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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시대를 알라 (딤후 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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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알라
(딤후3:1-5 )

 
  지금 세계는 태풍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추석때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미국 동부에 허리케인으로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했습니다. 앞으로 크고 작은 태풍이 올 것을 기상청은 예보하고 있습니다.

  태풍의 위력은 정말 폭발적입니다. 직경이 보통 1,000km가 넘어 우리나라 전체를 덮고도 남고 어떤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되는 것도 있습니다. 태풍은 세계대전당시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만배가 넘는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태풍이 뿜어내는 비바람의 강도는 웬만한 화산폭발의 열 배 정도의 위력이 있습니다. 그 엄청난 파괴력으로 태풍이 지나갈 때에는 홍수, 산사태, 해일등 각종 자연재해가 나타납니다. 또한 때론 괴질도 발생해서 가축이나 농작물에 많은 피해를 줍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태풍은 1959년 9월 17일 남해안을 강타한 '사라호'입니다. 추석 아침에 불과 몇시간동안 불어 닥친 태풍으로 희생된 사람만 800명이 넘었습니다. 사라호가 지나간 그날 오후 하늘은 어떤 때보다 청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땅위의 모든 것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폐허, 그 자체였습니다.
이번에 남부지방을 강타한 태풍 매미는 사라호와 많이 닮은 것으로 관측되었습니다. 추석때 왔다는 것이 비슷하고, 이동 경로도 비슷했습니다. 순간 최대풍속도 비슷했고, 규모와 크기도 흡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명손실에 있어서 매미는 사라호에 비하면 훨씬 적었습니다. 비슷한 태풍이었는데 어떻게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옛날에 비해 태풍예보가 정확했기 때문입니다. 사라호때에는 이동경로를 정확히 추적하지 못해 큰 희생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매미는 발생부터 이동경로가 인공위성에 의해 추적되면서 인명손실이 획기적으로 준 것입니다. 기술문명의 덕을 본것입니다. 우리가 태풍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이제 이 시대는 태풍이 움직이는 경로와 과정은 훤히 알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옛날에도 사람들은 천기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분별하지 못한 어리석음도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똑같은 음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지금 태풍의 이동경로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시대에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천기를 분별하면서 시대를 분별할 수 없느냐'고 묻습니다. 날씨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일까요? 본문은 바로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요?

  첫째는 자기사랑의 시대입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세에 관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여기 '말세'라는 말은 넓은 의미에서 주님이 떠나신 후,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살던 1세기가 말세였고, 아직 주님이 재림하지 않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가 바로 말세라는 것입니다.
말세가 어떤 시대인가를 바울은 여기에서 19가지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2절에 먼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문을 열고 있습니다. 그 뒤에 따라오는 많은 현상들은 모두 자기사랑의 다른 표현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자기 사랑의 범주에 속한 것입니다. 자긍, 훼방, 부모거역, 감사치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고,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절제하지 못하고, 사납고, 배반, 조급, 자고 등은 모두 자기사랑에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기 사랑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기주의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제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세상을 지배합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만 잘되면 됩니다.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용합니다. 남을 생각하거나 배려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만 알기에 교만합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자살도 면밀히 보면 자기사랑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삽니다.

  어떤 사회학자는 자기사랑의 시대를 이제는 사람들이 3가지 영어 'D'로 시작되는 것을 기피하는 것으로 강조했습니다. 우선 dirty 한 것, 더러운 것을 멀리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양지가 있으면 반드시 음지가 있습니다. 깨끗한 것이 있으면 더러운 것도 존재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남은 찌꺼기가 있습니다. 화려한 예식앞에 놓인 정갈한 것이 있고 끝난 뒤에 널려진 쓰레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깨끗한 것만 가까이하고, 더러운 것은 손을 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직업도, 일도, 더러운 것은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difficult 한 것, 어렵고 힘든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쉬운 것이 있고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점점 사람들이 어려운 것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농촌에 농사지을 사람이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서 돈을 벌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쉽게 하려고 합니다. 돈도 쉽게 벌려고 하고, 일도 쉽게 하려고 합니다. 셋째는 danger한 것, 위험한 것을 기피한다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자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생명을 해치는 것으로 판단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뛰어 들었지만 이제는 굶어 죽어도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극도의 이기주의, 자기사랑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현대사회입니다.

  둘째는 쾌락사랑입니다. 4절에 바울은 쾌락을 사랑한다는 말을 강조합니다. 19가지의 말세에 대한 여러 가지 현상 가운데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대가 그런 시대입니다. 현대는 단순히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주의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쾌락주의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점점 더 나아지지만 인간 세계는 점점 더 나빠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쾌락만을 추구합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생육과 번성을 위해 본질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때 기독교 역사에서는 그것마저도 멀리하려는 금욕주의가 신앙의 성숙으로 평가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면 욕망을 제어할 수 없기에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은 교회안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주님을 닮아 가느냐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장은 깊은 산속이나 수도원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에 본능의 욕구를 넘어서는 것에 있습니다. 욕심이 그치지 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빠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물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멀리해서도 안되지만 거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쾌락을 사랑하지 않도록 잘 판단하고, 자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의 소욕을 제어해야 하고,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챤으로서 갈데가 있고 가지 말아야 할데가 있습니다. 해야 할것이 있고, 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볼것이 있지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이것을 잘 판단하고 조절하며 사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삶입니다.

  현대 사회가 얼마나 쾌락을 사랑하는지를 어떤 사회학자가 역시 영어 약자 'S'로 시작되는 것을 3가지로 알려 주었습니다. 우선, Sex입니다. 설명이 필요없지만,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현대인들의 성에 대한 개념이 이제는 도덕과 윤리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최근 방송과 영화에서 결혼전의 동거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오직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이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바탕에 쾌락사랑이라는 죄악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법과 제도속에서 자기를 조절하지 않으면 제어할 수 없는 악한 성품이 잠재하기에 아무리 건전해도 그것은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Screen'입니다. 바로 영화입니다. 현대사회에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합니다. 사실 영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좋은 영화들이 많습니다. '벤허'라는 영화는 믿는 사람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기독교의 위대한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영화는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는 매개체이기에 잘 사용하면 사람을 깨우치는 좋은 수단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쾌락사랑의 빌미를 제공하여 현대인을 더욱 어둡게 만듭니다. 요즘 영화는 점점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쪽으로 기울어 갑니다. 성을 다루지 않으면 인기가 없습니다. 폭력과 파괴와 범죄가 빠지면 영화관을 찾지 않습니다. 영화가 사람들에게 본래 목적을 달성하려면 내면을 다루는 깊은 내용들이 나와야 하는데, 요즘은 제목부터 악영향을 줍니다. '바람난 가족' 이것이 제목입니다.
마지막은 'Sport' 입니다. 이것도 영화와 같이 본질적인 면에서는 너무도 좋은 것입니다. 운동만큼 인간 삶에 필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운동이 운동이 아닙니다. 스포츠가 우상인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거기에 빠지면 안됩니다. 혹 그것으로 신앙과 생활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적당히 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야구장, 축구장을 일터보다 더 많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 어떤 목사님은 권투경기를 너무 좋아해서 주일저녁에 라디오를 가지고 강단에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모두가 절제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지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스포츠입니다. 그것으로 예배도 빠지고, 신앙생활에도 차질이 생긴다면 그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쾌락사랑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셋째는 사탄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쾌락을 사랑한다는 것을 단순히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비교하는 것을 유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쾌락사랑은 그냥 쾌락이 아니라 배후에 사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교를 통해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보다 사탄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한국에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세계 곳곳에는 공공연히 사탄주의, 사탄숭배, 소위 'Satanism'이라는 것이 팽배해 있습니다. 사탄주의는 하나님과 기독교를 내놓고 반대하고, 스스로 사탄을 숭배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주의는 현재 미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는 사탄제일교회도 있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사탄이 우리의 구세주며 신'이라고 외치고 특별한 숭배의식을 치룹니다. 염소머리가 들어있는 오각형 별 그림이 그들의 상징입니다. 이들이 행하는 의식을 보면, 오각형별이 그려져 있는 바닥에 동물이나 벌거벗은 여인을 우선 눕힙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피와 오줌, 포도주가 섞인 물, 칼, 검은 두건이 달린 제복, 거꾸로 된 십자가, 성경찢기, 주기도문 거꾸로 읽기등을 사탄숭배의식으로 행합니다. 그리고 의식이 끝난 후에 그들은 광란의 파티를 벌입니다. 물론 이때 난잡한 성적관계가 이루어집니다.

  현재 미국에서 10월 31일을 '할로인데이'라고 부르는데 이 기원이 사탄숭배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 날은 미국도시의 거리가 유령, 마귀, 귀신, 도깨비 괴물 분장을 한 사람으로 넘칩니다. 어린이도 귀신분장을 한채 각 가정의 대문을 두드려 초콜릿, 캔디등을 얻습니다. 매년 일부 사탄적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 초콜릿속에 바늘을 집어넣어 어린이들에게 주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이 먹다가 내장을 찔려 사망했다는 보도가 할로윈데이 다음날이면 TV를 통해 방송됩니다. 오래전부터 미국의 기독인들은 이날을 없애자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모습이요, 사탄의 장난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학자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부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이젠 세상에 더 이상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20세기에 들어설때만 해도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은 있어도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라고 말합니다. 이젠 절대적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를 다 수용합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 심지어는 사탄교까지 인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입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자기사랑, 쾌락사랑, 그리고 사탄사랑이 현대사회의 모습입니다. 이기주의, 쾌락주의, 그리고 사탄주의가 우리 사회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혹 이것이 일시적으로 기쁨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모두 고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알고 사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5절에 말합니다.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요즘 세상은 살기도 힘들지만 몹시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가치관이 흔들리고, 절대적인 진리도 믿지 않고, 끊임없는 유혹이 기다리는 세상입니다. 주님외에 소망이 없습니다. 다시 주님을 굳건하게 붙잡고, 모든 더럽고 악한 것을 멀리하고 돌아서서, 이번 주간도 승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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