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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나그네 (벧전 1: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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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거룩한 나그네
< 본 문 > 벧전1:13~19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어느새 짙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아니, 벌써 ...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마치 잠에서 깬 듯 새삼스레 세월의 신속함이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고운 단풍도 이제 곧 낙엽이 될 겁니다. 그리고 나무마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차가운 겨울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는 인생의 진리를 배웁니다. 그것은 인생에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끝이 멀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가리켜 잠시 왔다 가는 ‘나그네’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생의 진리를 잊은 채 동분서주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인생의 마지막에 봉착하면 얼마나 황당할까 걱정이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에 마지막이 있음을 미리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인생에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만 아는 것으론 부족합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내세 문제도 그 이상 중요합니다.

아마 40대 이상 되는 분들은 기억하실 텐데, ‘하숙생’이란 노래가 있죠.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는데 저도 어렸을 때 따라 부르던 기억이 있습니다. 조숙했던 건 아니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부른 거죠.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아 가는 길에 ...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이 가사를 보면 인생이 나그네인 것은 아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이 정도로 그치면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 다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그것에 맞춰서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내세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런데 내세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으면 그냥 끝인 줄 압니다. 천만의 말씀이죠. 혹 천국은 인정해도 지옥을 부정하는 많은 사람도 꽤 많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싫어하면 부정해 버립니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죠. 예를 들어 해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없다고 주장하면 없어지는 겁니까? 있는 것을 갖고 없다고 주장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정말 지혜로운 인생은 나그네 인생임을 알 뿐 아니라 그 다음 목적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목적지가 정해진 나그네, 목적지가 천국인 나그네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목적지가 정해졌습니까? 천국이 여러분의 목적지입니까?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셨다면 여러분은 분명 천국으로 목적지가 정해진 사람들인 줄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 본문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을 목적지로 하는 나그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나그네 인생으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성공적인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목적지로 하는 거룩한 나그네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한 마디로 ‘거룩한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냥 나그네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디서 왔다 어디도 가는지 모른 채 살아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압니다. 이 세상 살다가 언젠가 천국에 들어갈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나그네’인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이 본래 ‘구별되다’ ‘차별되다’는 뜻을 가지고 있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됐나? 본문은 뭐라고 증거합니까? 18절~19절 보십시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여기서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은 세상의 헛된 일들, 죄악을 의미합니다. 죄악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렇죠. 세상 그 어떤 조건이나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금은보화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요1: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이미 천국에 예약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임과 동시에 천국 백성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중 신분을 적절하게 나타내주는 것이 곧 ‘거룩한 나그네’라는 표현입니다.

[2] 거룩한 나그네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① 늘 본향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됩니다.

13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당시 사람들은 긴 옷을 입었습니다. 활동을 하려면 허리띠를 잘 매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것은 긴장감을 갖고 살라는 겁니다. 이것은 ‘건강한 긴장감’이죠.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갈 준비 태세를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가 되기 위해서는 늘 마음속에 천국을 소망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온통 마음이 세상 것으로 가득차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주실 은혜가 더 좋습니다. 그 은혜는 주님이 주실 영생과 하늘의 상입니다. 여기에 마음을 집중시켜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나그네는 한 곳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나그네의 모습이 아닙니다. 거룩한 나그네인 그리스도인들은 늘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혹은 개인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마지막 날을 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게 참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 인물들을 보면 한결같이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왕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마음에 항상 천국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나그네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대상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도 나그네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정처 없는 나그네로 살았고 늘 마음속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히11:13~16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 ”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혹시 세상의 현란한 불빛 때문에 정말로 아름다운 하늘의 별빛을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습니까? 지난번 북한을 방문했을 때 묘향산에서 1박을 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공해가 없어서 그런지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어린 시절 보았던 그 하늘이었습니다. 북두칠성이 뚜렷하게 보이고, 별자리 하나 하나를 알아볼 정도로 별들이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한참 보고 있다보니 별들이 쏟아져 내려옵니다. 달려가서 주워 담아야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격에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 순간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이 있지만 세상의 별 것도 아닌 불빛에 도취되어 살고 있구나 ... 그래서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이 세상을 가리켜 ‘마취국’(痲醉國)이라 부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정말 우리를 마취시키는 게 너무 너무 많습니다. 부귀와 영화,향락 등 ... 자칫 잘못하면 이런 데 빠져 정신을 못 차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버리는 연습, 떠나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우리 스스로 자진해서 시간과 물질, 건강과 재능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바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도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내 세상 것에 푹 빠져 헤매다가 헛된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복음송 중에 ‘주님 내게 오시면’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가 얼마나 은혜롭고 도전이 되는지 모릅니다. “세상부귀 안일함과 세상 근심하다가 주님 나를 찾으시면 어떻게 만날까 / 세상 일에 얽매어서 세상 일만 하다가 주님 나를 부르시면 어떻게 만날까 / 지금까지 내가 한 일 주님께서 보시고 훗날에 나를 보고 무어라 하실까 /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근심 버리고 두 손 들고 눈물로써 주만 따라 가오리다.” 이 노래를 부르다 보면 정말 마음에 찔립니다. 세상에 집착해서 엄벙덤벙 살다가 주님 만나면 어쩌나 걱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부디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 집착하지 마시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②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5절~16절.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거룩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인데 ‘구별되다’ ‘분별되다’ ‘다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과 구별되게 다르게 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과 다를 뿐 아니라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살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룩’이란 말의 뜻은 둘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from) 구별, 그리고 하나님에게로(to) 구별입니다.

14절 보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 ”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세상의 욕망과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 삼지 말라는 것은 세상의 속한 유행을 따르지 말라는 겁니다.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겁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4:2~3 에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거룩’임을 증거합니다.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죄를 지으며 사는 것은 예수 믿기 전 지난 때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처음 예수 믿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지난 세월이 너무 억울합니다. 왜 그리 헛되게, 죄악된 모습으로 살았던고 ... ? 한탄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바로 살아보리라 단단히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둔해진 나머지 계속해서 세상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죄악 중에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늘 정신을 차리고 세상에 살지만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향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5:13~16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세상의 부패와 어둠에 빠져드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거룩한 삶입니다. 살전5:5~8에서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그렇습니다. 우리는 빛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가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면서 애쓰면 충분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 호도온의 ‘주홍글씨’란 소실을 아시죠? 요주인공이 간음죄를 지었는데 들통아 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합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추방되는데 옷에다 늘 간음(Adultery)이란 단어의 첫 글자인 A를 붉은 글씨로 새기게 했습니다. 혼자 어린 딸을 키우면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 사연을 아는 사람들이 사라져갔습니다. 그후 사람들이 A가 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때 누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천사(Angel)를 의미하는 A라고 ... 그 여인은 범죄 후 회개하고 새롭게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rm 결과 그런 칭찬을 받게 된 겁니다. 우리도 아무리 연약하고 악한 죄가 있더라도 얼마든지 이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 하나님에게로(to)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를 가리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벧후1:4~7 “4 ...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우리는 삶을 통해서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 탁월함을 보여줘야 합니다. 요13:34~35에 보면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는 예수님처럼 희생적으로 섬기면서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지(mark)입니다. 그런 의미로 프랜시스 쉐퍼는 아가페 사랑을 ‘그리스도 제자의 뺏지’라고 불었습니다.

③ 심판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여러분, 우리도 장차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지옥 형벌을 위한 정죄 심판은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급을 위한 심판은 받습니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도 분명 이 세상 사는 동안 거룩한 나그네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평가 받게 될 겁니다. 그 날에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날이 우리에게 먼저 어떻게 올지 모르지만, 혹 개인의 종말일지 혹 주님이 재림하는 역사의 종말일지 모르나 분명한 사실은 점점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얀마의 한 섬에 사는 부족은 나이 계산법이 특이하다고 합니다. 갓난 아이를 60세라고 부릅니다. 아마 평균 수명이 대충 60년 정도 되는가 봅니다. 첫돌이 되면 59세, ... 환갑이 되면 0세 ... 그 나이는 돌아갈 날을 계산하는 겁니다. 그 이상은 나이 계산하지 않고 덤으로 사는 인생 ...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처럼 우리 인생도 카운트다운이 됩니다. 그 날을 기억하고 준비해야 됩니다.

성도 여러분!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까? 단풍놀이하는 기분으로 가을을 가볍게 보내지 맙시다. 자연은 교과서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인생의 안내서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은 날을 계수하면서 주님 부르시는 그날을 기억하며 사십시오. 늘 마음 속에 천국을 소망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주님이 부르셔도 담대하게 천국에 들어가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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