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을 보고 우신 예수님 / 눅 19:4-44

  • 잡초 잡초
  • 639
  • 0

첨부 1



  성을 보고 우신 예수님 / 눅 19:4-44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 개역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 개역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우리 예수님께서 울고 계십니다. 보통으로 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대성통곡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십니다. 이 때 예수님의 연세 33세입니다. 한창 청년의 시기입니다. 33세의 청년 예수님이 대성통곡을 하고 계십니다. 그 울음소리가 어떠하였을까요? 옆에서 바라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크고 구성지게 들려 왔을 겁니다. 여성들이 우는 것도 안타깝고 슬퍼 보이지만 다 큰 남자가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도 아니거니와 지켜보는 사람들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을 정도로 가슴 아픈 광경임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수님께서 ‘웃으셨더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웃으신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울으셨다’는 기록은 세군데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요한복음 11장 35절입니다. 베나니 마을에서였습니다. 거기는 나사로라고 하는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가끔 들리셔서 쉬어 가시던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만 가시면 마음 편하게 쉬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집 주인장인 나사로를 가리켜 나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평소 병약한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병약하여 마침내 병약하여 마침내 육체의 한계 앞에 쓰러졌으며 결국 흙속에 묻혀 버리고 마는 인간의 실존 앞에서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둘째는 오늘의 본문입니다.(눅19:41) 한없이 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소리내어 울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눅19:42-44)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나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에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로 우신 것은 골고다 언덕 위에서였습니다.(마27:46-50)
“제 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처형대에서 우셨습니다. 누적된 피로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때문에 예수님은 땀과 눈물과 피로써 범벅이 된 얼굴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소름끼치는 가시나무 면류관은 머리와 이마를 사정없이 찌르고 양손에 박혀진 쇠못은 손바닥의 뼈와 신경을 부숴뜨리고 있습니다. 양발을 겹쳐서 육중한 대못이 박혀졌으니 고통 때문에 몸을 움직일수록 뼈는 더욱 으스러져 갔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였던지 예수님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울면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견딜 수가 없나이다. 이렇게까지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까? 혹시 저를 영영 버리시는 것은 아니신지요? 내 어깨에 지워진 세상의 죄가 너무도 무겁습니다.”

히브리서5:7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예수님의 울부짖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렇다면 우리는 심히 통곡하시고 눈물 흘리시던 예수님의 이 모습들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겠습니까?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패한 인간들이 저질러 놓은 참담한 역사의 현장을 도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역사의 현장이 아무리 모순되고 악취가 만연하였으나 그 현장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병들어서 죽어버린지 여러 날이 되므로 이미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는 나사로의 무덤을 기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공동묘지로 찾아가셨습니다./ 술수와 거짓과 폭력으로 더럽혀진 예루살렘성!

그 곳은 이미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로마제국의 권력이라는 우상과 타협해버린 음란한 도성이었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돌아서도 되는 예수님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저 음란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성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저 성이 장차 겪어야 할 참혹한 재난을 예견하시면서 마음 아파하시고 소리내어 우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성으로 자진하여 들어가사 스스로 체포당하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역사의 현장을 책임지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그리스도인)에게는 역사를 읽고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의 역사를 선지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예리한 눈과 불타는 가슴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사실 선지자들은 결코 낙관적인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비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슬픈 눈과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 시대를 힘겹게 걸어갔습니다. 오늘 우리 조국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조국교회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지나칠 정도로 낙관주의 사조가 온 땅을 덮고 있었습니다. 저 2천년 전, 터키 서남쪽의 부유한 도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극도로 낙관주의 문화에 빠져서 살고 있었습니다.(계3:17)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도시를 주목하시고 계셨습니다.(계3:16)
“네가 끝내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내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경고)입니까?

오늘의 조국은 라오디게아보다 덜 할까요? 결코 아닙니다. 온 나라가 저속한 낙관주의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저속한 웃음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청와대도, 정부도, 여의도 국회도 온통 저급한 웃음이 전염병처럼 유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온 나라를 휘덮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들마저 저급한 세상의 코메디가 아무런 제재 없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과연 웃기만 하면 되는 지상낙원일까요? 몇 년만에 조국을 방문한 사람을 태운 택시기사가 이런 푸념을 늘어놓았답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1/3은 이미 무너져 버렸고, 1/3은 곁으로 부부인 것처럼 살고 있으나 이미 내용적으로는 갈라 서버린 상태이며, 겨우 1/3만 그런 대로 가정이라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말 이 사회가 희망이 없습니다.’ 가정이 무너진다는 것은 부모들이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하여 애착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자식이라는 존재가 정말 그렇게 가볍게 생각해 버릴 수 있는 존재일까요?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는 30년만에 또 다시 이 땅의 젊고 어린 아들들이 전쟁터로 쫓겨가야 할지도 모르는 우울한 징조를 보여주고 계시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최대 1만 명의 어린 아들들이 저 살벌한 과격 이슬람교의 나라인 이라크로 보내져야할 상황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1950년, 이 땅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너무나 많은 어린아이들이 죽어갔습니다. 20년 뒤 1970년 대, 월남전으로 파견된 젊은 청년들 또한 수없이 죽어 갔습니다. 그 부모들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지금 다시 역사는 우리의 아들 을을 전쟁터로 보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들은 울 준비를 하세요.

역사의 현장이 이러한 대도 웃고, 떠들고, 싸우고, 헤어지고, 함부로 살렵니까? 하나님께서 10년 연속 풍년을 주셨으면 감사하고 겸손하고 조심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거늘 쌀을 우습게 보고 천대한 이 민족이 아닙니까? 쌀 막걸리, 쌀 소주, 쌀 짐승사료가 웬 말입니까? 사람 양식하라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하늘의 만나를 술 만들어 먹고, 짐승먹이로 내어버리는 이런 교만이 이 땅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화를 안 내신다면 이상한 일입니다. ‘오냐! 너희들, 쌀이 그렇게 시시해 보인다면 그래 한 번 당해 보거라’하시면서 벼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6,7,8월 3개월 동안 내리 하루걸러 비를 내리시니, 벼들이 속이 차지 않고 쭉정이로 말라갔습니다.

여기다가 무서운 태풍이 불어닥쳐 다 쓸어버립니다. 겨우 일으켜 세워 보았으나 집중호우를 내려 아예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이 땅에 얼마나 실망하셨으면 이 나라의 하늘과 땅과 바다 세 곳 모두를 이렇게 혼을 내시는 것일까요? (단 1년동안, 하늘에서는 중국민항기 추락사고(166명 사망,2월5일 월드컵 한 달전), 태풍 루사(187명 사망, 아시안 게임 한 달전) 대구 지하철 참사(200여 명 사망 대구 유니버시아드) 그리고 이번 추석의 태풍은 한국 역사이래 최대의 충격적인 타격을 가져 옴)

우리는 6.25전쟁의 원인을 이렇게 배웠습니다.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광복)을 얻었음에도 불고하고 이 백성은 정신을 못 차리고 범죄를 일삼았습니다. 정치(정권욕심으로), 사회(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욕심으로) 심지어 교회마저(데모와 싸움과 비방과 무질서와 혼란)으로 날이 새고 날이 저물었습니다. 참으로 가관이었다고 합니다. 혼란의 극치에 더러운 공산주의자들이 무차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2003년 지금의 정치, 사회, 교회 또한 신기하리만큼 50년 전과 흡사합니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행태는 구역질이 납니다, 사회 구석구석마다 이기주의로 칠갑하여 공부하지 않고, 일 하지 않고, 촛불시위, 욕설시위, 폭력시위, 수업거부..... 50년 전과 흡사하게 시위와 시위로 날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끝까지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하는 등불이 되어야 할 교회마저 심히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자기피로 세우신 주님의 교회이거늘 자기 평생 예수님 덕분에 존경과 대우를 과분하게 받았으면서도 타락한 인간의 본능을 내버리지 못하여 아들에게 세습(?)을 강행하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이여, 그 죄와 그로 야기되는 이 땅을 향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어찌 감당하려 합니까? 교인들이 원한다해도 건덕상 사양하는 것이 목회윤리이거늘 교인들이 싫어하는데도 사생결단, 욕심을 이루고야 마니 예레미야, 말라기, 그리고 마태복음 23장을 어떻게 설교할 것입니까? 우리들 또한 공범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와가 범했던 그 실수를 여전히 범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선물과 축복이 지천에 늘려 있음에도(빌3:20, 요1:12, 빌3:8-9, 요14:1-3, 6:68-69, 눅10:42, 시23:1-2) 엉뚱한 곳에 눈을 돌리고, 더러운 음란과 우상을 사모하고 있지 않습니까?(창1-10, 요일-17)

오늘의 이 땅과 역사의 현실이 이렇게 병들고 썩어 가는데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마냥 웃고 히히덕거릴 수 있겠습니까? 10년이나 계속하여 복을 부어주시면서 참고 또 참으시던 하나님께서 정말 화가 나셨습니다. 경고의 사인을 보내시는 것이 벌써 1년 전부터입니다. 이제는 눈을 똑바로 뜨고, 조국과 조국교회를 바라보면서 슬피 울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