 잔치자리가 만석이 되었습니다. 왕이 손님을 보러 들어왔을 때 어느 한 사람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있어서 내쫓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에서 먼저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일제히 복음을 거절하고 사양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유대인의 동네 예루살렘을 멸망시켜 불사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네거리에 나가 즉 세계로 나아가 이방인들을 데리고 오라고 했더니 광성교회가 꽉 찼다는 것입니다. 유대나라에는 잔치자리에 가게 되면 자신이 입고 온 옷은 벗어놓고 주인이 주는 예복을 입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끝까지 예복을 입기 싫다고 하여 자신의 옷을 입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왕이 보고 쫓아낸 것입니다. 잔치자리, 즉 하늘나라는 나의 옷, 나의 공로, 나의 의라는 옷을 입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주시는 의, 즉 예수님의 의를 입고 갈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왕 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해주시는 일이 무엇인지 본문에 의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끼워주시는 왕 (1-3)

  어디에 끼워주십니까? 축에 끼워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친구들의 축에 끼지 못한 사람을 "왕따"라고 하지 않습니까? 왕따 당하는 학생이 너무 속상해서 학교에 가기 싫어하고 더 심하면 자살을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축에 못 끼면 이렇게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왕이 못 땅한지라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어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왕을 예선하라고 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왕으로 등극을 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아들들을 다 불러오라고 했더니 일곱명이 왔는데 기백이 있고 기골이 장대합니다. 첫째를 왕으로 세우실 거라 생각하고 기름을 부으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까지 모두 시도했는데 모두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볼 때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새의 아들 중에서 왕을 예선하신다고 하셨는데 왜 모두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이새에게 아들이 더 없느냐고 묻자 막내가 들에서 양떼를 치고 있는데 부르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즉 축에 끼워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 예선이 됩니다. 축에 끼워주시지 않았던 것을 알았던 다윗이 먼 훗날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시 27:10). 앞으로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언제 다윗을 길에 버린 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축에 안 끼워 주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속이 상해서 오랜 후에도 잊지 않고 부모는 날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나를 축에 안 끼워 주었으나 하나님은 나를 기어이 찾아내서 축에 끼워주었다는 것입니다. 축에 끼워준다는 것이 이만큼 복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첫 번째 장면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한번은 왕이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그리고 제한된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냅니다. 잔칫날이 되자 종들을 보내어서 이미 초청한 사람들을 모셔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초청 받는 사람은 세상 백성들 전부가 아니었고 그 중에서 적은 수만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 축에 끼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복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초청을 받았던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거절을 하였습니다. 거절한 이유를 누가복음 14장의 말씀과 종합해 보면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사람은 장사가 너무 잘 되어서 눈코뜰 사이가 없을 정도로 바빠서 죽고 싶어도 죽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가하게 왕의 잔치 자리에 가서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왕이 나라를 잘 다스려서 백성들이 살기 좋게 경제가 부흥되어 장사가 너무 잘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감사함으로 왕의 잔치에 참여해야하지 않습니까? 감사해야 할 조건을 오히려 거절하는 조건으로 삼은 것입니다. 요즘도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예전에 밥 세끼도 제대로 못 먹을 때 하나님께서 물질의 축복을 해주시면 목숨 바쳐 헌신하고 충성하겠다고 하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가용이 생기고 월급이 오르자 더 열심히 충성할 조건이 아닙니까? 어떻게 답답하게 주일날 교회에만 나아가 앉아 있겠느냐고 하며 주일날 설악산에 갑니다. 이런 사람이나 오늘 본문의 장사가 잘되어서 왕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뭐가 다릅니까? 주일에 하나님의 잔치, 즉 예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장사 잘된다고 거절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성경은 옛날 얘기로 들으면 안됩니다. 성경을 무엇 하러 가지고 다니며 도대체 무엇을 믿자는 겁니까? 우리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농사꾼이었는데 본래 밭을 살수 없어서 가난하여 소작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또 소를 못사니까 사람이 어깨에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다가 왕이 나라를 잘 다스려 부자가 되었습니다. 농토를 사고 소도 샀습니다. 그런데 새로 사놓은 농토도 가봐야 하고 소를 실험도 해봐야 하니까 못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왕의 잔치에 참석 못할 조건입니까? 더 열심히 참여해야할 조건입니다. 우리가 큰집에서 살고 사업도 제법 잘 하면서 자가용을 가지고 사는데 주일날 예배에 초청하는 하나님의 잔치에 그것이 못 갈 조건이 됩니까? 그런데 이들은 못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잘살도록 해줄수록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됩니까? 정신차려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장가를 갔으니 아내를 기쁘게 해줘야 하기 때문에 못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내와 함께 금강산에 놀러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놀러갈 날이 없어서 주일날 갑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이 포기하고 그 동네에 불을 놓았습니다. 그 동네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나에게 웃기는 소리냐고 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왕은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그 왕이 국민 전체를 초청했는데 날 끼워줬다면 감사할 것도 없지만 소수를 청하는데 날 끼워줬다면 이것은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초청하는 자리에는 빠짐없이 참여하십시오. 소수의 무리 축에 끼워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5천만명 전부를 자기의 아들 딸로 삼아 주셨습니까? 지금 기독교인이 천이백만명이라고 하지만 사실 천만명밖에 안됩니다. 소수를 선택하셔서 아들 딸로 삼아 주셨는데 나를 그 축에 끼워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의 아버지, 왕 되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좋은 자리에, 축복의 자리에, 귀한 자리에 끼워주심을 항상 감사함으로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준비하시는 왕 (4-8)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서 에덴동산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을 위해서 아담을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생각에는 아담을 첫날에 창조하신 후에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공중에 새가 날으라 하시니 각종 새들이 나는 것을 봤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바다에 물고기들이 뛰어라 하시니 물고기들이 바다에서 뛰는 것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후에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시는 것을 하나도 못 보게 하고 가장 마지막에 지으시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왜 그리 하셨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리 하셨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되니까 그리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날에 아담을 만드셨다면 아담이 어디에 발붙이고 살 수 있었겠습니까? 공중에 매달려서 살겠습니까? 바다에 떠서 살겠습니까?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먹고 살 것이 없습니다. 에덴동산에 없는 것 없이 좋은 것으로 갖춘 다음에 아담을 만들어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아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모리아산에 하나님께서 양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제물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삭을 대신해서 제물이 될 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삭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양이 이삭을 대신해서 죽습니다. 이삭을 위하여 양을 준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2천년 전에 보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것뿐입니까? 우리들에게는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정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가정 없이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합니까? 또 태어나기 전에 교회를 먼저 준비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하나도 없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디서 듣고 배우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께서 말도 못하는 나를 업고 교회에 나오니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챙겨주사 교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영원히 살 하늘나라를 이미 오래 전에 준비해두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위해서 전부 챙겨주시고 미리 준비하시고 때가되면 베푸시고 인도해주십니다. 준비하시는 왕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두 번째 장면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초청 받은 백성을 불러오라고 할 때 왕이 뭐라고 말합니까? "아들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온갖 것을 갖추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온갖 것을 준비한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준비하였으나"라고 합니다. 왕이 준비했다면 어느 정도입니까? 최고로 준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시한 것을 주지 않으십니다. 항상 최고로 주십니다. 여러분들에게 남편을 주시는데 여러분들의 남편이 제일 못났습니까? 아닙니다. 남자들 중의 최고의 남자를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내는 여자들 중의 최고를 주신 것입니다. 제가 북한에서 피난을 못나왔다면 제 아내는 아직 결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남쪽에 여자와 모든 것을 준비하고 이곳으로 죽을 고비를 넘겨주면서 인도하셨습니다. 제가 아내를 돈주고 산 것입니까? 공로를 세우고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최고의 아내를 주신 것입니다. 남편도 남자 중에 최고의 남자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고를 준비해 주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발간된 광성지에서 "눈이 하나밖에 없는 엄마"라는 글 보셨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 준비하면서 또 울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살았습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에는 몰랐는데 자라면서 보니까 어머니의 눈이 하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의 어머니는 두 눈을 가지고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예쁜데 반하여 내 어머니는 왜 쪽팔리게 눈이 없냐고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어머니는 번듯한 점포에서 장사하고 있는데 내 어머니는 시장 길거리에서 나물이나 파는 것이 너무 쪽팔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번은 운동회 때 엄마가 아들이 보고 싶어서 찾아갔더니 아들이 왜 왔느냐고 하면서 도망을 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이 네 엄마는 애꾸눈이라고 놀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고학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여자와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엄마에게는 찾아갈 필요도 없었고 엄마 꼴을 안보니 좋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어느 날 저녁때 엄마가 찾아왔습니다. 아기가 울고 있으니까 누가 우리 예쁜 아기를 울리냐고 큰소리하면서 들어왔습니다. 들어갔더니 그 집 아기 엄마, 즉 그 아들의 아내는 이 여자가 도대체 누구냐고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남편이 내 엄마는 죽었다고 했기에 아내는 어머니가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도무지 모르는 여자라고 하며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머니가 눈치가 없습니까? 집을 잘못 찾아 왔나봅니다 라고 얘기한 후에 돌아서서 나가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는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서 아들이 다닌 고등학교의 동창회가 열려서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엄마가 어떻게 사나 한번 들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가보았더니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편지쪽지를 하나 주었는데 이 부분은 광성지에서 빠졌습니다. 편지 내용은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아기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아서 밖에 나가보았더니 네가 버림을 받았더구나. 그래서 내가 너를 그 날로 아들을 삼아서 네가 생일로 지키는 그 날이 네가 버림받은 날이요, 네가 내 아들이 된 날이란다. 네가 조금 더 큰 후에 그만 자동차 사고가 나서 눈이 하나 멀어버린 것을 내 눈을 너에게 이식했단다. 다시는 내가 서울에 찾아가지 않으마. 이번에도 고등학교 동창회라고 해서 너희 학교에 가보고 싶었지만 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가겠다. 그러나 내가 죽거든 절대 울지는 말거라"고 써있었습니다. 아들이 이 사실을 그 전에 몰랐었습니다. 어머니의 눈이 저렇게 된 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엄마라 부르지도 않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안했던 이 아들이 얼마나 어머니를 부르며 사랑한다고 했는지 모릅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나를 낳아준 친부모님은 나를 비록 버렸을지라도 길가에 버림받고 살았을지 죽었을지도 모를 나를 위해 하나님은 친부모님보다 열배나 더 귀하고 훌륭한 어머니를 미리 예비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최고로 준비해 주신 하나님아버지입니다.

  내가 불행하다 싶어도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지나고 보면 하나님은 항상 최고로 준비하시고 때가 되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기회주시는 왕 (9-14)

  부자에게 하루에 몇 시간이 주어집니까? 24시간입니다. 가난하디 가난한 사람에게는 하루에 몇 시간입니까? 역시 24시간입니다. 시간 없는 기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하루에 25시간을 살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서 돈주고 살 수 있습니까? 어디서도 살 수 없습니다. 또 내가 돈이 아쉬워서 내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습니까? 절대 팔 수 없습니다. 돈 가지고 사지도 팔지도 못하는 귀한 시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짜로 주셨습니다. 시간없는 기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세도가 있거나 없거나 똑같이 골고루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아버지이십니다.

  본문의 세 번째 장면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의 꼴을 더이상 보기 싫어서 그 동네에 불을 놓았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 터도장군에 의해서 폐허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주의 종들을, 즉 선교사들을 전 세계로 파송하셔서 이방인들을 초청한 결과 이방인들이 차고 남쳐서 교회마다 만원사례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유대인에게만 주었던 기회를 이방인 누구에게나 골고루 똑같이 시간과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24시간, 부자에게도 24시간, 대통령에게도 24시간, 일반 백성들에게도 24시간으로 똑같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회도 똑같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신 기회를 잘 활용하면 다섯달란트 맡은 종처럼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회를 우리들에게도 약속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미국 콜로라도주에 바바라 하그로프라고 하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이 아가씨는 농사꾼의 딸로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졸업하자마자 농사꾼에게 시집을 가서 자녀 넷을 낳았는데 얼마 후에 남편이 죽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열심히 키웁니다. 미국은 대학교에 가면 스스로 공부합니다. 막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이 여자의 나이가 38세였습니다. 내 인생을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대학교에 들어갑니다. 42세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과 견주는 예일대학 신학부 신대원에 들어가서 3년 후에 졸업했습니다. 대학교 4년, 신대원 3년, 그리고 석사 2년, 박사 5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즉 14년 만에 농촌에서 자녀 넷을 키우며 농사밖에 모르던 여인이 예일대학 신학박사가 되었습니다. 여성신학의 대부가 됩니다. 그리고는 예일대학 신학부에서 12년 동안 교수로 봉직하다가 64세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비석에 무엇이라고 써있는지 아십니까? "겉은 연약했으나 속사람은 강건하였다"고 써있었습니다. 누가 그 여자가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겠습니까? 주신 기회를 썩히지 말고 최선을 다하시면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24시간, 일년에 365일이 똑같이 주어진 시간, 그리고 기회를 가지고 도전하고 삶을 개척해 나가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똑같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때가 위기라고 하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짓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첫째로 우리를 축에 끼워주시는 왕이십니다. 다윗은 왕을 예선할 때 아버지가 자기를 끼워주지 않았으나 하나님이 기어이 불러 끼워주심을 항상 감사했습니다. 소수를 불러 자기의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축에 끼워 주셨습니다. 둘째는 준비해주시는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최고를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때가되면 베풀어주시는 왕이십니다. 왕이 잔치를 최고로 준비하고 불러주시듯 말입니다. 셋째로 기회를 만들어 주시는 왕이십니다. 잔치를 준비한 왕은 네거리에서 누구나 초대하듯 기회를 만들어 주시는 왕처럼 말입니다. 그 기회를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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