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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시 107: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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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큰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시107: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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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약>

시편 기자가 바라본 태풍은 폭풍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깊은 곳으로 내리치는 광풍이었습니다.
선착을 바다에 띄우고 큰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이 놀라운 관경을 보게 된다고 오늘 본문은 담담하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1. 무서운 광풍을 보게 됩니다(25-27). 
  엄청난 위험으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녹을 정도였습니다.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합니다.
  큰물에 사는 자는 이 시대의 어지러움과 혼돈을 바라봅니다.

2. 근심 중에 기도하되, 응답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저희가 근심 중에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도다(28-29).
  역사적으로도 큰물에 사는 자들을 다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3. 폭풍의 결과를 압니다. 그래서 찬송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평온함으로 폭풍보다 더 큰 기쁨이 넘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십니다(3-절).
  그의 인자하심과 그 행하신 일로 인하여 찬송합니다.

뜨거운 물의 아는 강아지는 솥뚜껑만 열어도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로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임을 압니다.
큰물에서 영업하는 오늘의 성도들은 세상너머를 바라봅니다.
폭풍과 혼돈과 흑암 중에서도 찬송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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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세상입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인간으로서 한계를 느낍니다.
기도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신 그 말씀이 바로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좀 멀리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큰 은혜를 사모함으로
더 놀라운 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의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시107편에 나타난 시편 기자의 눈은 태풍을 바라보면서도
그 태풍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어지러운 세상
죄악으로 범벅이 되어 버린 어두운 세상을 바라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눈이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고 체휼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복된 눈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태풍 매미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야 할 것 같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손실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야 할 것 같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발표 통계를 보면
1년간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무려 31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독극물에 의한 사망자 수가 31만 5천 명,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의 수가 45만 명입니다.
여러분 가장 많은 수가 교통사고로 죽는 데 1년에 126만 명입니다.
여러분 보다 더 많은 죄를 짓고 사는 손윤탁입니다만 여러분! 부탁드립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23절, 24절 말씀을 다 같이 읽습니다.
“바다에 선척을 띄우며 큰물에 영업하는 자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인생은 바다와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고통과 고난의 바다라고 해서 “고해”(苦海)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큰물에 영업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인생의 바다에서 여호와의 행사와 기사를 보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편 기자가 바라본 태풍은 폭풍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깊은 곳으로 내리치는 광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관경을 보면서도 담담하게 노래하는 시편의 기자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우리들도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이 인생의 바다에서 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사실 가장 먼저 바라보아야 할 것은 현실입니다.
  <무서운 광풍>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25절로부터 2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라갔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 도다.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어떻습니까?
읽기만 해도 어지럽습니다.
청룡열차 타보셨습니까?
하늘로 올라갔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엄청난 위험으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녹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니 취한 자같이 비틀거립니다.
지각이 혼돈합니다.

큰물에 사는 성도 여러분!
먼저 이 시대의 어지러움과 혼돈을 바라볼 줄 아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전도폭발 훈련을 하다보면 전도 대상자에게 가장 먼저 알게 하는 것이
당신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고통과 아픔을 아는 사람들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 제게 이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져는 스스럼없이 대답합니다.
죄의 고통입니다.
제가 참 바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난 한 주일은 아마 대구에 내려온 후에는 제일 한가하게 보낸 것 같습니다.
서울에도 안 갔습니다.
장신대에는 학생들이 수해지구 복구 작업을 위하여 강의가 없었고
구역예배도 연합구역예배라 원고가 쓸 일이 없었고,
권사님들의 성경교재는 이전에 써 놓은 것을 이용했습니다.
아마 전도 두 번 나간 것 외에는 우리 목사님들이 모두 수고하셨지
지난주에는 그렇게 어려운 환자들이 많은 데 제가 한 심방은 한 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절뚝거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너무너무 아파서 울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목요일 저녁 6시에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불효막심한 죄가 커서 울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지금 기도가 필요한 환자분들이 많습니다.
제 스스로의 무능함과 죄로 인해 치유도 없고 능력도 부족하기에 울었습니다.
집사람은 사택에 자게하고 저는 3일 밤을 울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말씀드립니다.
제일 아픈 게 뭐냐?
몸 아픈 것은 아무리 길어도 이 세상에서 끝납니다.
배고픈 것도 결국 무얼 먹으면 끝이 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시면 죄의 고통은 영원한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저처럼 어리석게도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큰일납니다.
엄청난 게 아픈 것입니다
일부러 죄 짓지 마십시오.
그러나 죄에 대한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이리 구르며 저리 구르고 취한 자와 같이 혼돈한 죄의 실체!
그래서 한경직 목사님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것이 이상한 게 아니고
내가 목사라는 사실이 더 이상하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교 노벨상인 텀블턴상 수상식에서 과거를 회개한다고 하셨을 것입니다.

모세는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손윤탁이도 너무 너무 지은 죄가 많아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교도소 죄수들 앞에서도 저는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시궁창 물에도 푸른 하늘은 비칩니다.
  쓰레기장에도 장미꽃은 피어납니다.
  아론의 메마른 지팡이에도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듯이 우리 주님은 죄인을 위하여 오셨다고 했습니다.
고난을 봅니다.
고통을 봅니다.
큰물에 사는 자는 자신의 문제를 아파합니다.
세상의 파고를 바라봅니다.
이 세대의 어두움에 고통 합니다.

2. 그러나 광풍을 바라보고 무서워하는 자는 큰물에서 영업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근심 중에 부르짖습니다. 기도합니다.
  응답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28절과 29절입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을 잔잔케 하시는 도다.”

바라보고
아파하고
고통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
모든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큰물에 사는 자들을 다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사실을 바르게 바라보고
배후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사실 새로운 방법도 나오게 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앞에는 홍해바다였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의 추적이 계속됩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그때에 모세의 눈은 하늘을 향합니다.
지팡이가 바다위로 내려졌습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진 것입니다.

런던 항구에서 청어를 파는 어부들은 너무 억울했습니다.
북해도에서 잡아오는 청어가 런던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 다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얻는 수익은 불만족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바로 청어와 함께 청어를 먹는 메기를 배 밑창 수족관에 넣습니다.
청어들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청어를 죽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방해꾼들을 두려워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그들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부르짖게 되고
그래서 여러분들은 살게 됩니다.

죄로 인하여 고통스럽습니까?
불로 태울 수도 없고 물로 씻을 수도 없는 죄로 인하여 슬퍼하실 때
여러분들은 주님의 더욱 크신 은혜를 깨닫습니다.
양의 무리를 깨우는 것은 염소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곳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3. 큰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폭풍의 결과를 압니다.
그래서 찬송하는 것입니다.
 
30절에서 32절을 읽습니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찌로다.”

이제 주님 주시는 평온함으로 폭풍보다 더 큰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 주시는 은혜로 고통보다 더 큰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 어떤 것으로도 비길 수 없는 큰 힘으로 차고 넘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들의 간구를 들어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의 인자하심과
그 행하신 일로 인하여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큰물에 영업하는 사람들은 감사의 사람들입니다.
찬송의 사람들입니다.
기쁨의 사람들입니다.

뜨거운 물의 맛을 아는 강아지는 솥뚜껑만 열어도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로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임을 압니다.

이제 우리의 눈을 돌립시다.
큰물에서 영업하는 오늘의 성도들은 세상너머를 바라봅니다.
폭풍과 혼돈과 흑암 중에서도
찬송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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