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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섬김의 삶 (롬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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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섬김의 삶(롬12:3-5)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하늘나라 천사가 잠시 세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찾아서 그 손에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팔찌를 걸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천사는 자기가 가지고 온 하늘나라의 팔찌를 걸어줄 아름다운 손을 찾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손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는 숲 속에 있는 한 외딴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집안에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천사는 자기가 찾아온 목적을 밝혔습니다.
"저는 하늘나라 천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찾아서 그 손에 이 하늘나라의 팔찌를 걸어주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첫째 딸이 얼른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님, 제 손을 좀 보세요. 얼마나 예쁜 손입니까? 제 손은 예쁠뿐만 아니라 이 손으로 늘 화원의 꽃을 만지기 때문에 제 손에는 아름다운 꽃향기도 난답니다."
그러자 둘째 딸이 질세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님, 제 손도 좀 봐주세요. 얼마나 깨끗한 손입니까? 저는 제 손에 먼지만 묻어도 곧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로 제 손을 깨끗하게 씻는답니다."
이번에는 셋째 딸이 말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셋째 딸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소곳이 한 자리에 서 있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셋째 딸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은 왜 아무 말이 없습니까? 자매님에게는 손이 없습니까?"
그러자 셋째 딸은 얼굴을 붉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님, 제 손은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천사님에게 보여드리기가 민망스럽습니다. 저는 날마다 이런 저런 허드렛일을 하기 때문에 손이 너무 거칠어졌습니다. 찬물에 빨래를 하다 보니 손이 얼어서 터진 곳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던 천사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그러더니 그 천사는 얼른 자기가 가지고 온 하늘나라의 팔찌를 꺼내서 그 셋째 딸의 손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며 섬기는 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기는 손이 아름다운 손입니다. 섬기는 삶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섬김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못난 우리들까지도 섬겨주셨습니다. 막10:45의 말씀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기도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시면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섬기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 버려 피 흘려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계속해서 섬기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삶은 철저한 섬김의 삶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아름다운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2:1∼2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몸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뜻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곧 이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섬김의 삶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삶은 단순한 생각이나 무의미한 말로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적인 섬김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섬김의 삶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섬겨야 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세 가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겸손한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둘째로, 각자에게 맡겨진 직분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협력을 해야 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겸손합시다. 각자가 맡은 직분에 충성을 다합시다. 그리고 모두가 서로 아끼면서 사랑하면서 협력합시다. 그리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삶이 언제나 아름다운 섬김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사도 바울은 여기서 섬김의 한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얼마든지 로마 성도들을 향해서 자신의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도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에 힘입어서 바울은 겸손하게 로마의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을 계속해서 읽어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한마디로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교만한 자세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무엇입니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제, 자기의 분수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겸손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에서 묵묵히 주어진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하루는 인도의 수녀 테레사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수녀님, 수녀님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돕지 않고 자기만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속상하지 않습니까? 시기심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때 테레사 수녀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허리를 굽힌 채 섬기며 사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겨를이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속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는 일에만 힘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섬김의 지혜입니다.

옛날 평양의 산정현 교회를 시무하셨던 고당 조만식 장로님의 겸손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루는 장로님께서 마산에 있는 문창교회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당시 그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주기철 목사님을 자기교회로 청빙해 오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습니다. 고당 조만식 장로님께서 오산 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주기철 목사님은 그 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노 장로님은 젊은 목사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장로님, 편히 앉으십시오."
목사님의 말에 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전에는 목사님이 학생이셨고 제가 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귀하신 종이 되었고, 저는 그 종을 받들어 섬기는 장로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편좌하라 말씀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노 장로님의 믿음에서 나오는 겸손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장로님의 겸손에 너무나도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의 권유에 따라서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하게 되셨습니다.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장로님께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잠시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그만 예배시간에 늦어졌습니다. 장로님은 부랴부랴 교회를 뛰어왔지만 이미 예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조용히 자리를 찾아서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다 마시고 장로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마시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노 장로님에게, 그것도 옛 스승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그 말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설교가 끝났습니다. 목사님께서 다시금 장로님에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앞으로 나오셔서 기도하십시오." 
장로님께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울먹거리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죄인이 애국운동을 한답시고 사람을 만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에 늦고 말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면 설교하던 도중에 이토록 책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은혜스러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한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울먹거리는 장로님의 기도를 듣고 모두가 울었습니다. 목사님도 울었습니다. 성도님들도 울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똑같이 칭송을 했습니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요, 그 목사에 그 장로로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겸손이 있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서로가 서로를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가 맡은 직분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바랍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들 사지 백체라는 말을 씁니다. 이렇듯 많은 지체가 있지만 우리가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직분과 해야 할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우리 얼굴에 있는 입과 코와 눈이 서로간에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말 많은 입이 먼저 말문을 열었습니다.
"야, 나는 음식을 넣어주는 일을 하고, 말도 하는데 왜 너희들보다도 언제나 맨 밑에 위치해 있어야 되는 거야?"
그러자 코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숨도 쉬고, 냄새도 잘 맡고, 생긴 것도 오똑하게 잘 생겼지만 기껏해야 얼굴의 중간에 위치하는데."
그러자 눈이 우쭐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그런 말들 하지 마. 내가 너희들보다 위에 있는 이유가 다 있어. 내가 없어 봐. 너희들은 단 한시간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을 거야."
그러면서 그들의 시선이 불현듯 눈 위에 있는 눈썹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언짢다는 듯이 이렇게 눈썹에게 물었습니다.
"어이, 눈썹 친구! 자네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어떻게 우리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잘난척하면서 뻐기듯이 있어?"
그러자 눈썹이 이렇게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너희들 말이 맞아. 나는 언제나 중요한 일들을 하는 너희들 앞에서 늘 미안한 심정으로 그저 내 자리를 열심히 지키고 있을 뿐이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눈썹이 쓸모 없는 존재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눈썹이 맡은 직분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썹은 우리 눈 위에 작은 산맥처럼 옆으로 뻗어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눈썹의 결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 있습니다.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땀이나 물이 흘러도 눈으로 흘러 들어오지 않고 자연히 옆으로 비껴서 흘러내리도록 되어있습니다.

또 눈썹이 있는 부분을 만져보시기 바랍니다. 도톰하게 솟아있는 곳에 살짝 얹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눈썹 위로 떨어지면 눈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다 옆으로 비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눈썹은 그 이상 자라지도 않고 짧아지지도 않습니다. 항상 그 길이를 유지합니다. 예컨대 이 눈썹이 머리카락처럼 계속해서 자란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눈을 덮어버리고, 입을 덮어버리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눈썹 하나만 보더라도 절묘하게 설계가 되어져 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흉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처럼 우리 몸의 각 지체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나름대로 각각 자기가 맡은 직분은 다른 것입니다. 괜스레 다른 지체와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열등감을 가져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저 자기가 맡은 그 직분에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3절에서 우리가 살펴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불평만 했습니다.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도 최선을 다해서 충성을 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을 한번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부활장인 고전15:9에서 자신을 가리켜서 "사도들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칭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는 한 달란트 받았던 사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다음절인 고전15:10에서 자기는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더 많은 일을 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을 뿐이라고 그는 겸손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분량을 맡기셨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가 맡은 직분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심장과 허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봐주지 않는다고 자기의 직분을 소홀히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몸은 넘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봐 주는 사람이 없지마는 심장과 허파는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성을 다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직분을 맡겨주셨든지 간에,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묵묵히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4절에서도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지체의 다양성에 대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반면에 5절에서는 많은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체의 통일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온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는 서로 협력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몸 안에서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팔다리 운동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팔다리 근육만 좋아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심장이 튼튼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혈액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우리의 온 몸이 튼튼해집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졌습니다. 발에 멍이 들었습니다. "발아! 네가 잘못했으니까, 너 혼자 책임져."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온 지체가 동거동락을 하기 마련입니다. 눈으로는 발이 어디를 상했는지 얼른 살펴봅니다. 손으로는 만져줍니다. 약을 발라줍니다. 입으로는 "호∼"하면서 불어줍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 속에 있는 지체들은 서로 협력을 하면서 아껴줍니다. 지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지체가 몸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몸에 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체는 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지체가 몸에서 떨어지면 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예컨대 우리 팔이 자기를 너무 과대 평가를 했다고 칩시다. "이까짓 몸에 나는 붙어있을 수가 없어." 그러면서 팔이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몇 번 꿈틀 꿈틀 하다가 그만 동작을 멈추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각 지체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떠나면 안됩니다. 항상 교회 안에 붙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각자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대통령에 출마를 했을때였습니다. 선거 유세를 하기 위해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일이 되면 꼭 자기의 고향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를 찾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출석을 하며 예배를 드렸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또 자기가 맡은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루는 70명이나 되는 기자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예배드리며 또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 카터는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를 찾아서 여기까지 와 주신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러나 다음주일부터는 여러분이 섬기시는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맡은 직분에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 모두는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서로 협력을 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하는 가운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더욱더 든든히 세워 나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잊지 맙시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났습니다. 독일의 대학생들 여러 명이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독일군의 폭격에 파괴된 영국의 어떤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교회 앞뜰에는 예수님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본시는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동상의 밑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Come unto me (내게로 오라)." 그런데 예수님의 두 팔이 독일군의 폭격에 의해서  완전히 잘려져 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함께 의논을 했습니다. 이 동상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들은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두 팔이 잘려진 채 그대로 동상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에 밑에 적혀져 있는 글귀를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Christ has no hands but ours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우리의 손들만을 가지고 계실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우리를 섬겨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되어서 예수님의 섬김을 이어 받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의 몸 버려 피 흘려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름다운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겸손하게 섬기십시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직분을 주셨든지 간에 이 직분에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하십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서로 아껴주면서, 사랑하면서, 존경하면서, 협력하면서,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아름다운 섬김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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