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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의 부흥을 사모하며 (느 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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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부흥을 사모하며 (느헤미야 8:1-12)

목회와 신학 10월호는 "참된 부흥 다시 성경이다"라는 주제로 특집 논단을 개제했습니다. 저는 이 글들을 읽으면서 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특집의 글을 실으면서 편집자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중세의 태산같이 거대한 교권을 향하여 옳은 방향을 시작했고 끝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성경을 알았다는데 있다. 교회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갔을 때, 드디어 모든 희망이 가능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참된 부흥을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한다. 그것 외에는 이제 기대할 것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성경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는 IMF시절을 능가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통치 지도력의 부재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대통령과 정부, 그것을 즐기기라도 하듯 대통령과 정부 흔들기에만 매달리는 정치권, 경제는 바닥에서 헤매고, 잦은 비와 태풍으로 인하여 망연자실하고 있는 농민들, 청탁과 비리에 연루되어 줄줄이 잡혀 들어가는 사회 지도층들의 초췌한 모습들, 지금 이 나라는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몰라 하며, 어려운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두려움에 가슴을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교회는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오히려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교회는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그 자체는 물론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교회는 사회와는 다른 모습을 가져야만 합니다. 교회의 모습은 사회생활의 모범답안이아야 하고, 사회로부터 추종하고 싶은 열망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부흥이요, 말씀의 회복을 통해 가능합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말씀의 부흥을 통해서 그 시대를 구원하시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귀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성전이 지어지고 성벽이 견고히 세워졌지만, 영적으로는 아직도 혼란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치유하고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백성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주축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라를 새롭게 하는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 시대가 어렵지만 교회를 통해서 말씀의 진리가 흘러나와 치유하고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대하며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이 없어서 문제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자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설교 전반의 서론으로 우리가 그 동안 잘 못 가르쳐 왔고 배워왔던 말씀에 대한 오해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우선, 축복과 형통에 대한 오해입니다.

축복의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과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을 다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하심으로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이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우선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적인 축복이 가장 일차적인 축복이며, 육체적인 것은 말 그대로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영적이며 도덕적인 일차적 축복 보다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2차적 축복에 관심을 갖고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축복과 형통이라고 하면 언제나 2차적인 축복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형통의 축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은혜를 말합니다. 형통의 축복이란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만 의뢰하고, 그 분과 동행하면서 그 상황을 '꿰뚫고 지나가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으로 어떻게 인도하시든, 그래서 눈물과 고통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 이겨내고 본향을 향해 전진하는 신앙, 이것이 차원 높은 그리스도인의 형통의 원리입니다. 형통의 축복이란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벨론에서 온갖 핍박과 회유를 받았지만, 그들이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과 하나님 말씀 중심의 가치관으로 무장하여 흔들리지 않고 그 믿음을 지켜나가던 그 당당함입니다. 요셉이 비록 낯선 나라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된 것처럼,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형통의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의 축복에는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요셉으로 인하여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들로 인하여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진정으로 형통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그 주변의 사람들이 변화를 받을뿐만 아니라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해하고 추구하고 있는 형통의 복은 수많은 부작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980년대 초 한국 교회에는 이른바 형통신학이라는 게 유입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이것이 이단적이고 비 성경적인 것이라고 비평을 받았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교회가 형통신학의 가락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일제의 압박과 6.25 전란을 통해 핍박과 가난을 몸으로 체험한 바 있는 세대와 6,70년대 경제적인 어려움을 아는 세대에게는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형통할 것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복음중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그야말로 축복과 형통을 보장 받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건물이 큰 교회가 축복받은 교회이고, 성도가 많이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는 성공한 목회자요, 사업이 잘 되는 성도가 축복을 받은 성도라는 등식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교회는 온갖 부정과 부패에 연루 될지라도 돈만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십일조 많이 드리면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고 추켜세우며 박수쳐주었고, 그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것에 대한 부작용들이 지금 이 사회에 만연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의 기능에 대한 오해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오직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하고 책망해서 의롭고 바른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밝히 알려주는 삶의 지침이요, 유일한 규범이며, 원칙이며 모범 답안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올바르고 선하며 축복된 길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인생들을 심판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삶의 기준으로 주신 말씀이며, 모범 답안으로 주신 것이기에, 마지막 날 이 말씀에 근거하여, 그 진리를 기준으로 모든 인간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운동장에서 달리는 선수들에게 룰과 같은 것입니다. 선수들이 룰을 따를 때, 그 경기는 재미있고 원활하게 진행됩니다. 그러나 룰을 어기면, 당장 심판으로부터 경고나 퇴장 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올바른 길과 축복으로 인도하는 지침이요 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원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곳에 실패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복종하라(신30:19,20)"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심판의 기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수같이 우리의 가슴을 찌를 때, 우리는 그 말씀을 애써서 외면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치 스데반을 죽이던 무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렸음에도 회개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말씀과 친숙하기 때문에 자신이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아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아는 대로 행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붙들어 매고 우리의 삶이 그 말씀의 원리를 따라서 올바르고 축복된 인생의 길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하나님과 말씀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오해입니다.

사랑의 관계란 교제를 통해 이루어지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관계를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 40년의 생활이 끝나갈 무렵에 모세는 모압 평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새롭게 강론합니다. 이것이 신명기서입니다.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이 말은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권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근본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 이어서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이 말씀은 '쉐마'라고 알려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 신앙고백의 핵심은 하나님을 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의 삶에서는 말씀과 상관없이 산다면 그 사랑고백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라(요14:21)."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가지고 그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는 사람이 참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의 관계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교제가 필요합니다. 사랑의 관계는 교제를 통해 이루어지고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교제가 없는 사랑의 관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계를 성숙시켜나가려면 끊임없이 교제를 이루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성숙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이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그 분께서 하신 말씀을 늘 가까이 두고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아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올바른 관계에서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형통의 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은 손해가 되더라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잠깐의 유익과 즐거움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한다면, 그것 때문에 더 많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손해입니다. 그러나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올바르게 세워지기 때문에 그는 결코 손해 보지 않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숙되어질 때,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영적리더로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에 빠진 세상의 소망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히 서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온 사람들이 새로운 부흥과 새로운 역사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일어섰던 것처럼, 오늘 이 나라 대한민국을 책임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세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과 세속적 야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살도록 강권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보고를 간직하고 사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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