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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국(王國)의 부흥 / 삼하 21:15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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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王國)의 부흥
사무엘하 21 : 15 - 22


성경의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의 예수는 군대장관으로 사무엘상하, 역대상하, 열왕기상하의 예수는 약속된 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왕은 수많은 대적들과 운명처럼 싸우는 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 통치 초기에 다윗 왕을 도와 크게 활약했던 용사들의 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기 다윗 왕국의 승리의 주체는 다윗 왕국의 배후에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을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셨습니다. 끊임없이 전개되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붙잡고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계승해 오셨습니다.
다윗 왕국의 싸움, 그리고 다윗왕국의 승리는 오늘 이 세대를 살아가는 성도들과 이 땅의 주님의 몸된 교회 운동에 더 없는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이 땅의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우리의 의로우신 왕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이 땅의 교회는 쇠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롬 8:17). 이 고난은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욥기 14장 14절에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30절에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빌립보서 1장 29-30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 23절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유형 무형의 악의 대적들과 싸우는 존재입니다. 우리 찬송가 543장에도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라고 했습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싸우면서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싸워서 쟁취해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의로운 왕의 통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왕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는

Ⅰ.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용기 있는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21장 15절에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 신복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라고 했습니다.
때는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직후에 일어난 블레셋 침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블레셋과의 전투는 다윗 왕의 즉위 초기에만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 전투에서 신복들을 거느리고 최전방에 나가는 용기를 가진 왕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살아온 그가 최전방에 나가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다윗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솔선하여 앞장서서 부하들을 지휘했던 것입니다.

여기 다윗이 피곤할 때까지 싸웠다는 말은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싸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싸움을 공격적으로 감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내려가서』라는 말은 유다 산지에서 공격적으로 블레셋 평지로 내려갔음을 의미합니다. 공격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이러한 영적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세우는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앞선 자들이 본을 보이지 않는 교회는 부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무슨 어려운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원로들이 입을 다물고 관망이나 하고 여론수렴이나 하는 안일한 태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 시키기는커녕 박제화시키는 처사인 줄 알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도자에게 무슨 어려운 일이 라도 생기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구원을 청한 한편 강도처럼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연약을 이용한 안나스의 종처럼 파렴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향하여 희생하는 본을 친히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희생하는 제물로 오셨다는 것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나타내셨습니다(요 3:5-10).
요한복음 13장 5절에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고전 4:16). 또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빌 3:17).
여기에 나타난 지도자는 오직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의도한 오늘의 지도자는 주께서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맡기신 오직 한 사람 목사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치리를 돕는 장로, 집사, 권사, 교사, 그 단체의 장, 기관의 장, 부서의 장 등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조직된 조직과 직분에 앞장 선 자들이라고 확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성가대 같으면 지위자, 반주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앞선 자들이 주의 몸된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모험적인 신앙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의지하는 삶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말만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아니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말하는 바는 행하되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마 23:3).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왕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는

Ⅱ. 교회 지도자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단결된 힘이 필요합니다.

본문 21장 17절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고 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조카이자 요압의 동생인데 다윗을 도와 블레셋을 물리치는데 크게 공헌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등불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다윗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전쟁터에 참여하는 것을 만류하고 있습니다. 등불이 꺼지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 자신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상징하는 등불이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등불 되시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등불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예선했습니다.
사무엘하 22장 29절에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 되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8편 28절에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이 전쟁터에 목숨을 버릴지언정 이스라엘의 등불이 되는 다윗이 전쟁터에서 모험하는 것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이렇게 왕의 목숨을 위하여 걱정하고 왕을 아끼는 백성들이 있는한 블레셋 군대가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와 성도들 사이에 서로 아껴주고 서로 염려해 주는 아름다운 교제는 하나님의 왕국(교회)을 부흥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시대와 교부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회자와 성도들 간의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지 아니 했을 때 교회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한 채 무능한 교회로 전락한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비록 떨어져 있지만 바울과 성도들의 영적 교제는 마침내 큰 일을 이루어 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를 치는 유형무형의 정체들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 자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적이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13장 7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고 했습니다.
'왕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는

Ⅲ. 교회에 속한 정예 멤버들의 죽음을 불사하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정예 멤버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직분자 내지는 교회 내 구심점을 이루는 성도를 말합니다.
본문 21장 17-22절에 특별히 거명된 4사람의 다윗의 용사들이 있습니다.

①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윗의 조카이자 요압의 동생이라고 했습니다(17절).

② 후사 사람 십브개가 있습니다(18절). 이 사람은 다윗의 30용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대상 20:4). 이 사람은 후사 사람 므분네와 동일한 사람입니다(삼하 23:27).

③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있습니다(19절). 이 사람은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쳐죽인 자로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채와 같았습니다. 이 사람은 다윗의 30용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는 다른 동명 2인입니다(삼하 23:24)

④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있습니다(21절). 이 사람은 암논의 교활한 모사였던 요나답의 형제 중 한 사람입니다. 요나단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무장입니다.
이렇게도 다윗의 부하 장수들이 상대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힘에 겨운 적들이었습니다. 르바임 거인 족속의 후예로 300세겔(약 3, 4kg)의 창을 휘두르는 이스비브놉을 상대한 아비새(16-17절)가 있는가 하면 요나단이 상대한 자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각 6개씩 있는 기형적인 거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용사들은 힘겨운 상대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블레셋은 르바임 족속 거인들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침공해 보았으나 모두 다윗에게 참패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주님은 교회부흥을 위하여 자기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교회 정예 멤버들의 헌신적인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한 바울의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윗은 수많은 싸움터에서 수많은 사선을 경험한 왕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그 이름처럼 삶을 산 것은 그가 유능하거나 전술에 능한 용장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한 일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순응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결코 가볍거나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순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큰일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생과 사, 축복과 저주가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왕국(교회)운동에 싸우는 용사들로 확실히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싸움은 오합지졸의 무의미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선한 지도자가 진두지휘하는 필연적인 싸움입니다. 당신의 승리를 위하여 우리를 진두지휘하시는 우리의 궁극적인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치는 영적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세운 지도자를 사랑하고 그의 말을 따르고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윗의 용사들처럼 교회운동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담대한 충성심을 주셨습니다. 아니 아예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대동단결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더욱 부흥시켜야 합니다. 우리 앞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태산같은 난제들이 가로막고 있더라도 겁내지 말고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부흥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철저하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 누구와 비교하지 말고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타인의 부족을 핑계삼고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른 이들과 공통분모를 찾을려고 하는 자는, 그야말로 상전의 눈치나 보는 종이지, 상전에게 상 받기를 원하는 종은 아닐 것입니다. 전자의 종은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인본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종은 신본주의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부흥은 곧 나와 나의 가정과 나의 생업의 부흥과 정비례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목자의 설교를 생각하고 고요한 밀실에서 원래 나였던 사람을 만나보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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