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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차 오르는 신앙 / 겔 47: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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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에스겔 47장 1절 - 12절
제  목 : "차 오르는 신앙"


사막같이 황폐해진 민심
사해같이 황폐해진 사회
누가 어떻게 고치고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교회인 나를 통해서 이 모든 역사를 이루십니다.

1) 본문 요약

어느 날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 성전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곧 물이 고였는데,
그 사자는 에스겔 선지자보고 걸어 보라고 했습니다.
걸었더니 발목에 찼습니다.
물은 더 쏟아졌습니다.
또 걸었더니 이제는 무릎까지 찼습니다.
급기야는 허리까지 차 올랐고,
마침내는 헤엄치지 않고는 능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 물이 성전을 한 바퀴 돌아 사막으로 흘렀고,
사해로 흐를 때는 사해의 죽은 물고기들이 살아났으며,
돌아올 때는 사막에 푸른 숲이 조성되기도 했습니다.

이 환상,
무언가 심상치 않습니다.
무언가 약동함이 있습니다.
새로움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상징이 담겨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고원지대이기에 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부터 강물이 흘러 사막을 거쳐 사해까지 흘렀습니다.
이는
고통받는 백성에게 은혜가 온다는 메시지요 고난받는 이스라엘에게 희망이 온다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얼마나 좋을까요?

2) 강물과 근원

그렇다면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흘러 사막까지 새롭게 하는 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한 은혜요
예수님의 크신 보혈이요
성령님의 충만한 강림하심입니다.

주님 외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요 7:37-39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에는 자유가 임했습니다.
보혈이 흐르는 곳에는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님이 강림하심에는 큰 부흥이 일어나 새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리고 어디든
민족과 시대를 살리는 묘약은 이 생수 외에는 없었습니다.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특별히 물이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기에,
교회야말로 모든 은혜와 권능과 부흥의 근원지하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소중한 생명 샘입니다.

강원도 태백과 횡계를 가보니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가 각각 있었습니다.
빈약한 곳, 초라한 곳, 탄광촌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발원한 낙동강이 농토를 적시고
    거기서 발원한 한강이 수도 시민의 젖줄이 된 것입니다.

이성의 눈으로 교회를 본다면 초라합니다.
웅장한 것도 없고, 화려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얕잡아 보고 말살정책도 펼쳤습니다만,
세상이 무너지면 무너졌지 교회는 망하질 않습니다.

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교회의 생명력을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교회가 초라하고,
비록 교회가 잘못하고,
비록 교회가 가난해도,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방주이기에
칼빈의 말대로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는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엄성입니다.

  마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큰 교회도 좋습니다.
작은 교회도 좋습니다.
시골교회든, 다락방 교회든 상관치 않습니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오직 교회만이 치료하시고 꽃피우는 생수의 근원이 됩니다.

3) 우리 신앙, 나의 신앙

문제는 교회의 지체된 우리 신앙입니다.
아니 내 신앙입니다.
어느 깊이의 신앙소유자냐?
알고 계셔야 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은혜와 보혈의 능력과 성령님의 임재하심 속에 나는 어느 정도입니까?

① 발목 신앙
발목만 잠그는 신앙이 있습니다.
초보적 신앙입니다.

일전에 어느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얘기 중, 자주 「개척교회」혹은 「개척교회 목사」하며 스스로에게 어린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개척한지 몇 년 되었느냐?
5년 되었답니다.
그렇다면 이제 개척이 아니지요!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작아도 클 수 있건만,
스스로 자생력을 가진 년수가 되었건만,
그만 매사를 억제하는 「개척교회」「개척교회목사」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년수는 오래 되었는데
직분은 고급인데도 여전히 발목신앙이 있습니다.
말씀의 지식이 작습니다.
은혜의 감격이 적습니다.
비밀의 체험이 얕습니다.
헌신의 힘이 허약합니다.
겨우 발목만 적신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유감된 것은
발목만 잠겼기에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상과 주를 더불어 섬기기도 합니다.

어느 집사님은 TV사극을 즐겨보았습니다.
요즘 같으면 장희빈을 녹화해서 두세 편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 집사님은 당시 한명회를 녹화해서 토요일 저녁 늦게까지 보았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 중에 기도 담당이 되었는데
'하나님 아버지! 성은이 망극하나이다'했습니다.

물론 11절에 나오는 진펄과 개펄신앙은 낫지만,
이 신앙은 여전히 세상과 자기 중심적 신앙입니다.

② 무릎 신앙
발목에서 차 오르면 어느덧 무릎 신앙이 됩니다.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바지를 걷어붙이는 정도가 된 것입니다.
헌신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또한 당면하는 여러 문제와 위기 앞에서 무릎을 끓을 줄도 압니다.

종전에는 문제 앞에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아니면 최선의 노력이라는 것이 사방으로 뛰어 다니는 것이 최상책이었다면,
이제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기다리는 성숙함이 있는 것입니다.

눈물이 무릎에 떨어지기 시작하는 때요
은혜의 강물이 그 무릎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비로소 간증할 수 있고,
비로소 영혼으로 찬양할 수 있는 동기가 심겨진 신앙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안심할 수 없습니다.
무릎이라도 절반이기에 안정감이 없습니다.
물은 더욱 차 올라야 합니다.

어릴 때 물지게를 져 보았습니다.
힘들다고 반통만 채우면 물이 출렁거려서 걷지를 못하고
물은 물대로 다 없어집니다.
차라리 힘들어도 가득 채우는 것이 물도 긷고 걷기도 편합니다.

  롬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③ 허리 신앙
달리 얘기하면 가슴까지의 신앙입니다.
목사로 표현하면
입이나 손이 아닌 가슴으로 설교하는
가슴으로 목회 하는 경우입니다.
성도들 역시 귀로 듣지 않고 가슴으로 듣고
가슴으로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이때는 주님을 감격시키고자 합니다.
그리고 작은 주의 은혜에 「감사」가 넘칩니다.

◆ 성경책이 단순한 이스라엘 삼국지 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요 내게 향하신 사랑의 편지로 받아 드리고 됩니다.

◆ 교회에 가면 언제나 사람들의 위선이 보였는데,
이제는 그 위선 된 사람 속에 있는 주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찬송가를 불러도 아쉽고,
예배를 드려도 부족하고,
그저 감사 감격이 충만합니다.

장부의 신앙모습입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고 가슴은 뜨겁기에
웬만한 시험에도 넘어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주님 원하신다면,
삯바느질을 하고 피를 팔아서라도 한 몫을 드립니다.
사르밧 과부, 오병이어의 소년, 나귀를 드린 주인, 300데나리온의 마리아 등...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여느 신앙과 본질이 다릅니다.
무당신앙은 기원은 있으나 감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은혜가 있기에 감사 감격이 넘치는 것입니다.

또한 성장하고 성숙하기에 그 정도에 따라 달리 지적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④ 깊은 물
오늘 본문은 더 나아갑니다.

  5절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강가에 가보면
물이 두려워서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물이 좋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하나님과 그 은혜 앞에서
◆ 날마다 은혜를 주옵소서...하며 구하기만 하는 이가 있고,
◆ 그 은혜에 빠져서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차이가 무엇인가요?
대다수가 하나님의 은혜는 별스런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라든지?
아니면 별스런 때에만 온다는 자기 식의 믿음을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계시를 따른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편견을 따른 잘못된 신념입니다.
◆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 은혜의 주인공은 나입니다.

다만 신앙의 모험이 필요합니다.
깊은 곳, 넓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믿음의 수고가 요청됩니다.
왜요?
신앙은 차 올라야 하고,
은혜는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바다를 아시나요?
내가 애쓰고 수고하지 않아도
배가 순전한 항해를 이루는 순풍을 만난 것처럼
은혜의 바다는 순풍의 때입니다.

내가 수영하기 보담,
사족을 걷어 들여도 강이 나를 안고 나를 띄웁니다.
은혜의 강물에 헤엄칠 때는 내 수고와 애씀은 부질없습니다.
신앙의 신비함을 알 수 있는 때입니다.

어느 집사님은 이 신앙까지 2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제일 오래 걸린 적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그 30cm가 고비였다고 했습니다.

지게도 지고 일어나기가 어렵지 한번 지고 일어나면 갈 수 있습니다.
은혜의 생수!
사막 같은 세상과
사해 같은 이 시대로 흘려 보내야 됩니다.
거기에는 나를 거쳐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은혜를 받읍시다.
신앙을 키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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