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6~19)

  • 잡초 잡초
  • 285
  • 0

첨부 1



제목 :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본문 : 하박국 3:16~19


  하박국 선지자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철학적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철학적 대답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박국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처음에는 철학적 질문을 하고 마지막에는 신앙적 답변을 얻어내는 순서로 되어있는 성경입니다. 이 하박국 성경을  잘 읽어보면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늘 가지고 있는 신앙의 삶의 의문점을 하박국 선지자가 대신해서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대리만족을 주는 말씀이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의문을 하나님께 질문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의 생활 스타일은 축복관이 율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축복관이란 신명기적 축복 개념을 말하는 것인데,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 가나안에 살 때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라!" 주신 신앙적 민법이 신명기 성경이 됩니다.

  그 신명기 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가? 간단합니다. 이 신명기 전체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원하는 윤택한 번영을 아주 확실하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버리면 벌을 받아서 세상에서도 아주 망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의 화려한 약속은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즐거움을 줍니다. 복 받는 얘기가 계속 되기 때문입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또, "네 대적이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이런 약속을 하고 있고,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셔서 너는 꾸어줄지라도 꾸지 아니할 것이요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너는 오직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행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든지 좋은 성경 구절이 줄줄이 나와있습니다.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세계 만민이 너희가 내 백성인줄 알리라."

  그런데 하박국의 시대는 어떤 형편인가? 신명기에 약속한 축복관의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쳐들어오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해주신다더니" 하박국 1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유대인을 침략하도록 하나님이 시키고 있음이 나타납니다. 5절∼6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점령하리라" 당시 갈대아 사람이란 무서운 침략자 민족을 가르칩니다. 그런가하면 유대 나라의 사회상이란 착하게 사는 사람은 가장 못사는 사회 풍토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철학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신명기적 신앙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가는 백성이 무엇 때문에 갈대아 사람의 침략을 받아야 하고 나쁜 짓 안하고 죄 없이 살고자 하는 사람이 왜 이 사회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1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이렇게 말합니다. 합리적 질문을 하는 철학의 아버지, 의인의 대변자 하박국의 질문을 쉽게 풀이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따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지키지 아니하십니까? 하나님도 거짓말하십니까? 설사 우리 히브리 민족이 잘못이 있다 합시다.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침략자로 사는 갈대아 사람보다는 의롭습니다. 그런데 어찌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이렇게 살육하고 빼앗기고 침략 당하고 재
앙을 만나고 먹을 것도 없고 왜 이렇게 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모순입니다. 갈대아 사람의 우리 민족 파멸은 하나님의 실수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하십니까? 이럴 수 있단 말이요?" 하나님을 향해서 합리적 철학적 질문으로 조금은 대드는 말씀이 됩니다.

  저는 첫 번 목회를 평안도 사람들하고 하였습니다. 평동 노래라고 했는데, 평안도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를 만들어서 거기에 어떻게 제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21살인데 그분들하고 같이 목회를 하다보니까, 제가 목회 하는 교회도 또 평안도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평안도 말씨를 더러 배워서 지금도 가끔 평안도가 고향이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벌써 한 10년도 넘었는데 제 설교 테이프를 늘 들으시는 어느 장로님 한 분이 잊어버릴만 하면 저한테 전화를 하십니다. 전화를 하셔서 첫마디가 항상 그렇습니다. "우리 평안도 사람 안녕 하시디요? 기리니끼니 이 목사님도 기뢰케 되셨구먼!" 나를 평안도 사람으로 항상 생각하시고, "내래 우리 평안도 사람 설교를 좋와합니다. 아, 이 목사 설교 좋습네다." 테이프를 항상 들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을 위해서 한가지 안하는 일이 있습니다. "나는 평안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말은 안합니다. 그 분의 즐거움입니다. 그분은 항상! 그걸 실망 줄 필요가 있나요? 그래서 나도 평안도 말씨로 "네, 안녕합네다. 잘 계시소!"

  제가 이 말 하는 것도 그때 새벽기도회를 하던 때인데 새벽 기도회를 둘이서 하게 됩니다. 권사님 한 분이 나오고 제가 나와서 새벽 기도회를 하는데, 평안도 권사님 이십니다. 그분의 새벽기도를 들으면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분간이 안갑니다. 그분의 기도 내용이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을 놓고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듯 기도를 하신 단 말입니다. 누구냐 하면 지금 여기 갈보리교회에서 열심히 후원하고 있는 '홍파 복지원'이라는 시각장애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우리 자주 가잖아요? 그런데 그 전신은 '한국 맹인 대린원'이라고 그랬습니다. 거기가 제첫 번 목회지 입니다. 그분은 그 원장님의 사모님입니다. 그분은 평안도 말씨로 새벽에 나오셔서 기도를 하시는데, 부부싸움 하시듯이 탁 첫마디가 "아바지∼! 내래 왔수다!" 뭐가 지금 안되는 겁니다. 막 하나님한테 따지고 덤벼드는 겁니다. "내래 아버지한테 잘못한 게 뭐 있시유! 내래 정말 망하는 것 보갔시오?" 하나님한테 잘못한 남편 몰아 세우듯이… 그런데 그 남편이 시각장애인이셨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장애인 남편 주셔서 평생 살아가기 힘든데 아니, 이런 공적인 공익 사업 하는데도 잘 안되게 해주시고 말이야요, 왜 아바지께서 내 하나님 딸을 못살게 구십네까?" 막 덤벼들면서… 21살짜리 전도사는 내 기도는 하나도 못합니다. 난 벌벌벌벌 떠는 겁니다. '어휴∼ 하나님 오늘 저 권사님한테 혼난다'

  그러한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하박국 성경은 3장으로 되어있는데, 1장에 질문이 나오고 2장에 대답이 나오고 3장에 신앙고백으로 정리됩니다.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이냐?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너무나도 귀에 많이 익은 소리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이 우리 신구약 성경 중에서 교리적으로 제일 공부하기 힘든, 깊이가 있는, 해석이 어려운 성경이 로마서입니다. 이 로마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됨의 가치와 정의에 대해서 많은 진리를 선언하고 있는데 로마서를 대표할 수 있는 성경구절 하나가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으므로 만약 우리가 그 복음을 마음으로 믿으면 그 믿는 믿음으로 또한 믿음에 이르게 되는 힘이 생긴다! 결국 이렇게 해석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복음의 능력은 무엇과 같은고 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로 이 하박국 2장 4절 말씀을 인용해서 로마서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내 형편과 기준을 갖다대고 따지고 덤벼드는 그런 삶이 아니라 내가 겪는 고난의 모든 여건이 하나님의 섭리론 가운데 내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이렇게 답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하박국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기록된 성경이 됩니다. 1장에서 질문을 하고 2장에서 대답을 들은 하박국은 3장에 와서 곡조 있는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을 하는데 3장 1절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이렇게 우리가 잘 알수 없는 단어가 적혀있습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노래가 무엇인가? 이 시기오놋이란 당시 음악적 용어입니다. "경이로운 곡조" "훌륭한 악보"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경이로운 곡조, 훌륭한 악보를 붙여서 함께 합창을 해라! 3장 19절 마지막은 보시면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고 하박국이 끝이 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3장 전체는 성가대의 찬양곡입니다. 이 노래를 혼자 중얼거리는 노래가 아니고 영장으로 맞춘 노래 즉, 지휘자가 있어서 지휘하는 대로 경이로운 곡조를 만들어서 거기에 맞추어 전체가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부르는 감사와 찬양의 특별순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어떠한 환경에서 불렀는가? 오늘 말씀 마지막 부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6절 말씀에는 지금 그들의 국민적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침략을 위해서 잘 훈련된 갈대의 군사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침략자들이 지금 막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내 창자가 흔들렸고 내 입술이 떨렸도다. 너무 무서워서 창자가 벌렁벌렁 숨이 차고 입술이 이가 부딪쳐 덜덜 떨리는 이 환경이 되었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침략자가 들어오면 다 죽을 거 아닙니까? 잘 표현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공포 분위기가 가득한 가운데서 이 노래를 부르자! 이제 민족의 운명은 가장 비참스러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지만 그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 안에서 발견하면서 초연하게 영장의 지휘에 따라 시기오놋에 맞춘 노래를 부르자! 여기에 나타난 신앙적 초점이 무엇인가? 우리 개인이 아무리 선하게 살고 노력을 많이 하면서 살아간다 하여도 피할 수 없는 민족적 고난의 역사가 닥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자로 잘 살면 뭐합니까? 전쟁이 나면 다 망하는데… 욥의 고난도 그 원인이 절대로 욥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증거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무한한 고통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창세기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으로 비교가 됩니다. 의로운 사람이요 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외로운 나그네로 살았고 팔려 가는 노예 죄목 없는 감옥살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의 고통은 그가 원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보다 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이냐? 거기에서 믿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 17절 말씀을 보면 성경구절 한 절 속에 인간 삶에 육신 적으로 절
대 필요한 6가지 종류가 없다는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의 문화로 이 모든 것들은 꼭 생활에 필요한 것들로써 없으면 살수가 없는 것들이 지금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니까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그랬습니다. 우리 나라는 무화과나무가 반상목 정도로 조금씩 여기저기 심겨있을 뿐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가면 무화과가 식량입니다. 터키 같은 나라에 가면 버스 타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무화과 밭입니다. 이 무화과나무가 없다는 것은 "생활에 제일 중요한 식량이 없으며" 하는 말을 대신 한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그랬습니다. 가나안의 몇 가지 특산물 중에 포도가 큰 몫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포도원이나 이 포도나무 열매에 대해 비유 말씀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돈을 벌 수 있는 수입원을 말하는 것인데 그 소망이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세 번째는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올리브 기름은 수출용이요 생활에 절대 필요한 부분입니다. 석유가 없던 시절에는 올리브 기름으로 불빛을 삼아 살았습니다. 절대 필요한 생활의 조건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밭에 식물이 없으며" 어느 나라나 밭에 식물은 1차 산업으로 국민의 기본생활의 요소입니다. 그 기초적인 것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에 양이 없으며" 그랬습니다. 이것이 유목민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 조건인데 이것이 다 없어졌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것은 약간의 부를 상징합니다. 사람마다 소원하는 생활의 풍성함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쟁은 지금 터져서 침략자들이 우리를 죽이러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접해졌으며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다 없어진 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하나님 백성의 노래가 무엇인가? 이렇게 말합니다.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이런 찬양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하바국서는 철학적 질문에 신앙적 대답이요 육신적 현상의 질문에 영적 대답이 되므로 신앙을 말한다면 차원이 아주 높은 수준의 믿음을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인간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그 문화권에서 6가지의 조건이 어려워진 상태에서도 기쁨의 찬양을 시기오놋에 맞춰서 영장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차원이 높은 신앙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대답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조건들이 잘 되었을 때 기쁨과 감사의 찬양을 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좀 편리하고 쉽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의 감사는 아주 깊은 신앙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노래이지 다들 원망하게 됩니다. 대개 보면 감사해야될 것이 많은 사람들이 감사생활은 오히려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돈 많이 벌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십일조 해야되지 않습니까? 많을수록 안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많으면서 교회 봉사 좀 하라고 하면 잘 안합니다. 아니, 노래방가서 노래를 하면 95점 맞는데 성가대는 왜 안해? 사범학교 선생님들 주일학교 교사 좀 하시고, 은행 직원들 재정부에 가서 일 좀 하시고… 그것 다 하나님이 좋은 은사 주셨잖아요? 은사 따라서 우리가 해야지요. 감사한 조건은 수없이 많은데도 감사의 예물은 1년에 한번도 안합니다. 다 안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쁨의 찬양을 드린다는 것은 지난 금요집회 시간에 제가 "Because"와 "In spite of"의 내용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다 이 "Because"에서 살아요. 무엇무엇 때문에 내가 무엇을 사랑한다든지, 감사한다든지 그렇게 우리는 삽니다. 그러나 "In spite of"의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나빠졌어요. 그런데도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은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기에 내가 갈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가 목표하는 신앙의 삶입니다. 18절 말씀에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말씀은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그 하나로 나는 나의 삶에 기쁨을 삼을 수 있습니다." 라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미시간호라고 하는 호수가 있습니다. 넓고 넓은 바다 같은 호수가 있는데 세계에서 제일 큰 호수입니다. 오래 전에 벌써 그곳에서 해상사고가 일어나서 배가 침몰했습니다. 사방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그 현장에 마침 수영 선수 청년 하나가 있었습니다. 목숨 걸고 노력을 해서 23명의 생명을 구해냈습니다. 그의 이름은 몇 개의 신문에 Top News로 소개가 되었고, 미국의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는 영웅적 청년이 되었습니다. 역사가 많이 흘러갔습니다. 토레이 신부님이라는 분이 로스앤젤레스에 집회가 있어 대중 설교를 할 때 "여러분! 미시간호의 해상 사고를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그 청년의 이야기를 예화로 들어서 설교를 열심히 하셨어요. 그런데 그 청년이 그 자리에 있었어요. 이제는 노인이 되어서 "어휴∼ 저 신부님이 저렇게 내 얘기를 하고 계시는구나!"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둘이 만났습니다. 반갑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토레이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그때 사건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입니까?"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네! 다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그 생명을 구해준 23명중에 한 사람도 날 찾아와 감사하다는 말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그 배에서 무슨 짐을 잃어버렸거나 무슨 지갑을 잃어버렸거나 돈을 잃어버렸거나 그게 관심이 되겠습니까? 살아난 것만이 기쁨이죠? 최고의 중요한 것은 그 한 청년의 수고로 얻었어요. 그런데도 "그 23명중에 평생에 한 사람도 내 이름이 신문에 그렇게 많이 나고 방송국에서 그렇게 많은 방송을 하고 했지만 한 사람도 날 찾아와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그것이 너무나 섭섭했고 이상합니다." 그런 말을 둘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나눴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여러 가지로 감사하다는 것은 너무 장식품을 감사합니다. 우리 주변의 작은 것들 너무나도 작은 것 어떤 면에서는 그런 것들은 내 인생에 없어도 괜찮은 그런 장식품을 너무 많이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장 기뻐할 일에 대해서 감사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네가 지금 무슨 무화과라든가 외양간의 소라든가 이런 게 네 삶의 장식품인 것을 네가 알도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서 그것 때문에 나에게 받은 이 생명 영원 불멸의 진리, 영생의 구원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장 감사하고 가장 기뻐해야 할 일은 잊어버리고 장식품만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 슬퍼하는 이것이 믿음인가?" 그래서 철학적 질문을 하는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신앙적 답변을 하고 하박국이 그렇게 정리합니다.  제가 서울에서 9개월째 목회를 하는데, 교인들 가정을 많이 보고 서울에서의 문화도 많이 보고했는데 한가지, 두 가지 고쳐야 할 것은 있습니다. 결혼 문화는 나빠요. 무슨 결혼식을 하는데 그렇게 장식품이 많이 필요한지… 외국 같은 데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들도 이것은 고쳐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절대로 안 고치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혼하는데 무슨 사돈끼리의 신경전을 벌이면서 뭐가 왔니? 뭐를 보내야 되니? 그것 때문에 막 결혼이 깨지고 자존심을 세우고 말입니다. 아니, 결혼에 두 사람이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지,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 중요한 것은 빼놓고 주변에 무슨 시시한 반지니 옷 한 벌이니 구두 한 짝이니 핸드백 같은 이 장식품 때문에 그 중요한 것을 아주 나쁘게 만들어버리는 이런 문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거 하나 고치지 못한다면 그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야심 많은 청년이 하나 있었어요. 어느 날 그의 앞에 그의 꿈이 나타났
는데 바로 결혼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아가씨인데, 그러나 이 청년은 이 아가씨에 비해 너무나 초라해서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권세가 있는 집안의 딸이요, 재물도 부유층이요, 미모도 대단하고 자기 같은 사람은 도저히 갖다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신념을 가지고 그 날부터 노력을 합니다. 어떤 하나의 목표를 놓고 한 남자가 마음을 먹었을 때 그 집념이 대단합니다. 젊음을 다 불태우는 과정을 해서 마침내 그는 그 아가씨를 맞이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끝냈습니다. 기업주라는 명예와 넉넉한 재물을 소유하고 사회적 명성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가씨와의 결혼도 넉넉하게 성취를 이루어 내서 아주 행복하게 시작을 했는데, 매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결혼한 그 이튿날부터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업도 망했습니다. 돈도 다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회적 명성도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말할 수 없는 가난뱅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내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대를 위하여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제 하나도 없어졌소. 이제는 나를 떠나도록 하시오." 그랬더니 아내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오. 나를 위해 준비된 그 많은 장식품을 보고 당신과 결혼한 것이 아니오. 나를 위해서 당신이 그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는 당신 자체를 본 것 때문이요. 우리 주변에 장식품이 다 사라졌어도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내가 영화를 본 겁니다.

  그거죠? 우리 인생의 우선권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우선권이 무엇인가? 몇 가지 없어져도 괜찮은 장식품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이게 하나 없어지면 또 시험을 받고 이게 하나 없어지면 또 시험을 받습니다. 날마다 그렇게 원망을 하다가 평생이 끝나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삶의 목표를 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늘 성경 말씀 "나는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