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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하는 이유 / 왕하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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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야 하는 이유
열왕기하 7:3-9

제2차 세계대전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트에 관한 영화 <로베로 장군〉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레지스탕트들이 감옥에서 끌려나와 사형 당하게 되었습니다. 포로들이 기둥에 묶이는 상황에서 한 사람이 외칩니다. “나는 장사나 하고 돈이나 벌며 살다가 잘못 잡혀온 사람입니다. 나는 저항운동과는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나는 무죄입니다.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독일 군들은 아랑곳 않고 그 사람을 기둥에 묶습니다. 그때 한 레지스탕트가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그것이 당신의 죄입니다. 지금까지 5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고 수백만 명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우리 조국과 민족이 멸망 직전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늘 당신이 죽어야 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죄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사실은 적극적으로 죄를 살펴보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도 죄지만, 해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인데도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가 해야 할 중요한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적인 책임으로 ‘Social Mission’이라고 합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야 될 분명한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바로 복음 전도의 사명입니다. 사람의 육적인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면, 영혼의 굶주림을 돌보고 관심 갖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더 본질적인 일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여 지금도 죽음을 향해 자기 생명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생의 가치와 목표를 일깨워 주고 복된 인생을 살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전도는 특심한 사람들만이 하는 일이거나, 아니면 약간의 광신기가 있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교회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 장애자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며 비판적으로 외치는 사람들 마음속에 보다 더 본질적인 전도 개념이 없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운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가 해야 될 일, 즉 복음 전도를 하지 않고 본질이 아닌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은 상당히 큽니다. 사마리아 지방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괴로움을 겪고 있는 그 때에 벤하닷 왕이 아람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서 성을 포위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나마 외부에서 들어오던 양식 줄도 끊어져 성안에 갇힌 사람들은 더 이상 먹고 살 길이 없었습니다.

앞장인 6장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을 잡아먹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문 어귀에 있던 문둥이 네 사람이 서로 의논을 합니다. “우리가 성안에 들어가도 먹을 것이 없고, 여기 있어도 죽을 테니 차라리 아람 군대를 찾아가자. 여기서 죽으나 가서 아람 군대의 칼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가자” 결정합니다. 그런데 가보니 아람 군대는 도망가 버리고 그들이 남겨놓은 음식과 양식 그리고 금은보화가 가득 널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람 군대가 남긴 음식을 마음껏 먹고 보화를 감추었는데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 성에는 오늘밤에 죽는 사람만도 많을 텐데 우리가 이 일을 알리지 않으면 큰 죄가 될 것이다.” 그래서 네 명의 문둥병자들은 성으로 달려가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사마리아 성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문둥병자처럼 양식이 있는 곳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목표를 알고 의미 있는 인생, 마지막 종착점을 알고 있습니다. 풍족함을 누리는 우리들 곁에는 이 사실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도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이야기에서 레지스땅트와 함께 총살당했던 한 사람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살인방조죄는 된다는 게 오늘 본문이 우리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먹지 못해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 목말라 애타하는 사람들에게 어디 가면 생명을 구할 수 있는지를 아는 너희가 침묵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가 아니냐.’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해야 될 일은 무엇인지 문둥병자들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동시에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도 함께 더듬어 봅시다.

첫째로 우리의 본래 정해져 있는 운명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본문 4절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지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지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 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합니다. 문둥병자들이 지금까지 살던 장소를 떠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자리에 있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기 있어도 자기들을 기다리는 건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움직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의 양식을 좇아 삶의 자리를 바꿉니다. 이사를 가기도 합니다. 집도 이사하지만 마음의 이사도 갑니다. 삶의 자세나 인생관을 바꾸기도 합니다. 문제는 육적인 갈급함은 금방 느끼기 때문에 바로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지만 영적인 갈급함은 잘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삶에 의미와 목표를 알 수 없어 질 때는 마음에 회의가 들고 방황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영적 굶주림 속에 있다는 것을 이때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바로 그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면 그들은 마음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마음 문 열고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자기들이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진정한 운명은 영원한 형벌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했습니다. 또 ‘죄의 삯은 사망’ 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로되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리니’ 누구나 죽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심판 다음에 영원한 형벌,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운명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지선 자매가 한 간증을 기억하십니까?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지옥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가야 될 운명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멸망 받을 백성〉저와 여러분들의 현주소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의 운명을 알고 나면 죽지 않고 살 방법은 없는지, 인생을 새롭게 할 길은 없는지 찾게 됩니다. ‘오늘 나는 평안하다. 내 삶에 만족한다.’ 는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해 봐야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눈이 조금 뜨여 ‘이렇게 살아봐야 남는 게 없구나.’ 하는 걸 깨달으면 뭔가 변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때 성경이 말씀하신 우리 운명을 가르쳐 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찾게 돼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운명을 잘 아는 것 같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잘 모릅니다. 암 병동에서 일하는 의사 선생님의 글 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암 병동에서는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1년 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주로 치료 받습니다. 치료 중에 암환자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고스톱을 자주 친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돈을 조금 따면 무척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너 얼마 땄냐?” “2만 원 땄다.” “너는 얼마 땄냐?” “3만 원 땄다.” 환자들이 서로 자랑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의사로서 서글픈 생각이 든답니다. 그 사람들의 삶이 2개월 내지 3개월 후면 끝이 나는데, 지금 돈 2~3만 원 땄다고 자랑하며 미소가 가득한 것을 보면 왠지 모를 서글픔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이미 시간이 대강 정해져 있고 우리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만 다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보다 빨리 이 땅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마지막도 그 암 환자들과 같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땅이 주는 잠시 잠깐 즐거움 앞에 온 인생이 걸려 있는 것처럼 거기에 몰두하고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습 아닙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우리 운명을 직시해야 합니다.

정말 내 삶의 마지막은 무엇인가? 허무한 인생을 돌이킬 수 있는,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뭔가가 없을까? 우리는 그것을 일깨워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운명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모습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로 우리 전도 대상자들을 은혜 풍성한 잔치 자리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둥병자들이 풍성한 삶을 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죽으러 아람 군대를 찾아갔지만 장막 안에 산처럼 쌓인 식량과 음식, 그리고 은과 금을 발견했습니다.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비로소 만족을 얻었습니다. 갈급하여 주리고 목마른 인생을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배설해 놓으신 그 구원의 놀라운 잔치에 초청하고 인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한다면 그들은 변화되고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네 명의 문둥병자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아람 군대가 있는 곳으로 갔을 뿐입니다. 장막 안에 들어가 보니 음식이 있었는데, 그들이 만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다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냥 가서 누리기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방식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를 구원하고 운명을 바꿀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그 풍성한 구원의 은혜만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짊어질 모든 죄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짊어지고 가게 만드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건 모든 것을 다 갚았다, 죄의 대가를 다 치렀다, 우리가 받을 저주를 주님께서 다 겪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선물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인지 모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짜로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구원 받을 가치가 없는 나 같은 존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인생은 변화되고 새로워지게 돼 있습니다.

본문 앞에 있는 1절과 2절을 보면 사람들이 부정 탄 음식이라며 먹지 않는 나귀 머리나 비둘기 똥이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는 그때에 엘리사가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내일 이맘때 되면 쌀과 보리쌀이 정말 싼 값에 보급될 것입니다.” 그때 한 신하가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창문을 낸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때 엘리사가 얘기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당신은 보게는 되지만 그 양식을 먹지는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신하의 말이 맞습니다. 왜냐 하면 양식을 싸게 사 먹으려면 성을 둘러싼 군대가 먼저 물러가야 됩니다. 물러가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성 안에 사람이 다 먹을 만큼 양식을 사오려면 수십 일이 걸리기 때문에 당장 내일 이맘때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에워싼 죄의 허물을 벗겨 주실 뿐 아니라 풍성함까지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생명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한 번 맛보면 삶이 달라집니다.

전도하자 할 때 부담스러운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내 속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서 내 인생이 달라지고 주님 속에 있는 평강을 맛보았습니다. 주님 속에 있는 치유의 힘과 소망을 맛보았습니다. 주님 속에 있는 생명을 맛보고, 내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내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이와 같은 기쁨과 헌신, 사랑이 있다면 전도하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일 경우에는 10년, 20년을 교회 다녔다 해도 전도하자는 말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내 자신이 좋아야 권할 텐데, 지금까지 만난 일이 없는 예수님을 어떻게 전합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라는 찬송가를 지은 존 루턴 목사님을 아실 겁니다. ‘나를 구원한 하나님 은혜가 너무나 놀랍고 귀하다’ 고 찬양했던 존 루턴 목사님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목사님을 뱃사람으로 길렀습니다. 그는 노예선을 타고 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뱃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다 하고 살았습니다. 공허한 인생을 살며 방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가온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찬송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영혼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잃어버린 빛을 다시 찾고, 광명을 찾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그 감격과 기쁨을 접할 때 그의 인생은 풍요로움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이 무기력해지는 건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할 때 무기력해집니다. 삶의 울타리 안에 묶여 버립니다. 지쳐 버립니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로 초청하십시오. 아니, 우리가 그 풍성함 가운데로 들어갑시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웃의 필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보면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장막 안에 들어가서 보니 너무나 풍성합니다. 그래서 먹고 즐기며 신나게 지냅니다. 그러다가 문득 죽어가는 이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도와 증거는 이웃의 필요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풍족하게 먹고 있는데 저 성에는 오늘밤에도 굶어죽는 사람이 수없이 많구나.’ 이웃들의 비참한 현실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죽어 가는데 우리가 이것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의 죄다.’ 그들은 성을 향해 떠납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또 교인들을 만나면서 안타까운 것은 일평생 자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전부다 자기 의와 자존심 때문에, 또 부요함과 지식 때문에, 권세, 자식들, 욕심 때문에. <자기 때문에>살다가 <자기 때문에> 죽습니다. 일평생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남을 위한 일들도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자기 필요만 채울 줄 알았지, 남에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물론 자식의 필요에 좀더 관심을 갖긴 하지만 결국은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로움과 기쁨을 진정으로 누렸다면 우리의 관심은 그것을 누리지 못한 사람에게로 옮겨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문둥병자를 통해서 기쁜 소식을 증거하게 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문둥병자는 절망적인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에이즈 환자와 같습니다. 그들에겐 희망도 없고 그들은 쓸모도 없었습니다. 가능한 빨리 죽어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셔서 기쁜 소식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사용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당시 문둥병자보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까? 그들의 발은 어떤 발입니까. 로마서 3장을 보면 의식 없이 걷는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 발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의식 없이 걷는 그 발을 성경은 남을 죽이고 무시하며 짓밟고, 나의 것을 채우는데 빠른 발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0장에는 다른 얘기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라고 돼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발은 어떻게 사용되었습니까.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소식이 증거되었습니까? 여러분의 발걸음이 향하고 있는 그곳에는 무엇 때문에 가고 있습니까?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웃의 필요를 위해서 가고 있습니까?

문둥병자들이 일평생 걷던 그 걸음은 낙심의 발걸음 아니었겠습니까? 절망의 발걸음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이 걷는 발걸음 속에 희망이 있습니까? 어디를 가든 희망이 없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시자 희망의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생명과 소망을 전하는 발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이 문둥병자가 된 뒤에 입술에 어떤 말이 담겼겠습니까? “나는 왜 살아야 하나? 인생이 참 더럽다. 죽자.” 이런 자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언어가 가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시자 그들의 입술 속에 이런 말이 담겼습니다. “내 한 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웃이 살아날 수 있어. 그동안에는 세상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달라. 오늘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원망과 불평과 세상을 비난하던 이 입술에 생명의 언어가 담겨져서 전파될 때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아날 거야.” 절망뿐이던 입술 속에서 소망을 전하는 음성과 언어가 나올 때 그들은 삶의 보람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입을 열면 어떤 말이 나온다고 말씀합니까. 우리 속에 있는 것이 남을 모함하며 음란하고 더러운 말로 나오게 돼 있다고 합니다.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입술이 변해서 이웃을 일깨워 주는 언어를 담는다면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시가 담긴 액자를 선물 받았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1885년 4월 5일에 인천항에 도착해서 한국을 돌아보고 난 뒤에 떠오른 생각을 쓴 시입니다. 그 시의 제목은〈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입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님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조선인의 황폐한 마음을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했던 그 발. 입술에 복음을 담아서 어두운 곳을 향해 외쳤던 언더우드 선교사. 백 년이 지나지 않아 이 땅은 복음으로 가득 찬 땅이 되었습니다. 그가 세운 연세대학은 사학의 명문이 되어 수많은 일꾼을 배출하는 학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찾아갈 저 사람들의 가슴이 지금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불모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빛,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들의 가슴 속에 심어지면 머지않아 찬양이 솟아나오고 주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놀라운 삶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 운명을 알았습니다.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도 알았습니다. 이 풍성함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로 관심을 옮깁시다.〈나만! 나만!〉하다가 죽지 말고, 내게 주신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눈길과 발길과 손길이 머무는 곳에 내 삶이 머물도록 헌신합시다. 우리 모두 주께서 우리를 통해 베푸실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기대하며 믿음으로 걸어가는 믿음의 동역자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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