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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예수 / 막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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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9:8  오직 예수

수난에 대한 교훈 후에 주님은 세 제자를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산에 오르신 주님은 그 모습이 변형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은 세상의 방법으로는 모방할 수 없는 완전한 변형으로 태초부터 지니신 본질로서 거룩하심과 순결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후에 엘리야와 모세도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고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로 더불어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변화산상에서의 주님의 변형과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에게 신적 세계에 대한 황홀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랐을 때에 어디에서 그런가 하고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과 자기들뿐이었더라고 합니다. 엘리야도 모세도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다만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비상한 기쁨과 위로가 떠나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을 버리시지 않으심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 보다 더 한 감상적이고 매혹적인 신비한 교통을 체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지만, 언제나 변함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들과 항상 같이 할 것이며 세상 끝날 까지도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아 있음이 '오직'(모노스)이란 뜻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도 결국은 예수님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사라질 뿐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는 신앙의 전부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오늘 받는 성찬의 떡과 잔을 통해서도 오직 예수 내일 저녁부터 시작 되는 부흥성회도 오직 예수 중심이 되어야겠기에 오직 예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오직 예수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막 9:7)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이 아들은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아들 이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창 3:15)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3)하신 아들이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 (마 1:21)신 아들입니다.

예수님의 공적 생애가 시작되면서 그가 요단강에서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세례를 받고 나오시는 바로 그 순간 비둘기가 그의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임하시고 또 하늘 문이 열리면서 하늘에서 한 음성이 나서 그 소리가 말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아들이십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또 내 기뻐하는 자'라는 놀라운 확인과 인정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우리 위해 희생하시는 아들이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창 3:15)신 말씀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해 주시면서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 21:37)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마 21:38)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갔습니다. 수확기가 되어 그 종들을 보내어 얼마간의 소출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핍박하였습니다. 주인은 최후로 자신의 아들은 공경하리라고 생각하여 아들을 보냈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 (롬 8:32)셨다고 하심으로 희생하시는 아들을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 (히 5:8)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3-17)고 말씀 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을 회고하면서, 피에르 반 빠아센(Pierre Van Paassen)은 나치 대원들이 유대교 랍비 노인을 붙잡아 사령부로 끌고 간 후에, 어떻게 그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했는지를 말했다 합니다. 노인이 들어간 방 한 쪽에서는 두 명의 나치가 한 유대인을 죽도록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을 잡아온 나치들은 이 노인을 데리고 장난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노인의 옷을 벗기고, 다음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하려고 준비한 내용을 설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야물커(yarmulke, 유대인 남자들이 쓰는 두건)를 써도 좋으냐고 물었고, 나치 대원들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꼴이 더 우스울 것 같았던 것이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노인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나치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노인을 툭툭 건드리고 또 한쪽 구석에서는 한 사람이 최후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 노인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문을 당하고, 갖은 수모를 겪은 이야기를 복음서에서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이 세상에서 겪은 수모와 모멸감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벌거벗기고, 매질을 당하며, 가래침이 얼굴에 묻고, 따귀를 맞으며,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시되 살과 피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8)하시었고 만찬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저희가 먹을 때에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6)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7)하시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셨고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가시관을 쓰신 이마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영생을 위하여 그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미움을 받아서 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향하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유월절 어린양처럼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는 영생을 위한 우리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죽음의 재앙을 넘겼습니다. 죽음을 면하고 생명을 얻은 이스라엘은 애굽의 430년 바로의 손아귀에서 유유히 걸어 나온 것입니다. 죽음은 생명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님의 피로 생명을 얻어 죽음을 뒤로하고 천국을 향하여 유유히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살과 리를 피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것 다 잊어도 그 피만큼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살과 그 피를 잊지 말아라. 나의 죽음을 잊지 말아라”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죽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죽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아들이십니다.

유동천 목사님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자신도 유교에 심취해 공자, 맹자 노자 도덕경을 성경이라 부르며 탐독했습니다. 그가 수원 고등농림학교를 다닐 때 기독학생들이 그에게 전도하였는데도 그는 극구 반대하고 기독교를 비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려 경성제대 부속병원에 입원하여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 몸에서 피고름이 계속 흘러나왔고 결국 의사도 포기하였습니다. 절망 중에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져들며 아 이제 죽는가 보다 하는데 어디선가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1절 찬송이 끝날 무렵 갑자기 몸에 감전 같은 전율이 느껴지며, "너는 무덤에서 주와 함께 살았다"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주 반대하던 이 놈이 무엇하겠습니까?"라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졸업 후 농업기사가 되거나 일본에 가서 신문사 기자가 되어 명성이나 날려 보려던 나였는데 하는 자책감이 생기다, 아 아니다 나는 예수 없이는 못산다. 오 나를 살리신 예수여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뜻대로 살겠사오니 뜻대로 하옵소서 하며 외쳤습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난 후 간호원에게 부탁해서 성격을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믿는 간호원이라 성경을 읽어 주고 찬송도 불러 주었습니다. 신약 구약이 자기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 때부터 이상하게 피고름이 나오던 상처가 아물더니 이내 몸이 가뿐해졌습니다. 퇴원하는 길로 교회에 찾아가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세례를 받았으며 본래 이름인 기로(基魯)를 동천(東泉)으로 바꾼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되었습니다.(기로가 동천으로-인터넷 정보 클럽)


  우리의 삶의 원천이신 오직 예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고 합니다.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라고 합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쉬네스타우로마이)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롬 8:4), 또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롬 6:4).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롬 8:18).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합니다. 나 대신에 그리스도 율법 대신에 믿음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롬 8:4).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 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한 토인이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추장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추장은 화가 치밀어 죄인을 사형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선교사는 비싼 보화를 싸 가지고 가서 추장에게 주면서 죄인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추장은 보기보다 완고하고 냉담했습니다. "저런 물건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상아나 금, 은, 노예 따위는 부럽지 않소. 그런 것들은 저쪽 부락에 가면 얼마든지 빼앗아올 수 있소. 더구나 백인의 물건은 갖지 않겠소. 내가 오 직 필요로 하는 것은 피요. 다른 것은 소용없소." 추장은 다시 부하에게 죄인을 죽일 것을 명했습니다. 화살이 시위에서 떠나려는 순간 선교사의 가슴에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여 자신도 모르게 죄인 앞을 가로막고는 자기가 화살에 맞았습니다. 순간 선교사는 쓰러졌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화살을 뽑아 땅에 던졌습니다. 선교사의 몸에서는 피가 솟구쳤습니다. 그는 이러한 몸으로 추장에게 다가갔습니다. "자, 당신이 구하고 있는 피요. 받으시오. 그리고 그를 살려 주시오." 선교사의 행동에 감동한 추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소. 당신은 당신의 피를 가지고 그를 샀소. 그는 당신의 것이오." 그 때에 죄인은 선교사의 발밑에 엎드려 감격에 떨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은 피로 저를 사셨습니다. 아무쪼록 오늘부터 어디를 가시든지 제가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후 선교사가 가는 곳마다 그 토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에도 결코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습니다.(피로 산 죄인)

꽤 큰 부자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있습니다. 이 할머니가 예수님 믿고 중생한 후 어느 날 손녀의 손목을 잡고 장거리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불쌍한 사람이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그에게 얼마를 주고 가다 보니 또 누군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물론 이 할머니는 그에게도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구세군의 자선남비에도 얼마를 집어넣고 --- 이런 식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손녀가 말합니다. "할머니, 오늘 참 손해 많이 보시네요 ?" 할머니는 그 어린 손녀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렇게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님 믿은 후에 급한 성격도 버렸고, 남 흉보던 말도 버렸단다. 세상 쾌락도, 욕심도, 이기심도, 질투도, 남을 비판하는 마음도 다 버렸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예수님뿐이란다"

우리도 예수님 믿고 다 잃어버렸다고 고백합시다.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고백합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라고 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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