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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뼈들이 살겠느냐? / 겔 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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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뼈들이 살겠느냐?
겔37:-10   

  기독교 신앙은 미신이나 맹신이나 광신과 같은 저속한 신앙과는 구별이 됩니다. 진리의 지식을 바탕으로 차원 높은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정한수 떠 놓고 빈다던가, 절을 백 번, 천 번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는 맹목적인 신앙과는 대비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그 신앙의 중심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 것이냐?” 여기에 중점을 두고 대부분 도덕과 윤리와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라고 하는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합니다.

벧후3:18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빌3:8에서 바울 사도는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세상의 풍부한 지식보다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며 따라서 이렇게 고백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하다는 겁니다. 가장 고상하다는 겁니다.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가장 위대함이라는 겁니다. - 그렇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가 결국에는 인생을 불행으로 끌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호4:4에서 이와 같이 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를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생사가 걸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징계를 통해서 범죄한 자기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와 다시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기의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때로는 회초리를 들어 징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선생님도 학생들을 사랑하지만 때로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따끔하게 책망할 때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사랑하지만 왜 그와 같이 징계를 하게 되는 것입니까? 징계가 목적입니까? 아니지요. 징계를 통해서 깨닫고 돌아와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사랑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받아야 합니다. 만약에 사랑으로 받지 아니하고 곡해해서 받아들인다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는 조국을 빼앗기고 성전이 훼파당하며, 포로로 잡혀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는지에 관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절망에 빠졌습니다. 사실 저들의 절망감은 실로 말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누구입니까? 뭐니 뭐니, 하나님의 선택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특별히 선택된 하나님의 선민 아닙니까? 범죄했어도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잘못을 하고 실수를 했어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백성들이 그만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게 된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파괴되고, 성도님들! 성전이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성전이 무너졌다는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가치는 성전입니다. 요즘 우리가 쓰는 용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성전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운명은 이스라엘의 운명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은 파괴되고, 성전에서 쓰던 기물들은 바벨론 사람들이 다 가져 다가 술 따라 먹는 술잔으로 사용되어지고, 그리고 젊고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되고...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지금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는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이 보통 나라입니까?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막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 아닙니까? 바벨론이 망하고 다시금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는다는 것은 아무리 이리 재고, 저리 재도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나타나셔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회복을 계시하시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절망하고 있을 때, 이제는 끝났다고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이제 더 이상 조국에 돌아가서 부모형제들이 다시 만나 오순도순 사랑을 나누며,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제사하게 되는 소망을 다 끊어 버리고, 그저 기약 없이 어두움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에 회복의 비전을 보여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임하시고 그리고 그를 데리고 죽은 뼈들이 말라 있는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공동묘지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스겔은 여기저기 즐비하게 널려 있는 뼈들 사이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2절 말씀을 보니까, “뼈들이 심히 많고 아주 말랐다.”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장면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이겠습니까? “뼈들이 심히 많고 말랐다!”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완전한 절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지 한 두 시간,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니고, 아니 1분이 되었건, 2분이 되었건 숨을 거두게 되면 모든 것이 상황 종료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래도 호흡이 남아 있고, 맥박이 남아 있을 때, 어째든 그럴 때 그나마 희망이 있는 것이지, 호흡이 끊어지고 시체가 되어 버리고, 오늘 본문의 상황처럼 완전히 뼈들이 말라져 버린 상태에서야 뭐 더 이상 희망이 있습니까? 이미 끝난 것이지요. 지금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시는 이러한 장면은 이스라엘의 현재의 실상, 현재의 상태를 숨김없이 솔직하게 보여주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꼭 이스라엘의 현재의 운명입니다. 이와 같은 장면을 다 보여주시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한 가지의 질문을 던집니다. “에스겔아,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참, 기가 막힌 질문입니다. 어이가 없는 질문입니다. 질문 자체가 난센스예요.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아니하는 마른 뼈들이 어떻게 다시 산단 말입니까? 가당이나 한 얘기입니까? 질문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질문을 분명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적용시켜 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평소에 해도 해도 안 되었던 것, 이제는 안 되겠다고 포기해 버린 것, 체념해 버린 것, 우리가 옛날 학교 다닐 때 시험을 보았습니다. 문제를 쭉 1번부터 풀어 나갑니다. 그러다가 모르는 문제가 나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는 문제입니다. 그럴 때에는 그 문제 하나를 풀기 위하여 씨름하다가 다른 문제까지 못 풀게 되니까 그냥 포기하고 다른 문제로 넘어갑니다. 성도님들, 바로 그런 것, 해도 해도 안 되었던 것, 풀다 풀다 못 풀은 것,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포기해 버리고 건너뛰었던 것, 그런 것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완전히 마른 뼈 같이 되어서 더 이상 소망을 포기했던 바로 그 문제를 지적하시면서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이 묻고 계시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개야! 지금까지 고질적으로 너를 고민스럽게 했던 바로 그 문제, 네 눈에서 눈물을 마르지 않게 했던 바로 그 문제, 이것 때문에 행복을 빼앗기고, 나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 가운데 한숨만 푹푹 내쉬게 했던 바로 그 아픔, 내가 개입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니?” 성도님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물음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제 에스겔이 대답합니다. “주께서 아시옵니다.” 이 에스겔의 대답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보기에는 이 뼈들이 다시 살게 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으로 보여 집니다. 어떻게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는 죽은 뼈들이 다시 살겠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하신다면 이 죽은 뼈들이 다시 살줄로 믿습니다.”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가능합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안 될 것이 뻔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안 된다고 생각했던 실패의 마른 뼈, 질병의 마른 뼈, 가난의 마른 뼈, 자녀의 마른 뼈, 어떤 분은 남편으로 상징되는 마른 뼈도 있을 것이고, 아내로 상징되는 마른 뼈도 있을 것이고... 하여간 분명한 것은, 사람마다 고질적인 마른 뼈는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아무개야! 그런 마른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주께서 아시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될 줄로 믿사옵니다.” 믿음으로 응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스겔의 대답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덥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1)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라 있는 뼈들을 향하여 대언하라는 겁니다. 선포하라는 겁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할렐루야!

믿음으로 외치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선포하라는 겁니다. 비록 마른 뼈지만, 불가능하다고, 안 된다고 포기해 버린 바로 그 문제, 바로 그 마른 뼈들을 향해서 과감하고, 확신 있게 명령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주의 깊게 살필 것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자기의 말을 가지고 암시를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을 가지고 최면을 걸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4절입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또 5절에 가서는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무슨 말입니까? 대언입니다. 자기 확신에 찬 자신감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 안에 잠재해 있는 잠재능력의 개발이 아닙니다. 최면이나, 마술도 아닙니다.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능력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한다.” - 놀라운 능력입니다.

마10:12-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주신 말씀인데, 각 촌에 다니면서, 각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그 집에 임할 것이라는 겁니다.

막1:23-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룬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폴란드의 위대한 애국주의 음악가 쇼팡이 프랑스로 음악공부를 하러 떠날 때의 일이다. 쇼팡의 아버지는 음악책과 악기를 건네주며 다정하면서도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너는 폴란드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 이 아버지의 말씀 한 마디가 쇼팡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습니다. 음악공부를 하면서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식구들이 보고 싶고 다시 보따리를 싸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한 마디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아버지의 격려의 말씀 한 마디가 위대한 음악가 쇼팡을 있게 한 것입니다.

->사람의 말로도 격려가 되고, 사람의 말로도 용기가 생기고, 사람의 말로도 운명이 바뀌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죽은 나사로, 죽어 장사 지낸지 사흘이 되었습니다. 시체를 무덤에 가두었습니다. 무덤의 문을 봉쇄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시체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입니까? 죽은 나사로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또 보세요. 베드로, 밤새워 그물을 던졌으나 피라미 새끼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저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한 마디의 말씀은 던집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 때 베드로의 반응이 이것입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아 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여러분들의 인생을 향하여 이렇게 수시로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이 마른 뼈다귀 같은 인생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이제는 안 된다. 다 틀렸다. 끝났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자기 스스로를 오늘 본문의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인생이라고 단정하고 오늘도 좌절과 실의 가운데 의욕 없이, 그냥 그럭저럭 패배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 혹 게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회복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만회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망을 생명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지옥을 천국으로, 약함을 강함으로, 가난을 부유로, 실패를 승리로, 눈물을 웃음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이렇게 회복시키시는 좋으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아니하는 마른 뼈, 오늘 본문의 표현이 실감 있습니다. “아주 말랐더라.”,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저들을 향하여 대언하니 오늘 본문을 보세요. 소리가 나고 움직이면서 뼈가 들어맞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10절 이하의 말씀을 주목하세요.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축복의 말씀입니다. 능력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사상입니다. 그대로 되어지는 약속입니다. 아주 말라버린 뼈들을 향해서 대언하니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내 인생을 향하여 축복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절망과 좌절은 떠나가라고 선포하세요. 가난과 질병은 떠나가라고 선포하세요. 불안과 염려와 근심, 걱정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라고 대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되어질 것입니다. 자녀를 향하여 축복하시고, 만나는 이웃을 향하여 축복하며 대언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집집마다 평안을 빌라는 겁니다. 그래요.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권리를 주셨습니다. 아주 영광스런 권리입니다. 평안을 비는 권리입니다. 복을 비는 권리입니다. 흉보고, 비난하고, 음담패설이나 즐기고, 거짓말 하고, 심지어는 복을 빌지는 못할지언정 저주하고... 이것은 성도의 입이 아닙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에 말씀을 주셨는데, 축복의 언어, 기적의 언어를 주셨는데, 이것을 사용해야지요.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 주고받는 인사가 있지요. “부자 되세요.” 사실 부자 되라고 인사한다고 부자 된다면 부자 안 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인사 치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에는 그냥 인사치례가 아닙니다. 그대로 되어지는 능력입니다. 그대로 되어지는 약속입니다. 힘 있게, 확신 있게,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권리입니다.

창1: 에 보면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장면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입니다.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의 입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인생을 회복케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시키신 그대로 순종하여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능력,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중요한 것을 말씀드립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에 뼈가 들어맞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혀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는 그 안에 생기가 없으니 산 것 같으나 산 것이 아닙니다. 생기가 들어가야 비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어 하는지 깨달음이 오시는 분 계실 겁니다. 뼈가 붙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혀진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생기입니다. 이 생기가 바로 생명입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출세하면 된다고 합니다. 성공하면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높아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출세하려고, 높아지려고, 부자되려고... 부단히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 다 갖추었어도, 만약에 그 안에 생기가 없다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이 없다면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죽음입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거나, 살점이 뽀송뽀송 붙어 있어도,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없으면 죽음입니다. 부자이지만, 지식을 갖추었지만, 출세하고 높아 졌지만 그 안에 여호와의 생명이 없다면 죽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살은 것 같으나, 죽어 있는 영혼들을 향해서 여호와의 생기를 불어 넣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언어를 주셨습니다. 살리는 언어를 주셨습니다. 회복시키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 잠잠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침묵할 수만은 없습니다. 아무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단정하시 마세요.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 언어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힘 있게 대언하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가 살아 날 것입니다. 귀신은 쫓겨 갈 것입니다. 병든 자는 일어날 것입니다. 회복케 하는 역사가 이제 나타날 것입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암요. 살아납니다. 큰 군대를 이룰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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