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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하늘과 새 땅 / 벧후 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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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새 하늘과 새 땅
성경본문 베드로후서 3:8-13

설교내용  우리가 먼 나라를 비행기로 여행을 해 보면 도착지의 시간을 알려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내가 뉴욕을 가면 비행기 안에서 “현재 뉴욕은 기온이 몇 도, 습도가 몇 도, 현지 시간은 얼마입니다”라고 알려 줍니다. 그것은 여행자들이 목적지 시간에 맞추어 시계를 맞추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맞추고 여행을 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만약 시계를 맞추지 않고 현지에 도착을 하면 혼란이 일어납니다. 여행을 할 때는 그 목적지 시간을 염두에 두고 여행을 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 과거지향적입니다. 지난날의 실패, 고통, 손해본 일, 애석한 일에 집착을 많이 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보는 사람, 오늘만 생각하는 이런 현실주의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우리 인생을 향하여 미래지향적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마지막을 늘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만, 과거만 되돌아보지 말고 우리 인생의 마지막날을 늘 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끝을 보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 인생이 영원히 머물 미래의 그 나라에 시간을 맞추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오늘 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지으신 창조주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은 시간의 통치를 받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24시간 살아야 합니다. 결코 이틀을 살 수 없고 내일을 미리 당겨서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다스립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다스리고, 천년을 하루처럼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인간이 천년을 걸려 이루어 놓은 일도 하나님은 하루만에 다 이루십니다. 우리가 해 놓은 하루의 일도 하나님은 천년동안 연기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고 시간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맞추어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맞추어서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시간을 그렇게 다루시는가? 그것은 전부 구원역사에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쓰시는가?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길이 길이 참으십니다. 왜 참습니까?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루를 천년같이 참으신다고 했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믿고 회개하는 것,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일, 복음의 구원역사,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다스리는 분입니다.

  인간의 죄악을 보면 역사는 하루만에 끝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본다면 역사는 벌써 끝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길이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을 시대를 탔고, 예수 믿을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면 우리 조상 적부터 벌써 멸망을 받고 말았을 것입니다.

  구속사의 기다림

  하나님의 기다림은 구원의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참지 않습니다. 본문 10절에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이지만 언젠가 한번 이 땅에 도적같이 오십니다. 예고 없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하나님이 그 날에 오신다는 역사의 징조, 부름, 예언, 이 말씀을 새기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 앞에 현실적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도적같이 오기 때문에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날을 약속하고 그날을 예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징조로 보여 줍니다. 우리 가운데 계속 회개를 촉구합니다. 믿고 회개하라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구촌은 이상기후 때문에 큰 재난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풍 매미를 만났지만 이것은 예년의 태풍하고 전혀 다른 형태였습니다. 예년의 태풍은 점점 세력이 약화되어 육지에 상륙하면 힘이 약해져서 빠져나가는 보통 태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태풍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육지에 상륙해서도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 힘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전문가들 이야기는 이상기후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지금 바닷물이 굉장히 기온이 높다고 합니다. 땅도 기온이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온이 높으면 태풍의 세력이 더 강해져서 비도 더 많이 옵니다.

  지구촌에서 1년에 5도 이상의 지진이 1,400회 일어난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는 은총 받은 땅입니다. 5도 이상의 지진이 한번도 안 일어납니다. 만약 5도 이상의 지진이 우리 나라에 일어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5도 이상되는 지진이 일어나는 나라는 6도, 7도 지진도 납니다. 고도 지진이 6.5도에서 7.5도입니다. 6.5도만 되어도 교각이 무너지고 고속도로가 다 파괴되고 건물이 파괴됩니다. 만약 우리 나라에 6.5도 지진이 일어나면 고층아파트가 견디겠습니까? 지진을 대비해서 건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 무너질 것입니다.

  이번 태풍이 한반도를 흔들고 갔는데 하나님은 한 번씩 이 땅을 흔듭니다. 지진으로, 태풍으로, 전쟁으로 흔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땅을 흔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인간들의 영혼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태풍정도로 심판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늘이 떠나가고 체질이 녹아진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 보이는 모든 만상들이, 이 산들과 바다와 땅이 전부 녹아져 버린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지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 태풍은 국가적인 재난이라고 봅니다. 비, 바람, 해일, 이 삼박자가 맞아서 엄청난 재난을 가져왔습니다. 아마 수 조원 피해가 될 것입니다. 바다의 피해가 많습니다. 남해안 양식장이 다 망가졌습니다. 크고 작은 배가 수 만척이 파손되었습니다. 공장의 피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중소기업 기계들이 물에 잠겼습니다. 공장 침수가 극심합니다. 해안에 있는 도시가 망가진 것은 상상을 불허합니다. 저는 이번에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만약 이번 태풍이 부산이 아니라 서울을 강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도시일수록 피해가 많습니다. 무너질 가로수, 전봇대, 가로등, 축대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무너뜨리면 속수무책입니다.

  그 날을 사모하라

  인간은 끊임없이 지상천국을 꿈꿉니다. 암이 정복되는 나라, 끝없는 기술개발, 문명개발을 하고 사람들은 온갖 예술을 창작하고 이 땅에 지상천국을 세우려고 몸부림치지만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하나님 심판 앞에 전부 녹아지고, 풀어지고, 모두가 불타 없어질 것인데 인간들은 여기에 지상천국을 건설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의 예수님의 말세교훈에서 이런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재난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당장 이 역사를 종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분의 심판은 오늘도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이 죄인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멈추어 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루를 천년같이 다스리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심판이 오늘도 연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경고를 줍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여기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님, 내일이라도 돈벌이 할 설교를 해 주세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는 막연한 설교 말고 손에 잡히는 설교를 해 주세요. 내 현실 보기도 벅찬데 무슨 새 하늘과 새 땅을 봅니까?”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런 반항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런 말씀은 교회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귀에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이 극장에 가서 영화 100편을 봐도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라는 메시지는 한마디도 없을 것입니다. 막연한 이야기입니까? 뜬구름 잡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생명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 이 말은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언젠가는 옵니다. 도적같이 옵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그 심판날인 것 처럼 깨어 살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서는 내 생애 마지막 날로 인식하고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추석에 고향 가는 사람들은 평상시처럼 그렇게 가지 않습니다. 차림도 하고, 선물이나 용돈을 준비해서 고향 가는 기쁨을 안고 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내가 오늘 주님 앞에 서는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졸 수 없습니다. 무책임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오늘 주님을 뵙는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믿을 때에 우리는 깰 수 있고 정신차릴 수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 새 하늘과 새 땅은 먼 나라가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미래의 나라만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우리 안에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갈 기업으로 받을 하늘 나라의 그 영광은 오늘 우리 가운데 이미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백성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늘나라 시민이기 때문에 오늘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시간과 질서와 그 나라의 영광을 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추상화에서 구체화로

  돼지는 마지막에 가야 주인 앞에 소득을 줍니다. 돼지사육을 하는 사람들은 돼지를 팔 때까지 전혀 수입이 없습니다. 계속 먹이고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나 젖소는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젖을 내어 주인에게 소득을 줍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은 돼지처럼 하면 안됩니다. “목사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내가 왕창 벌어서 한번 결정적으로 충성할 테니까 조금만 참아 주세요.” 그런 부질없는 결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매일매일 우리 주님께 돌릴 영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매일매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주님 앞에 마지막 날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 때 보니 우리 나라 자동차 문화가 굉장합니다. 고속도로, 국도마다 자동차가 다 깔려 있습니다. 어마 어마합니다. 우리가 지금 좋은 차를 타며 살고 있는데 좋은 차를 탔다고 행복감을 가지고 차를 탑니까? 요즘 차 타는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질적이며 차 타면서 그 기분을 모릅니다. 차 탈 때마다 기뻐해야 합니다.

  IT기술이 온 세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신용카드가 얼마나 편리합니까? 현금인출, 대출 등은 IT산업의 부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신용카드를 사용했습니까? 10년 전만 해도 카드없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카드 한 장 없는 사람이 전부 서너 장씩 다 가지고 삽니다. 북한은 300만명이 굶어 죽어가고, 남한은 330만명이 신용불량자가 되어 목이 졸려 죽어갑니다. 왜 신용불량자가 되었습니까? 쌀 사고, 보리쌀을 사기 위해서 카드를 사용했습니까? 다 사치하고 과소비하고 남 앞에 과시하려고 사용했습니다.

  IT산업은 순기능도 많지만 역기능도 많습니다. 우린 지금 카드를 다스릴 줄 모릅니다. 승용차를 탈 자격이 없습니다. 자동차 에티켓이 없습니다. 차를 타면서 불친절하고, 접촉사고 나면 모두 폭탄으로 변합니다.
  이번 유니버시아드대회 때 북한의 선수단, 기자단, 응원단이 왔는데 아무리 봐도 비만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북한 땅에는 먹고 살찔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북한은 인민대회를 했습니다. 그 인민대회당에 모인 수 천명의 대의원들이 일어선 모습을 보니 한 사람도 비만에 걸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 국회의원들 한번 보십시오. 학생들 보십시오. 우린 지금 먹는 것마다 비만에 걸립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병폐가 있습니다. 신앙을 관념화 혹은 추상화합니다. 오늘 우리는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 찬송의 가사 속에 어마어마한 내용이 있습니다. 믿음, 사랑, 거룩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노래하고, 예수님을 노래했습니다. 기도할 때 하는 말들이 얼마나 좋은 말들입니까? 설교도 얼마나 좋은 말들입니까? 그렇게 우리 입으로 영원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믿음을 노래하는데 그렇게 고백하면서도 사랑이 관념화되어 버리고, 믿음이 추상화 되어버리는 모습 아닙니까?

  미술의 장르 중에 추상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추상화 그림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그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추상화에는 종이 밖에 없었습니다. 추상화 그림의 제목은 ‘빵과 아이’였습니다. 아무리 봐도 빵도 없고 아이도 없는데 제목이 빵과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설명을 부탁했습니다. “선생님, 이 그림의 제목이 빵과 아이인데 빵이 어디 있습니까?” “예, 아이들이 먹어 버렸기 때문에 빵이 없습니다” “그럼 아이는 어디 있습니까?” “빵 먹고 밖에 나가 놀았지요. 그러니까 아이도 없지요.” 그 백지 그림을 보고, 밑의 제목만 가지고 ‘아, 빵은 먹었으니까 없고, 아이는 빵 먹고 밖에 나가 없구나’라고 감상하는 것이 추상화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 신앙생활도 이럴 수 있습니다. 주일날은 우리가 다 노래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과연 오늘 내가 고백했던 그 사랑이 보여졌는가? 그 거룩이 내 삶 속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히브리서 11장 1-2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실상은 보이는 것입니다. 증거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백했던 이 신앙고백은 추상화되면 안됩니다. 관념화되면 안됩니다. 머리 속에 인식하고 가슴에 느끼고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이면서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의 열매가 보여져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만 그 열매가 가능한 줄 믿습니다. 땅만 본다고, 사람만 본다고, 현실만 본다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보여지는 그림이 있어야 합니다. 실상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증거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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