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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차든지 덥든지 (계 3: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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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차든지 덥든지
본문 : 요한계시록3:14-20
일자 :  2003. 9. 28(주일낮)

(계3:14-20)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미국의 과학자 <라이올 왓슨>이 '백 마리째 원숭이 현상'이라고 이름 붙인 학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행위를 하는 개체의 수가 일정량에 달하면 그 행동은 그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고 공간을 넘어 확산되어 가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학설은 1994년에 인정되었습니다. 많은 동물학자와 심리학자가 여러가지 실험을 한 결과, 이것은 원숭이뿐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나 조류, 곤충류 등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950년 일본의 미야자키현 고지마라는 무인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과학자들이 원숭이 20여 마리 살고 있는 곳에서 먹이인 고구마를 주면서 모래밭에 던져 주었습니다. 원숭이들은 처음에는 고구마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어 내고 먹었는데, 어느 날 한 살 반짜리 젊은 원숭이 한 마리가 강물에 고구마를 씻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원숭이들이 하나, 둘 흉내내기 시작했으며, '씻어 먹는 행위'가 새로운 행동 양식으로 정착해 갔습니다. 고구마 씻기를 하는 원숭이 수가 어느 정도까지 늘어나자, 이번에는 고지마섬 이외 지역의 원숭이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행위가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불가사의하게도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다카자키산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 서식하는 원숭이들도 역시 고구마를 씻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서로가 전혀 접촉이 없고,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치 신호를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정보가 흘러간 것입니다.

<백마리째 원숭이 형상>이라는 학설에 의해 지혜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이나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람들의 수고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략 10% 되는 사람의 진실된 노력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세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지혜가 부족할 때 지혜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란 무엇을 말합니까? 야고보서에서 8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


(약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열매, 편벽이 없는 것, 거짓이 없는 것)

1. 지혜를 간구하는 우리들에게는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합니다.

영국에 파라데이라는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신문배달을 하며 학비를 조달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어느 부잣집에 가니 신문함이 문안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문의 구멍을 통해 상체를 집어넣고 신문을 신문함에 꽂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체를 안으로 집어넣고 신문을 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집 안에 있는 것인가, 집 밖에 있는 것인가?" 골몰히 생각하다가 다른 사람이 오는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그 사람도 파라데이가 끼어 있는 것을 모르고 문을 확 열었습니다. 그 바람에 파라데이의 목이 부러질 뻔했습니다. 파라데이가 혼이 나 목을 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상태가 문안에 있는 것인지 문 밖에 있는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게 된 것은 그러한 상태는 목이 부러지기 딱 알맞은 상태라는 사실이다." 그렇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 어중간한 상태는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라오디게아 (LAODICEA),파묵깔레의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는 파묵깔레의 히에라볼리 온천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수로를 통해 끌어와서 씁니다. 거리는 약 6.5Km 정도, 15리 정도를 흘러가기 때문에 거의 식어지는 상태로 라오디게아에 도착합니다. 당시 "히에라볼리"에는 더운물과 찬물이 나왔는데, 나오는 물 중에 찬물은 식수로 사용했습니다. 찬물이 라오 디게아 까지 운반이 될 때에 미지근한 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은 식수로 부적합한 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히에라볼리의 온천수가 6.5KM의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올때는 뜨거운 물도 미지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에라볼리의 물이 차가우면 식수로 사용될 수 있고, 뜨거우면 온천수로 사용되지만 미지근하면 아무런 곳에서도 사용을 못합니다. 그러기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뜨겁든지 차겁든지하라>고 한 것입니다.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물이 되면 이 물은 마실 수도, 목욕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사랑, 미지근한 환영, 미지근한 교제, 미지근한 도움, 미지근한 기도, 미지근한 봉사, 미지근한 전도, 미지근한 헌금, 미지근한 은혜생활은 주님이 가장 싫어하십니다.

병균은 뜨거운 음식에서나, 얼음같이 찬 음식에서는 번식을 못하고 뜨뜻미지근한데서 가장 잘 번식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미지근한 상태에 있을 때 온갖 유혹이 틈타고 불평하게 되며 마귀가 역사 하는 법입니다.

본문에 보니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활이 편안하고 안정되다보니 신앙생활에 생동감이 없었습니다. 뜨뜻미지근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이렇게 변질 되어가는 것은 아닙니까?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열심을 내는 것도 아니고 안 내는 것도 아니고, 헌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지 않는 것 도 아니고, 중간상태에 있는 어정쩡한 모습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나에게 12명의 진지한 신앙인을 달라. 그리고 나를 어느 지역이든지 내려놓아라.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즐거이 노래 부를 것이다. 마음에 열정이 없는, 관심이 없는 여러분 전체를 나에게 주어본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며 도전을 했습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열정이 있는 사람까지 싸늘하게 만드는 방해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과 복음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열심히 노력하고 연구하는 사람만이 승리하는 법입니다. 최고경영자(CEO)들은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비전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열심을 증폭시켜 나가시기 바랍니다. 열심의 불꽃이 성령 안에서 여러분들의 가슴에 활활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항상 불이 있어야 합니다. 가슴에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교회는 출석하고 있지만 냉냉한 자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복음에 대해 감격하지 않습니다. 모임에 열심도 내지 않습니다. 울면서 부르짖지도 않습니다. 전도에 열심도 없습니다. 주님이 생활 속에 개입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지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진지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하고 결단력이 없고 대충 대충 믿고 삽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치 환자가 병을 고치기 위하여 병원엔 열심히 들락거리고 있지만 병을 고칠 마음이 없는 상태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오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향상됩니다. 열심을 가진 성도가 될 때 신앙의 불이 붙어 죄악과 정욕을 이기고 마귀 권세를 이기게 됩니다. 열심이 없이는 영적 세계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이 있어야 삽니다.

2.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계3:17-19)“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모든 사람들이 부자라 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나 그들의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과 같은 모양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에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가 있으며, 회개할 때 비로소 얼굴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할 때에 병도 치료받을 수가 있습니다. 회개할 때 환한 얼굴 온전한 인격을 다시 세우게 됩니다.

탈무드에 보면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마음 가벼운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마음 무거운 일은 없습니다. 회개가 있었기에 기독교가 있었고, 회개가 있었기에 교회가 있었고, 회개가 있었기에 부흥이 있었고, 회개가 있었기에 희망이 있었고, 회개가 있었기에 기쁨과 행복이 있었고, 회개가 있었기에 천국이 있었습니다.

3.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 교회를 갑니다. 오늘도 같이 교회를 갑니다. 그 교회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에 그림이 한 장 걸려 있습니다. 그 그림은 여러분들도 자주 보시는 그림인데 예수님이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모습으로 서있는 <홀만 헌트>의 그림입니다. 하루는 어린 아들이 아버지한테 묻습니다. "아버지, 저 그림은 무슨 내용 이예요?" 아버지는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는 그림이지" "그래요. 그런데 왜 문이 안 열려요?" 아버지는 무심코 대답했습니다. "저것은 그림이란다. 그림이니까 안 열리지" 그런데 아들이 말합니다. "틀렸어요. 아빠, 집안이 너무 시끄럽기 때문에 예수님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들어서 문을 못 여는 것 이예요"

여러분 가정이 시끄럽습니까? 그렇다면 은혜의 소리가 안 들립니다. 부부간에 시끄럽습니까? 사랑의 소리가 안 들립니다. 교회가 시끄럽습니까? 은혜의 소리가 안 들립니다. 내 영혼이 시끄럽습니까? 주님의 음성이 들릴 리가 없습니다. 시끄러우면 은혜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모습을 보니 전부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해도 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 생각이나 예수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예수님은 '문을 열어라, 열면 내가 들어가서 너와 교제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생명, 엄청난 축복을 너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열심 있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님과 함께 동거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채우시고 우리의 영혼을 복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평안케 하십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차갑든지 뜨겁든지 하라”

순도를 높이라는 말씀입니다.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변질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수록 더욱 성결되고 갈수록 더욱 성도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함속에 여러 성도들이 더욱 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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