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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바르게 반응합니다 (마 7: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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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르게 반응합니다 (마 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옛날 어떤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매우 연로하셨습니다. 그는 얼굴에 하얀 수염이 길게 나 있는 할아버지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정년이 없었습니다.

어느 주일 목사님은 시골 교회 성도들을 앉혀놓고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반응이 도무지 시원치 않았습니다. 대부분 딴청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괜스레 주보를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연거푸 자기의 손목시계만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설교하는 목사님이 얼마나 맥이 빠지겠습니까?

그런데 딱 한 사람은 예외였습니다. 맨 앞줄에 앉은 할머니는 목사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계속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 할머니 덕분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배가 다 끝났습니다.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아무래도 오늘 저의 설교는 전적으로 할머니를 위한 말씀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군요. 그런데 오늘 저의 설교 가운데 무슨 내용이 그렇게 감동적이었습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제가 잘 모르겠구요. 실은 제가 몇 일 전에 애써 키우던 염소가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얼굴에 있는 수염을 보니까 자꾸만 그 염소가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할머니는 또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할머니는 목사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5, 6, 7장에 걸친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다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그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놀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29절은 그들이 놀란 이유를 두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29절입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첫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바라신 반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철저한 순종을 보여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구원을 얻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무리들은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껏 놀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뿐입니다.

마13:53 이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런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왔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뇨? 그 모친의 이름은 마리아요, 그 형제들과 자매들도 우리가 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뇨?"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배척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놀란다고 해서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있는 마8:1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처음에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놀라서 예수님의 뒤를 많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요6:66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결국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향하여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들도 나를 떠나려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사온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우리가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분명하고 확고하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해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29절 상반부입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은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베풀었던 잘못된 가르침을 6가지로 실례를 들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옛 사람, 곧 자기들에게 유전을 전해준 장로들의 권위를 의존해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가르침을 베풀 때 이러한 표현을 썼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또는 "랍비 ○○○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렇듯 그들은 불완전한 사람의 권위에 의존해서 무리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신적인 권위로 권세 있는 가르치심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요1:1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우리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또 모든 선지자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뿐만 아니고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처럼 불완전한 인간의 권위에 의존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신적인 권위로서 절대적인 진리를 권세 있게 가르치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멸하십니다. 이러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님이 반석이 되어 주십니다. 그는 심판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어엿이 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반석이 되시고, 예수님이 피난처가 되셔서 그를 든든히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듣고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 날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밝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우리는 히9:27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두 가지 문제, 곧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 계십니다. 오직 한 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미국의 어떤 법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아가씨가 즉결 재판을 받기 위해서 법정에 섰습니다. 그는 교통법규를 위반해서 경찰에 붙들려 왔습니다. 재판관이 그 아가씨에게 물었습니다.
"Guilty or not guilty? 죄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죄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 아가씨는 순순히 자백했습니다.
"Guilty. 예, 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All right. 그럼 됐구먼. 3일 구류 혹은 벌금 100달러. 땅땅땅."
그리고 난 뒤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재판관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기의 법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는 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자기의 지갑을 열어서 그 아가씨 대신에 벌금 100달러를 꺼내서 지불했습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바로 그 아가씨가 그의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딸일지라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값을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니까, 아버지는 자기가 대신해서 그 죄값을 치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잠시 하늘 보좌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권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죄를 다 씻어 주셨습니다. 깨끗하고 정결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심판 날 자기의 죄값을 자기 자신이 치러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이미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어엿이 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반석이 되시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셔서 우리를 든든히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날마다 감사와 존귀와 찬미를 그에게 돌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그것을 다 베껴 써야만 되었습니다. 그 일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손으로 베끼는 일을 하다보니까 성경 지식에 관한 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선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대로 권세 면에서 천지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권세 있는 가르치심을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인 권위로 가르치셨습니다. 반면에 서기관들은 기껏해야 장로들, 옛사람들의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그 내용면에서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여러분,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큰 잘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모든 성경의 근본적인 정신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예컨대 서기관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보상법의 원리도 역시 사랑이라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통 미움과 복수심을 조장시켜 놓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성경의 근본원리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느냐? 왼편 뺨도 돌려대어라.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느냐? 겉옷까지 주어라.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는 십리까지 가주어라."
또 서기관들은 이웃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정신도 망각해 버리고 백성들을 왜곡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사랑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미움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내용은 한 마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천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천국에는 아무래도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10번 정도 읽어서는 천국에서 명함도 낼 수 없습니다. 100번 정도 성경을 통독해야지, "꽤 읽었구나!"라는 소리를 겨우 들을 수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자신은 성경을 300번 읽었다고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그러다가 천사가 그를 불러놓고 성경인물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그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무안을 당했습니다. 또 한 번은 성경을 500번 읽었다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성경 말씀을 암송하다가 그만 중간에 막혀버려서, 얼굴이 새빨개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이 허허 웃으시면서 큰 소리로 칭찬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세상에 성경을 이렇게 잘 아는 사람은 내가 처음 보는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신학교 교수이던지,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적어도 1000번 이상은 읽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은 주일학교 1학년인 어린 아이였습니다. 중국 연변에 있는 한 조선족 교회의 유년부 1학년인 그 아이는 성경을 겨우 한 번 읽었을까 말까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학교에서 오는 길에 그 아이는 교통사고를 만나 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에게 물으셨습니다.
"얘야, 성경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보아라."
그러자 그 아이는 더듬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성경은… 고조… 사랑입네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말을 들으시고, 성경을 제대로 알았다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기특한 듯이 크게 칭찬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읽거나 성경 말씀을 많이 암송한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정신은 사랑임을 알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말씀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서기관들처럼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마십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처럼, 그저 "좋은 말씀이다, 은혜로운 말씀이다, 놀라운 말씀이다"라는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맙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실천적인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우리가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흔히들 가르침, 곧 교육에는 세 가지의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이른바 교육의 ABC라고 합니다. A는 Add입니다. 지식을 더함으로서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B는 Broaden입니다. 시야를 넓히고, 이해를 넓혀주는 것입니다. C는 Change입니다. 잘못된 관점을 바로 잡아주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올바른 삶의 태도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그들은 기껏 놀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A와 B의 단계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삶이 바뀌어지는 C의 단계에까지 그들은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르치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습니까? 새로운 지식을 통해서 그들을 단순히 놀라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실제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넓은 문과 넓은 길의 삶에서 이제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의 삶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무리들은 기껏해야 놀라는 정도의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고 만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주일 그 교회에서는 새가족 초청 전교인 전도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분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 교회의 어떤 여집사님도 믿지 않는 남편을 간신히 이끌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날 설교가 끝난 뒤에 목사님은 새로 온 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시는 분은 잠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여집사님의 남편은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집사님은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여보, 어서 일어나세요. 당신도 일어나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작정하세요."
그러나 그의 남편은 한사코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여집사님은 남편에게 서운한 듯이 물었습니다.
"여보, 왜 일어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이 일어나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해 주기를 바랬어요."
그때 남편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여보, 그동안 당신은 교회를 다니면서 신자로 살아왔고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 불신자로 살았소. 그러나 그동안의 생활을 보면 당신의 삶이나 나의 삶이나 무슨 차이점이 있소? 생각해 보시오. 내가 화를 낼 때 당신도 화를 냈지요? 내가 큰 소리 치면 당신은 언제나 나보다 더 큰 소리 치지 않았소? 내가 일요일 야외에 나갈 때, 당신도 언제나 나를 따라서 나서지 않았소? 이와 같이 당신과 나의 생활이 똑같은데, 내가 새로 믿겠다고 작정해야될 이유가 무엇이오? 나는 믿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서지 않은 것이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서기관들처럼 그저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무리들처럼 "좋은 말씀이다, 오늘 좋은 말씀을 들었다"라는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실천적인 반응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삶의 변화가 있기를 요구하십니다. 이런 올바른 반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208장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머리털 보다도 더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졌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이 찬송이 우리의 고백이요, 우리의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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