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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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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일시 :  2003년 9월 28일 주일설교 원고
본문 : 마태복음 5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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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얼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씀은 역설 중에 역설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어렵고 힘든 해석을 해야 합니다. 저도 늘 기뻐하라고 설교합니다. 늘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슬퍼하라는 말씀을 해야 합니다. 좀 이상하시지요. 그러나 저의 설교를 끝까지 잘 들어 주시면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의 쉬운 뜻은 이렇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행복합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세상은 즐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퍼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표준을 부정하십니다. 세상 사람은 정말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그 당시에 그들은 너무 힘들게 살았습니다. 가난했습니다. 늘 슬픔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배고프고 덥고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나라도 빼앗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가난에 익숙한 사람처럼, 슬픔에 익숙한 사람처럼 슬퍼하라 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슬픔을 축복이라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기자는 이런 말을 옮깁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눅6장21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종류의 슬픔을 말씀 하신 것인지를 우리는 자세히 상고 해 보십시다.

I. 자신의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것을 말 합니다

이 세상에 정말 뻔뻔스러운 사람이 많습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은 사람을 찾아서 세금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억 원의 세금을 내지 않고 고급 집에 삽니다. 고급 승용차를 몇 대나 가지고 있습니다. 혹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너무 뻔뻔스럽게 공무원에게 대듭니다. 도로 고함을 지릅니다. 무슨 백이 있다고 보자 너를 혼 내 준다고 야단치는 사람이 있습디다. 이런 사람은 양심이 없는 것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뉘우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모르는 철면피한 사람입니다. 정말 이런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잘못을 금방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잘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누구도 죄가 없다면 거짓말 하는 사람입니다. 애통이란 빈궁한 인간이 성품을 증오합니다. 미워합니다. 고통과 슬픔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이 본능적으로 움츠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쾌적하고 즐거운 사회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 본문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당연히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달콤하게 들립니다. 만일 그들이 복 있는 자라면 어찌하여 애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세상의 논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 세상은 부자, 명랑한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놓고도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어떤 슬픔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통은 가족을 죽음이나 사업의 실패나 그런 것과는 다릅니다. 여기서의 애통은 영적인 애통입니다. 앞 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재산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음의 가난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늘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를 미루면 쌓이고 쌓여 큰 일이 일어납니다. 위험합니다. 우리는 영적 파산자였습니다. 오늘 날 라오디게아주의( Laodiceanism)가 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도다”하는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여기서도 영적인 슬픔입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는 울음이 점점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저는 종종 목회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저를 두고 목회를 잘하느니 하는데 자신은 늘 하나님께 죄송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죄를 무섭게 나무라는 설교가 없지요. 이게 나는 하나님에게나 교인에게 죄송한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뉘우쳐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옛날은 교회 옆에는 집값이 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이 너무 많이 울어서 재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런 것 찾기가 어렵습니다.

죄를 회개하라는 설교도 회개하는 눈물도 말라 버렸습니다. 이게 비극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죄인인 것은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에 대하여 결코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어떤 여인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눅7:38). 누가 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를 보십시요. 그는 집에 오면서 아버지에게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눅15;18)고 했습니다.

오늘날 어디에 이런 회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주일을 범해도 너무 떳떳합니다. 기도를 안 해도 아무른 아픔이 없습니다. 십일조를 안 내도 양심의 아픔을 모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리를 보세요. 그는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3000명이 “마음에 찔려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행2:37).

애통하면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예전에 베드로의 설교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다 우리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게 바른 회개입니다. 그러나 애통은 결코 최초의 뉘우침과 회개를 체험하는 것으로 제한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 동사의 시제를 주목해 봅시다. ‘애통하였던’이 아닙니다. ‘애통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애통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슬퍼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다. 무슨 설교를 들어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늘 하나님 중심입니다. 늘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은 늘 자기의 죄를 생각하면서 웁니다. 이런 울음은 사람을 살리는 울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람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이런 사람에게 주십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이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부르는 찬송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날마다 감사 합니다. 날마다 회개 합니다. 회개에는 눈물이 납니다. 눈물 없는 회개는 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II. 하나님의위로가 있습니다

저희가 위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위로가 따릅니다. 이 세상은 정마 상처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 하면 하나님은 위로를 주십니다. 그 위로는 세상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늘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삽니다. 그 위로가 바로 구원의 소망입니다. 이 보다 더 귀한 위로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사실은 우리가 늘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슬픔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유독 죄에 대해서는 회개의 슬픔을 경헙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며 삽니다. 이 위로자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것입니다. 늘 자기가 사랑 받는 자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하나님의 위로를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공짜입니다. 이런 것을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개끗게 하실 것이요”(요일1:9)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애통하는 자는 “후에 그러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11)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행한 것은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그런데 징계는 짧고 하나님의 위로는 깁니다. 위로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위로입니다. 그 때는 슬픔과 한숨이 사라질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네 집에서 구걸하는 저는 여기에서 위로를 받는다”(눅16:25)고 했습니다. 가장 좋은 포도주는 제일 나중에 나오는 법입니다. 천국의 위로가 지상에서 애통하는 자에게 가장 큰 보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많이 울어야 합니다. 죄를 통곡해야 합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아니하면 그는 죽은 영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돌아봅니다. 때 묻은 것을 씻어 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자녀입니다. 요즈음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개혁이 요즈음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도덕, 전반의 유행어입니다. 그런데 개혁이 무엇입니까? 새롭게 바꾸자는 것이지요. 더 쉽게 새로워지자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로워 질려면 우리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잘못을 토해야 합니다. 그게 개혁이고 새로움입니다. 틀만 바꾸자고 하는 것은 개혁이 아닙니다.


맺는 말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교회는 회개로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옵니다. 그들이 맨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조상의 잘못으로 70년 종살이 했습니다. ‘하나님 이러한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면서 수문 앞 광장에서 회개했습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읽을 때 ‘아멘 아멘’ 했습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이스라엘 재건의 기초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덮어주는 것만 아닙니다. 수술입니다. 아픔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습니다. 회개는 미루면 안 됩니다.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중한 환자는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회개해야 삽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 늘 이 말씀과 함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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