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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국교회의 사명과 갱신 / 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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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사명과 갱신
본문: 요한계시록 2: 1-5

한국 교회의 성장이 어느 때부터 인가 정지, 또는 하락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세속화되어가면서 점점 그 쇠퇴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목회자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의 의식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기독교는 이 땅에서 설자리가 없어질 것입니다. 유럽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지만 서양은 그래도 기독교적인 기반이 있었기에 이 정도의 서서히 죽어 가는 흐름을 타고 있으나 한국적인 상황은 기독교적인 기반이 아니고 무속적이고, 유교적이고, 불교적이고, 기타 혼합적인 기반 위에 기독교의 영성이 세워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차리지 못하면 그 죽어 가는 속도는 가속도가 붙어 막을 방도가 없이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1. 한국교회가 갱신되어야 할 점

오래 전에 아프리카 콩고의 한 마을 전체가 다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선교사들의 사역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놀라운 부흥은 두 여인과 한 남자 성도의 진실한 회개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두 여인의 마음이 성령님께 깊이 붙들리어 자기의 삶을 돌이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한 여인은 교회에 바쳐진 쌀을 한 자루 갖다 쓴 것이 왜 그런지 마음에 자꾸만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것을 교회에 가지고 와서 성도들 앞에 고백합니다. '사실, 이 쌀은 교회에서 쓰여져야 할 것인데 제가 썼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랬더니 또 한 여인이 성도들 앞에 나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남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집의 계란 한 개를 주인에게 말하지 않고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회개합니다.' 이어서 한 남자가 나와서 고백을 합니다. '저는 어떤 선교사와 교제를 하면서 선교사 집에 갔다가 선교사에게 말하지 않고 책 한 권을 몰래 가지고 나왔습니다. 내가 그것을 다시 돌려 드리며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자기의 삶을 바로 잡으려는 이 세 사람의 진지한 고백 때문에 이 마을은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에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갱신되고, 회개하려면 먼저 어떤 점이 잘못 되었는 가를 알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첫째, 한국교회의 직분이 계급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당회장 제도와 권사, 서리 집사는 세계 어느 나라 교회에도 없고, 오직 한국교회에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기 위해, 집사제도를 두었습니다.(행6:4) 그리고 모세와 예수님만이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을 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담임목사가 당회장과 주일학교 교장, 유치원 원장 등의 교회내의 높은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독재자가 되기 위해 한국교회가 만든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모세의 자리로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앉은자리입니다.(마23:2) 웃시야 왕은 제사장이 하는 일을 자신이 하려다가 문둥병이 걸렸고(대하26:16-26),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습니다.(삼상13:8-14) 교주가 되려는 이러한 제도는 없어져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원로목사 밑에 당회장, 그 밑에 부목사, 강도사, 전도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 권찰, 서리집사, 성도 순으로 계급화하고 있습니다. 그
런데 성경에는 장로(감독), 집사외에 이러한 직분들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엡4:11의 목사는 오늘날 성가대나 교사와 같은 사역임) 또한 장로와 집사도 동등한 직분이었지, 장로 밑에 집사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도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며, 모두가 한 형제입니다.(마23:8-10)

둘째, 오늘날 일부 교회 목회자들은 율법 중 하나인 십일조와 헌금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맥추감사, 추수감사, 부활절 감사, 생일 감사, 성탄절 감사 및 건축헌금, 헌신예배헌금, 선교 헌금, 주정 헌금, 작정 헌금, 구역 헌금, 개축 헌금, 일천번제 헌금, 약속 헌금 등 성경에도 없는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교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마23:4, 마21:12-13)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율법, 죄, 죽음 등)진 자들을 쉬게 하리라 하시고(마11:23),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를 사라고 하십니다.(사55:1) 하나님은 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 정성을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십일조나 헌금을 바치는 것 보다 인애와 긍휼과 순종과 선행을 더 기뻐합니다.(시40:6, 호6:6, 마9:13, 마12:7, 히13:16, 삼상15:22, 요5:29 등) 또한 십일조와 헌금은 하되 말씀대로 바르게 사용되어야 합니다.(신14:28-29), 신26:12, 렘22:16 등)

셋째, 교회는 제자 양육 후 흩어져 복음 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양육하시고, 그들이 나가서 또 제자를 양육하고, 그 제자들이 또 나가서 제자를 양육하고 하여서 땅 끝까지 복음 전파하기를 원하시는 데,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을 교회 우리 안에 가두워 놓고, 평생 그 교회의 교인화되기 만을 원합니다.

넷째, 일부 교회 목사들은 화려한 교회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으나, 주님은 이 같은 행위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사66:1, 행7:47-48, 행17:24 등)
말세를 만난 지금은 교회건물을 거대하게 건축할 시기가 아닙니다. 교회건물을 우상화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교회건물을 지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초대교회 당시는 성도들의 집에서 예배를 보았습니다.(골4:15, 고전16:19, 몬2 등) 비록 조그만 교회건물이라도 매일과 같이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모여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히10:25)

다섯째, 기독교 교단, 교파간 반목과 분쟁 그리고 자격 없는 목사 후보생들을 양성한다는 무인가 신학교의 난립과 엉터리 석, 박사학위 등의 남발입니다. 이밖에 한국교회의 일부 목사들은 스스로를 섬기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옛날 바리새인, 서기관들처럼 외식하며, 상석(높은 감투)을 좋아하고 대접받기를 즐기며...(마23:1-35) 해외 나들이, 고급승용차(비교: 마21:5), 고급호텔 세미나 등 물량주의와 권위주위를 추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에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떠나가라 하실 것입니다.(마7:21-23) 그리고 교회의 대형화와 양적인 증가에 치중하다가 보니 거품교인이 많습니다. 여기서 거품교인이란 믿음이 없어도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 거품교인의 유형도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교회에 나오는 교인, 기복적 신앙에 의해 믿음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실리 추구적인 측면 즉 자기 사업이나 이익을 위해 교회를 나오는 교인, 친교를 위한 장으로서의 교회의 이용 등 이런 저런 목적으로 출석하는 교인의 수가 많아짐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기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솔로몬 시대에 이방여인들이 이스라엘에 우상문화를 퍼트린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 거품교인들이 세상이 추구하는 돈, 명예, 권세 등 허망한 가치관과 잘못된 사고의식들을 교회 내에 끌어 들어와 그리스도의 근본정신인 사랑, 겸손, 온유, 희생의 정신 등을 희석하여 교회의 섬기는 직분을 계층적 서열로 바꾸어 놓고 교회적 리더쉽을 혼돈케 만들고 이런 저런 텃세로 인해 새신자들이 발 부칠 곳을 잃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가 무자격 교역자 양산으로 목회자의 자질이 함량부족이라는 점과 영적인 준비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일 때문에 혹은 세속적인 관심 때문에 매우 분주합니다. 그 때문에 목회자는 기도하는 무릎을 상실하였고 성경과 신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기는커녕 연구할 생각조차 갖지 않아도 그 양심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게끔 되었습니다. 목회자 자신은 안일한 성경연구로 인해 기존에 나와 있는 성경 공부 책이나 외국의 베스트셀러를 번역하여 그대로 교인들에게 소개하는 대리자로 전락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 목회자들이 눈에 보이는 양적 증가와 성도들의 삶의 아무런 변화를 줄 수 없는 비전만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불신자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를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한국교회는 자체의 물적, 인적 자원을 사회봉사나 구제에 활용하기보다는 대부분을 교회당 증축, 기도원이나 수양관 건립, 교회묘지 구입 및 교육관 건축 등 보이는 일, 대형화하는 일에만 치중했다는 점입니다. 이러다보니 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 마치 교회가 교역자들의 사업장이나, 교인들의 친교장소나 지식을 전하는 강연장, 심지어 결혼식장이나 구제단체로 변모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되찾을 때만이 부흥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요, 예배하는 곳이요, 찬송하는 곳이요, 선교하고 봉사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참된 터는 주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바른 교회, 좋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힘을 합하고, 마음을 합하고, 뜻을 모읍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여섯째, 많은 성도가 빛과 소금, 사랑 운운하면서 말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습니다.(약2:14-16, 계3:8, 딛1:16) 당신은 그리스도인의 이름에 합당한 즉 세상의 빛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복음 전파하실 때에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이 하실 것이요”(요일 1:8∼9)

사람들은 지금 우리 사회를 총체적 위기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정치 경제 사회 환경에서 많은 문제가 나왔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희망이 없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그저 제도적 구조적인 면만 바뀌면 될 것 같으나 사람의 강퍅한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진정한 해결은 없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에서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또 윗사람을 인정하지 않아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어른을 공경할 줄 모릅니다. 스트레스에 시달린 현대인들은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정신적 경련 속에서 일을 저지릅니다. 최근 청소년들이 자살사이트를 보고 직접 살인을 저지르는 등의 문제가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한국교회는 부패한 사회도덕성과 아울러 민족갱신을 통한 국민 의식개혁에 중차대한 사명과 책임을 통감하면서 교회가 어떻게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해야 할지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십자가가 많은 나라도 없을 텐데 이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보면 스스로 부끄럽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교회가 스스로 새로워지며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라와 이 사회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교회일치운동, 사랑의 운동, 회개의 운동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 민족의 등불이 되기를 힘쓰며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 젊은이들은 미래 사회를 여는 기둥입니다. 민족에게 정신적 시멘트가 되어 세계 속에 한국을 빛내줄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을 위해 평안과 소망을 가져다주십니다. 그 시대의 종교는 바로 그 시대의 수준을 재는 척도입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배워온 교훈입니다. 사회가 병들고 흔들릴 때 그 사회를 살려내는 것은 정치도 경제도 군사도 교육도 아닙니다.
사회가 파멸로 치달을 때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영적 대각성의 파도를 일으켜 한 시대의 갈등과 모순을 극복시키는 사회개혁에 앞장 서왔습니다. 100여 년전 이 땅 위에 흑암이 짙었을 때에 복음의 빛으로 역사의 새벽을 일깨웠던 신앙의 선배들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순교의 피와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진리 가운데 민족을 영도했던 우리 신앙의 선열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앞서가신 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토양 위에서 한국 교회는 성장했고 짧은 역사 속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세속문화의 오염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점차로 신앙의 본질마저 위협 당하는 시점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면에서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왕성하여 민족사에 있어서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어느 덧 교회 내부 뿐이요 사회와 동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사회는 부표처럼 비전을 잃고 정도와 원칙을 벗어나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사회를 지탱해야 할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울인 것입니다. 이 겨레의 마지막 진실이어야 할 한국교회는 민족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아픔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교회는 깨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불 꺼진 등처럼, 맛 잃은 소금처럼 걷기를 포기해야 할 때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자로 오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으로 회개의 열쇠를 다시금 손에 쥐어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어리석은 상처를 반복하지 말고 이 세상에 영원한 하늘의 생명력과 피묻은 십자가 복음으로 채워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 속에서 진실과 정의를 지켜야 할 양심의 보루가 되도록 거듭 자신을 정화시키는 개혁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진실에로의 회귀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가 된 것을 돌이켜 진실한 열매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숫자가 적어도, 가난해도, 무식해도, 진실해야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해방직후 38선을 넘어 월남하려던 작은 배가 밤새도록 노를 저었건만 아침에 보니 어젯밤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닻줄을 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얻기 위해 우리는 세상줄을 끊어야 합니다. 허수의 줄, 허세의 줄, 욕심과 교만의 줄, 죄악의 쇠사슬을 말씀과 성령의 검으로 잘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면한 교회의 갱신은 민족을 살리는 생명의 근원이며 세계를 이끌고 나갈 핵심윈리이며 동시에 이 민족 겨레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할 원동력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성전으로 들어가서 채찍으로 장사꾼들을 내몰았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들지 말라”고 야단을 치시면서 채찍으로 내리치셨습니다. 당대의 성전이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채찍을 높이 드신 것입니다. 이 썩어 냄새나는 부패의 상징, 유대교의 상징인 성전을 완전히 개혁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자들은 바로 이 성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성전을 독차지하고 있는 저들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가 일반 백성들 속으로 전파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야 하는 성전이 오히려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 성전을 타고 앉아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성전을 다시 재건하시려고 예수님은 성전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거대한 변화가 일고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는 급변이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기업이나 모든 조직들이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시대의 필연적인 요청 때문입니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교회도 변화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해나가야 합니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회뿐만 아니라 많은 기관들과 조직체들이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사회적 변화가 학교 병원 대학 봉사기관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아직도 교파간의 경쟁과 대립, 성장과 업적주의의 옛 패러다임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새 술은 마련돼 있는데 새 술을 담을 그릇이 준비돼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로 고백하는 예수님은 낡은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왔던 혁명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패러다임 변혁운동은 성전체제의 정화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는 바리새, 에세네, 열심당 운동 등과는 달리 세계변혁운동의 목표를 권력구조의 개혁이나 사회경제구조의 변혁에 두지 않고 성전체제의 정화에 두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개혁운동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살롬이 파괴된 근본적인 원인을 하나님을 섬겨야 할 성전이 장사하는 사람들의 소굴로 변질된 데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때문에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를 혁파하는 것이 참된 정의와 자유를 보장하는 평화를 이루는 첩경이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서 유대를 통치하기 위해 세운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을 완공하기 위해 헤롯에게 온갖 아첨을 다 떨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의 물질공세를 통한 정치목적과 종교목적이 혼합된 타락의 온상이었습니다. 이 곳을 중심으로 극에 달한 대제사장 세습과 유대교의 교권주의는 잘못된 권력구조와 상업주의로 나아간 나머지 진정한 예배는 온데 간데 없고 형식주의에 빠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운동은 종국에는 정치·경제·종교·사회를 움직이는 특권층의 기득권을 근본적으로 위협했습니다. 또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이어진 이스라엘 민중들의 대변혁운동으로 발전돼 낡은 권력구조와 사회체제의 붕괴를 가져왔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의 탄생을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 한국사회가 이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할 교회들이 이 세속 세계의 권력과 결탁하고 상업주의의 온상이 돼 버린 데 있지 않나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키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님께서 회복하신 진정한 교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교회에 침투한 세상 가치와 맘몬의 지배를 물리치고 성장주의와 공적주의로 얼룩진 과거의 낡은 모습을 청산해야 합니다.종교 개혁은 부패한 교회, 경직된 종교, 변질된 신앙을 썩지 않고 부드럽게 열린 종교, 영원토록 변치 않는 신앙으로 개조하는 데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구조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교권주의의 틀을 지양하고 전문영역과 전문성을 중심하는 선교구조로 개혁돼야 합니다. 둘째, 목회자나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개혁 운동을 통해 딱딱하게 굳어진 구조를 열린 구조로 바꿔 가야 합니다. 셋째, 성직자에게 편중된 교회구조를 평신도 중심의 분산된 구조로 재편해야 합니다. 넷째 성장에서 사회 섬김으로 교회구조를 바꿔가야 합니다. 다섯째,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연합기구 탄생을 통해 화해와 일치를 이루고 기독교의 위상을 높여가야 합니다.

추운 겨울밤 넓고 큰그릇에 고슴도치 떼를 담아 밖에 내어놓았습니다. 영하 20도 혹한 속에 찬바람이 불어오자 부들부들 떨던 고슴도치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따뜻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마다의 침이 상대방을 찌르자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피를 흘립니다. 고슴도치들은 아파서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흩어지면 춥습니다. 추워서 부들부들 떨다가 견딜 수 없어 다시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고... 날이 밝아왔습니다. 아침에 나가 보았더니 다 죽어 있었습니다. 절반은 얼어서 죽었고 절반은 피를 흘리고 죽어 있는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공동체들이 급속히 깨어져 가고있습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저마다 혼자 살아가겠다고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립습니다. 용서와 용납의 자리가 그립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교제의 자리가 그립기만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아쉽고 외로워서 모여 봅니다. 서로들 의지해 봅니다. 그런데 공동체가 연습이 안되어 있기에 갈등을 느끼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문제를 극복할 줄 모릅니다. 나는 너에게 상처를 받고 너는 나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흩어져갑니다. 흩어지면 다시 외로움을 느낍니다. 춥습니다. 추위에 떨어 봅니다. 세상이 혹독하기만 합니다. 공동체가 그립습니다. 은혜의 자리가 그립습니다. 다시 몰려옵니다. 그러나, 몰려와서는 또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증오심만 키워갑니다. 주님 오시는 마지막 날 교회 문을 열고 보았더니 절반은 피를 너무 흘려 죽어있고 절반은 추위에 얼어서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사랑 받고 사랑 나눌 공동체가 없어서, 상처가 치유되고 쓰러진 자아가 회복될 삶의 자리가 없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벅찬 감격과 은혜를 경험할 자리가 없어서 부둥켜안고 씨름하다 죽어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면류관 쓰는 아름다운 교회를 건설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픕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받은 은혜와 감격을 나누기 위해, 받은 상처와 약점을 내어놓고 회복하며 치유 받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수고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음을 인해 아프기만 합니다. 오히려 저마다 썩을 세상만을 위하여 일하고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웠던 영광스러운 성도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저마다 가슴속에 상처를 안고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위에 떨고만 있는 것입니다. 참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이 그토록 세우기를 원했던 그 거룩하고 아름답고 능력 있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한가족이요 함께 삶을 나눈 하나된 공동체였습니다. 로마의 창칼과 핍박, 콜로세움과 십자가에서의 순교 앞에서도 성도들은 매일 카타콤에서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대그룹으로 함께 모여 주님의 피와 살을 나누며 감격하고 사랑을 나누고 상처를 치유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에 불타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였다’고 말씀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공동체, 주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교회. 바로 이것이 오늘날 주님께서 보고 싶어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도 이 일을 감당할 동역자들, 성도들,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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