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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라(1) / 마 6:9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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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마6 : 9 - 13절
제 목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성도들 중에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지 알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의 제자들도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제자들의 요청을 듣고 그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오늘날 우리들은 [ 주기도문 ]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며, 무엇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아주 짧은 몇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그 속에 포함된 내용은 우리의 신앙생활 전부를 포함하는 놀라운 내용들입니다. 이 기도는 모든 세대, 모든 장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적용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통하여 다시 한번 나의 기도를 점검하며 하나님께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앞에서 성도들이 피해야 할 기도의 두 가지 태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피해야 할 기도의 두 가지 태도는 외식과 중언부언입니다. 진정한 믿음과 신뢰 없이 형식 적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가증하게 생각하십니다. 또한 어떤 교인은 이방인들과 같이 "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그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설득해서 내 요구를 들어달라고 떼를 쓰는 식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주기도문 같이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을 깊이 이해하고, 그 원리를 따라 기도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데 무슨 모범이 필요하냐? 나는 기도를 배운 적이 없어도 기도를 잘한다!"
물론 우리는 기도의 모범이 없어도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는 경우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기도의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포츠를 배우는 사람들은 배우려는 운동의 기초 자세를 익히기 위해서 기본이 되는 동작으로 수없이 반복해서 연습해야 합니다. 모범이 되는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이유는 그 동안 그들이 가져왔던 잘못된 습관과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힘은 들지만 매우 유익하며, 또 꼭 필요합니다

대부분 우리들의 기도의 태도와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주기도문과는 달리,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적으로라도 처음에 주기도문의 모범을 따라 기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어야 합니까?
주기도문의 서문에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시작해야 할 것을 말해줍니다.

주기도의 서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첫 시작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라고 시작하라는 가르침입니까? 아니지요.

이것은 신학자 켈만이 "기도는 기술이 아니고 정신이다" 란 말과 같이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인 것입니다. 어떤 관계에서 기도하느냐? 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자녀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친권적인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라고 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여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란 말의 의미는, 우리는 하늘이라고 하면 땅과 반대되는 개념 보이지 않는 높은 곳에 거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에 하늘이란 개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편재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홀로 코스트의 현장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어 죽을 때 그들이 울부짖으며 던진 질문은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당신은 왜 이런 죄악에도 침묵하고 계십니까? " 였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이 이 수용소를 점령했을 때 이 수용소의 벽에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라는 찬송 가사가 적혀 있고 또 다른 벽 한 쪽에는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아니계신 곳이 없는 초월자 하나님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라는 아버지라는 말은 주보 표지 목회 칼럼에 나와 있듯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압빠(Abba)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너희도 하늘에 계신 압빠라고 기도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자녀들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신뢰에 찬 친밀감을 나타내며 부르는 '아빠'와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매우 인간적인 말로 아버지와 아들이 주고받는 사랑의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드러냅니다

미국 케터키 주 한 시골 마을에 있는 농가에 취학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이 마을에서 학교에 가려면 위험한 산길을 한참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안전한 보호를 약속하고 아들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용기를 내어 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산길 모퉁이에서 큰 곰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소년은 그만 발도 떼지 못하고 주저앉아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커다란 곰이 가까이 와서 칸 발로 짓눌러는 순간에 탕! 하고 총소리가 나면서 곰이 쓰러졌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사냥총을 들고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한번도 등, 하교 길에 아들의 곁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단지 남자답게 커 가는 아들의 모습과, 독립심을 길러주기 위해 단지 숨어서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리차드 포스터의 <기도>란 책 서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용한 압빠 기도는 포괄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흔히 남성과 동일시되는 힘과 강력함을 포함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는 여성과 관련되는 양육과 친밀한 보살핌까지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고합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라는 말은 초월자 이면서도 내재자가 되시는 하나님으로서 주기도문 서론에서 우리에게 주는 기도의 교훈은 기도는 먼저 하늘에 계신 초월자 하나님과 압빠 자녀의 관계 즉 친권적인 관계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주기도문을 세분하여 살펴보면
주기도문은 75개의 헬라어 단어로 되어 있으며 한글로는 50개 단어 149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에는 예수의 구원사역의 의미가 함축적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주기도는 복음서의 요약이며 구원 사역의 모든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부 터틀리안은 [ 주기도움은 복음 전체의 개요, 기도 중의 정수, 기도를 가르치는 기도 ] 라고 하며, 마틴 루터는 "주기도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기도 중의 기도요 모든 기도의 알파벳" 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왓슨은 주기도문을 "십계명은 우리들의 생활의 표본이다. 시도신경은 우리들의 신앙고백의 표본이다. 주기도문은 우리들의 기도의 표본이다"
그렇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들의 기도의 표본입니다. 기도의 모범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문서인 12사도의 가르침인 디다케에도 하루에 세 번 주기도를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기도문이 형식주의로 흐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줄 당시 유대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문에 따라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너희들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점차로 주기도문이 옛날 바리새인들이 습관적으로 암송했던 기도문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천주교인들은 주기도문과 아베마리아를 외우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공로를 쌓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정신과 의사는 가위눌리는 환자에게는 주기도문이 축귀의 효력이 있다고 합니다마는 글쎄요? 우리가 아무리 주기도문을 많이 외운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효력을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그 기도가 옳습니다.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두 번째 부분은 인간의 관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 별로 보면, 먼저 하나님과 관계에서

1)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 나라이 임하옵시며
3)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인간관계에서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5)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렇게 6부분의 기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의 관심을 떠나 있지 않고 인간의 관심은 하나님의 관심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의 일용할 양식, 용서, 악의 시험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되는 일,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과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서인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청원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입니다.
켐벨 몰간은 "기도의 첫째 목적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얻으려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구하는 활동이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청원이기보다는 도리어 찬양에 가깝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기서 이름이란?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은 '여호와'로 7,040회이고, 다음은 '하나님'으로 4,000회, , '여호와 하나님'은 11,040회 가히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름" 은 그 분의 품성을 의미합니다.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신 인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경에 무수히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자칫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혹 성전이나 회당에서 드려지는 제사와 예배에서 부득불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거나 파피루스에 기록하기 위해서는
1) 목욕을 하고
2) 오래 참회 기도 후에
3)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거룩한 옷을 입고 불렀으며
4)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며 침묵으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혹 하나님의 이름을 부러더라도
'아도나이' 즉 주님이라고 불렀지 하나님이라고 부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압빠라고 부르라는 것은 바로 복음의 핵심인 것을 말하며 가히 기도의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경에 보면 존재에 관해서 여호와, 엘로힘, 엘 샤다이, 아도나이, 야웨 쯔바오쓰, 로 계시하셨고 사역에 관련하여 '여호와 이레' - 준비하시는 여호와,  '여호와 라파' - 치료하시는 여호와, '여호와 닛시' - 승리의 깃발이신 여호와,  '여호와 삼마' - 우리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여호와 샬롬' - 평강이 되신 여호와, '아싸 여호와' -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쿤 여호와' - 일을 성취하시는 여호와, '여호와 라하' - 목자되신 여호와, '쩨다카 여호와' - 의로우신 여호와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들은 그 분의 손길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이름들입니다.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이름들을 부를 때 구원이 있고 승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 거룩이란 '카도쉬'라 해서 구별되다 란 말인데 먼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다른 세상 신들과 구별되신 분이란 말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 합니다. 이것은 간청이라기 보다 찬송이요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아무데나 가져다 붙이기를 좋아하는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입니다.

우리는 수년 전 옷로비 사건 때 세 명의 크리스천 그것도 직분자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면서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종교는 가지고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입술에는 하나님 있지만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탄의 궤계에 빠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기도내용은 [나라이 임하옵시며] 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 실현에 있습니다
[ 나라이 임하옵시며 ] 란 간구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서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기뻐하며 이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세 가지 시간적인 영역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1) 과거의 것으로써 마8:11, 눅13:28절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2) 현재의 것으로 눅17:21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는 현재의 사실입니다.
임하는 천국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천국의 은혜를 맛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3) 미래의 것으로 이해되는 장차 들어갈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끝 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삼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지배)"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선하시고 전지 전능하시며 그러면서도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지배하는 인류의 영원한 소망, 바로 그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들어가는 것이 곧 축복입니다. 나라의 3대 요소는 주권, 국민, 영토입니다. 영토가 있고, 국민이 있어도 주권이 남에게 있으면 식민지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 대한민국이듯이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미치는 곳은 어디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가 떨어졌던 풀무불 속, 비록 뜨거워 그들을 던지던 병사들이 타죽는 곳이지만(단3:22),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기에 그들은 살았습니다. 그곳은 느부갓네살의 영토이지만 결코 느부갓네살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세상도 환경도 내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면 천국이 될 것이고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무리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냐? 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가만히 있어면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면 먼저 내가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받아 변화되어야 합니다.
롬14:17절에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의와 평강과 희락이 내 속에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기 위하여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 전도하는 삶을 살려고 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가 넘치고 평강으로 가득 차고 희락(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나의 마음 속에, 가정에, 교회에, 그리고 우리가 활동하는 직장에, 온 세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두 번째 기도제목인 것입니다.


그럼 세 번째 기도 내용은 무엇입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즉 하늘에서 계획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뤄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뜻이란 <델렘마> 란 말로 영어에 Will 즉 의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의 소원을 의미합니다. 마12:50절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 ]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자가 나 하고 관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해하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1) 인간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은 요10:10절에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그리고 요3:17절에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2)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살전4:3절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이것은 천국 잔치에 초대받은 자가 입어야 할 예복인 것입니다.
구별된 삶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복입니다. 구별된 삶 즉 거룩한 삶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나타냅니다.

3) 하나님 나라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 즉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를 부르심입니다.이 하나님 나라는 샬롬의 나라입니다.  샬롬이란 온전하다 전체적이다. 화목 조화 복지라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되면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에이레네> 라는 헬라말을 사용합니다.

<에이레네> 란 말은 라이벌 그룹간에 다툼이나 미움이 사라질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샬롬에다가 에이레네를 집어 넣은 것은
극한적으로 대립해 오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도저히 화해가 불가능한 두 그룹간에 화해에 쓰여졌던 말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화해를 만들어 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1서2:17절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우리에게 부여된 이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기 위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도 이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 결론 >

주기도는 복음서의 요약이며 구원 사역의 모든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들의 기도의 표본이요, 기도의 모범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과 관계가 중요합니다.
먼저 압빠 아버지 즉 친권적인 관계속에 이뤄집니다.
그리고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히며 영광과 감사를 돌려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나라이 임하옵시고 - 내 마음에 그리고 교회와 가정과 사회가 하나님 다스리는 나라로 변해야 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사역과 우리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샬롬이 이뤄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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