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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군사의 무기Ⅱ (엡 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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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의 무기Ⅱ (에베소서 6:10-20)

  우리의 신체적인 부분이 다 귀하고 소중하지만, 머리가 가장 소중한 부분입니다.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다른 데는 방비하지 않지만 머리만은 헬멧을 씁니다. 머리를 다치면 치명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작업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다른 데는 노출되어도 머리에는 안전모를 씁니다. 군인들이 다른 데는 가리지 않아도 머리에는 총알이 날아와도 맞지 않도록 철모를 씁니다.

다리나 팔은 총알이 관통해도 생명에 지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맞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로마군인들은 가죽으로 모자를 만들고 그 위에 쇠를 입히고 또 그 위에 깃털을 붙힌 투구를 쓰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꾀어서 선악과를 먹게 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뱀과 아담과 하와를 징계하셨습니다. 뱀에게 무엇이라고 저주하셨습니까? <너는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뱀이 흙 먹는 것 보았습니까? 뱀은 얼마나 깨끗한지 산 것만 먹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라고 하신 것은 사탄의 밥이 바로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 인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다 사탄의 밥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여자의 후손이 너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뱀의 꼬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뱀의 피부를 상하게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왜냐하면 머리가 상하면 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짓밟아 놓았습니다. 사탄은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왜요? 머리를 상했기 때문입니다. 뱀의 머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육신적인 전투나 영적인 전투에서 머리가 상하면 다 끝납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의 머리를 계속해서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의 머리를 공격해 올 때에 구원의 투구를 쓰고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구원의 세가지 시제(時制)

구원의 투구를 쓴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이 무엇인를 알아야 됩니다. 특별히 구원이라고 할 때에 성경에 나와 있는 구원의 시제(時制)를 알아야만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하는 말을 쓰지요? 그것은 과거에 이미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구원받고 있다” 과거에 구원받아서 지금 현재완료형으로 지금 구원을 누리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미래형입니다. ‘지금 내가 구원 받았지마는, 받고 있지마는 앞으로 구원받을 것이다’ 하는 표현들이 성경에 동시에 나오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미 과거에 믿는 그 순간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사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보면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지금 구원을 받았는데 그 상태는 어린애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과 같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현재 구원받고 있는데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이 구원은 미래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성화(聖化)되어가는 과정을 현재의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구원은 영화(榮華)입니다. <천국에서 영육간에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화를 누리게 되는 완전한 구원>, 그것을 미래의 구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를 쓴다는 것은 “나는 과거에 이미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그 사람을 가리켜서 구원의 투구를 썼다고 말합니다.

“나는 과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현재도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해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서 성화(聖化)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구원의 투구를 쓴 사람입니다. “나는 미래에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는 믿음과 확신을 가진 상태를 구원의 투구를 썼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구원의 투구를 확실하게 쓰고 있습니까? 사탄은 끊임없이 여러분의 머리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흔들어 놓습니다. 여러분들이 전도하다 보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넘어져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보세요. 구원에 대한 바른 확신을 가지고 넉넉하게 사탄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자는 구원의 투구를 쓴 사람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이 확실해야 됩니다. 이 구원은 믿음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서 구원되고, 죽음에서 구원되고, 사탄에서 구원되고, 모든 저주에서 다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어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죄와 죽음과 사탄의 종노릇하고 저주 가운데 있는 우리를 건져내기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다, 그 예수님께서 나의 죄값을 지불하시기 위하여서 나 대신 십자가에서 대신 돌아가셨다, 그래서 내 모든 죄값을 다 지불했다는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다 사하여 집니다. 왜요? 예수님이 대신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졌습니다. 왜요? 죽음이 죄의 결과로 오기 때문에, 그 죄의 결과인 죽음이 죄가 없어지니까 죽음도 사라지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사탄의 손아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모든 저주의 줄이 다 끊어지고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을 구원의 투구를 썼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구원의 투구를 확실히 썼다고 확신하고 있습니까? 이 확신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정병(精兵)이 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리의 띠, 복음의 신, 성령의 검,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죽어있는데 죽어있는 병사에게 아무리 좋은 무기를 들려보세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신앙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집니다. 이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확신을 벗어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현재 성화되어가고 있음을 확신하는 자가 구원의 투구를 쓴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졌는데,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가야 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화(聖化)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잘 먹고 기도로 호흡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날마다 자라가야 됩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자라가지 않습니까? 한 살이 되면 걷고, 두 살이 되면 말을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알아봅니다. 또 더 자라면 뛰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친구를 사귑니다. 날마다 아는 것이 늘어납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게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라지 않을 때에 ‘나는 과연 구원받은 사람인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몇 년 믿어도 성경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늘 실수하고, 범죄하고, 넘어지는 자신을 볼 때에 ‘내가 과연 예수믿는 사람인가. 이렇게 믿어도 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런 의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세례문답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상담을 할 때 “구원받았습니까?” 물어보면 “못 받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왜 못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물으면 “나는 아직도 전도도 한명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와같이 생활과 믿음을 동일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경우에도 보면, 성장이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늦은 사람도 있습니다. 말을 못해도, 잘 못 걸어도, 넘어질지라도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이미 그 사람은 사람인 것처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성도의 구실을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물지을 때 보세요. 건물을 지을 때 건물 옆에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있습니까? 지저분합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라고 바깥에서 천막으로 가리어 놓을 때도 있습니다. 온갖 쓰레기가 쌓이고, 색깔도 우중충하고, 모양도 흉측합니다. 그래서 가려놓은 천막이나 울타리에  무엇이라고 써두었던가요? <공사중>이라고 써놓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완성품이 아닙니다. 성화되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화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았다는 말과 성화되었다는 말을 구별하지 못하면 구원이 늘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이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자라고 있는 중입니다. 성화의 과정을 밟아 나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집으로 말하면 <공사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공사가 다 끝나게 되면 아름다운 집이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색깔을 칠하게 될 것입니다. 정원에는 꽃들이 피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공사중이라 그렇게 안되지만 공사가 끝나면 그렇게 되는 것처럼, 지금은 우리의 신앙이 공사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 공사가 다 끝나게 되면 그때는 우리가 천국에서 구원의 아름다운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는 완전할 것입니다. 또 죄에서 자유롭고 모든 악에서 벗어나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신부(新婦)가 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영화롭게 될 줄 아십니까? 요한1서 3장 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가 나타나는 때가 언제입니까? 재림하는 때요. 우리가 변화되어서 주님을 만나는 그 때에 우리가 <그와 같을 줄>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서는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한 몸으로 시공간(視空間)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고 죄 짓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신부된 우리를 맞아주시고, 모든 천사들이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를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바로 그날이 우리를 위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되어져가고 있는 중입니다. 성화되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오늘의 삶이 성화되지 못해도 주께서 우리를 홀연히 변화시켜서 그리스도처럼 만들어주실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구원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투구를 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과 <성화되었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동일시하면 자꾸 내 자신의 행위를 보면서 구원에 대한 의심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통하여서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의 구원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라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성화되어가고 있는 중이다”하는 사실을 구별해서 구원의 투구를 확실히 쓸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낙심하지 않는 자가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쓴다는 말은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 보면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기도의 응답도 없고 하는 일도 제대로 안 되고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사탄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너 그래가지고 구원받았겠어? 기도의 응답도 받지 못하는 것 보니까 하나님이 너를 버렸어. 하나님이 너를 버리지 않고는 이렇게 기도의 응답이 없을 수 없어. 너 생활이 이래가지고 어떻게 구원받았어?” 그렇게 계속해서 사탄이 공격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버리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의 삶을 보기도 전에 이미 우리가 죄인 된 것, 경건치 못한 그것도 다 아시고 이미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생명책에 기록해 두시고, 때가 되어서 부모님을 통해서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어머니 뱃속에서 형질(形質)이 갖추어지기 전에 이미 우리를 다 알고 우리를 기억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서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계획을 아시고,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바닥에다 우리를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손바닥에 문신(文身) 새겨 놓으면 그것이 없어지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손바닥에까지 기록해 두셨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마하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생명, 한 생명도 내가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지을 것도 다 아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범죄하여서, 약하여서, 넘어져서 세상으로 나간다고 할지라도, 마치 연을 띄우는 어린애가 바람이 세게 불면 연줄을 풀어주듯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 속으로 나갈 때 풀어줄지언정 그 연줄을 끊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부자(父子)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 보았습니까? 호적을 파버리고 호적을 불태워버린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한번 구원한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끝끝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스러운 구원에까지 도달하게 하신다는 확실한 말씀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것을 믿는 것이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함으로 신실하게 살다보면 그 대가가 손해보고, 때로는 오해받고, 때로는 따돌림 당하는 일들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아, 예수 믿는 것이 도대체 뭐냐?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건강하게 살다가 편안하게 죽고, 경제적으로 부를 누리고, 자식들은 잘 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예수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이렇게 예수를 믿어도 그들보다도 더 경제적으로 유족(裕足)하지 않고, 자식들도 더 안 될 때가 있고, 때로는 병들 때가 있는데, 왜 예수 안 믿는 저들은 저렇게 되고, 예수 믿는다고 하는 나는 왜 이렇게 되는가?’ 그렇게 의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말 내가 구원받아서 앞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이런 의심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것은 악한 사탄이 우리의 머리를 향해서 화살을 쏘고 있는 줄 알고 성경말씀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악자와 불의한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 너희들은 사철에 푸르른 소나무가 아니냐? 밑에서 자라고 있는 풀들은 보면 1년에 자라는데, 그렇게 자라면 몇 달 만에 온 산천을 다 덮어버릴 것 같지만, 그러나 가을이 되면 한방의 서리에 모든 풀들이 다 사라지는 것처럼, 그들은 그런 사람이니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어떤 고통 가운데서라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때로는 핍박과 질병과 실패와 감당 못 할 시험이 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당하였나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 이런 핍박과 시험과 환란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 말씀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당했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원수가 아무리 강해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믿는 이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요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살합니까? 1년에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자살을 합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낙심케 하는 마음을 심어줍니다. 거기에 넘어가면 자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낙심의 화살을 쏘아댈 때 구원의 투구를 쓰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소망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투구를 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세상이 두 쪽이 나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아서 지금 주님이 부르신다고 할지라도 나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그러나 아직 나는 완성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서 성화의 단계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다’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만 악한 사탄의 꾀임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 앞에 섰을 때에 우리는 영광스런 구원, ‘예수님과 같은 몸, 같은 신분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천국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는 소망이 우리 마음 속에 있게 될 때에 우리의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가 확실하게 씌워져서 사탄이 아무리 화살을 쏘아댄다고 할지라도 그 구원의 투구 앞에 다 꺾어지고 우리는 든든하게 생명을 유지하면서 악한 사탄의 화전(火箭)을 소멸하며 나갈 수 있는 능력있는 하나님의 군사(軍士)가 될 줄 믿습니다.

구원의 투구를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구원받고 있다” “나는 구원받게 될 것이다” 하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악한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유혹한다고 할지라도 넉넉하게 구원의 투구를 쓰고 승리하며 나갈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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