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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회와 후회/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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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와 후회
누가복음 16장 19 - 31 절

시카고에 사는 한 부자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전문의인 로렌스 박사를 초빙했습니다. 로렌스 박사가 정성스레 이 아들을 치료하여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소년도 부자집 아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다가 신문을 보고 로렌스 박사를 만나보기를 소원했으나 어려운 처지에 있어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날 로렌스 박사는 산책하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 이 소년의 집에 잠시 들러 쉬기를 청했는데 로렌스 박사인줄 몰랐던 소년의 어머니가 냉대하며 거절하여 병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 어머니는 자신이 쫓아보낸 사람이 로렌스 박사였음을 알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기회가 문을 두드려도 사람이 일어나 그 문을 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주자십회(朱子十悔)에 "1.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뉘우친다. 2. 가족에게 친절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뉘우친다. 3. 젊을 때 부지런하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한다. 4. 편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한 뒤에 뉘우친다. 5. 부할 때 아껴 쓰지 않으면 가난한 뒤에 뉘우친다. 6.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한다. 7. 담장을 고치지 않으면 도둑맞은 뒤에 뉘우친다. 8. 색을 삼가지 않으면 병든 뒤에 뉘우친다. 9. 술 취했을 때의 망언은 술 깬 뒤에 뉘우친다. 10. 손님을 접대하지 않으면 간 뒤에 뉘우친다."라고 했습니다.
원수 마귀 사탄은 성도들이 기회를 놓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사단과 그의 졸개들이 성도들의 신앙생활 방해 공작을 위한 전략회의를 열었습니다. 젊은 엘리트 출신의 마귀가 크리스천을 죽이고자 할 때에 늙은 마귀가 순교는 교회의 씨가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때리면 매 한 대에 예수가 열도 더 생긴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감옥에 가두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가두면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를 크게 일으키므로 손해라고 했습니다. 그 보다 더 좋은 전략이 없을까 하고 고심하고 있을 때에 늙고 지혜로운 마귀가 지혜를 짜내었습니다. "열심히 전도도 하고 사랑도 하자. 그러나 내일부터 하자"고 속삭이자는 전략이었습니다. 이 전략이 마귀의 최대 성공전략이었습니다.
히말라야 산 속에를 가면 야맹조라고 하는 새가 있다고 합니다. 이 새는 낮이면 신나게 즐기다가 밤이 되면 잘 둥지가 없어서 다른 새의 둥지에 가서 거하며 밤새 구박을 받는 답니다. 그는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내일이면 집지으리","내일이면 집지으리"하고 구슬프게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맹조는 자기의 일생이 다가도록 집을 짓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단은 다음에 하지, 내일하지 하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유혹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성공하는 사람은 기회가 올 때에 민활하게 포착합니다. 신속하게 결단해서 기회를 포착하고 나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곧 기회의 연속입니다. 기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생존이지 생활은 아닐 것입니다. 기회는 생활의 참 멋이요, 삶의 값어치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 얍복강 여울에서 자기의 마지막 기회임을 깨닫고, "내게 축복해주지 아니하면 당신을 가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끈질긴 결투를 치루었습니다. 결국 그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불타는 소원을 가진 사람은 낙심치 않고 기회를 붙들고 노력을 다할 때에 그 소원을 실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담장 가득 메운 나팔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에 보지 못했던 황홀한 꽃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밖으로 나가 나팔꽃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즐겼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밀밭을 갈아 놓아야 하니 빨리 밭을 갈고 돌아와 저 꽃을 즐기리라" 그가 저녁 늦게 밭에서 돌아와 보니 꽃은 시들어 낙화되고 없어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창문밖 나뭇가지에서 귀여운 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빨리 젖소들의 우유를 짜 놓고 저 아름다운 새 소리를 즐기리라" 농부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또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집 밖에서 말 발굽 소리를 듣고 일어나 문을 열고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백마 한 마리가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면서 농부를 향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치 농부에게 어서 빨리 와서 승마를 즐기라고 손짓하는 듯했습니다. 농부는 오늘은 빨리 나가 동편에 있는 울타리를 수리해 놓고 저 훌륭한 백마를 타며 즐겨보자"하고는 급히 일하러 나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황급히 돌아와 보니 그 아름다운 백마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습니다. 농부는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신기한 일들을 즐기기 위해 다른 일들을 멈추고 시간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실천해 보지 못한 채, 어느 날 한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세상일에 쫓기고 취하여 살다가 주님 말씀을 등한히 한 결과 후회하게 됩니다. 성경에 '만사가 때가 있다'(전3:1-8)하였고,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눅9:62)고 하였습니다. 내일로 미루다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루속히 주님을 따르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회는 두 번 다시 안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이는 인간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것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뱉어 버린 말, 쏘아버린 화살, 지나가 버린 세월, 게으른 탓으로 놓쳐버린 기회'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하였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32:6),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하였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약4:14)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기회 있을 때 회개하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됩시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에 있는 붕어를 발견했습니다. 붕어는 얕은 물에서 파닥이며 "제발 빨리 물을 부어 나를 살려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붕어를 보며 "나는 지금 먼 지방으로 유세를 떠나는데 거기에 있는 큰강의 물을 떠가지고 와서 너를 살려 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붕어가 쏘아붙였습니다. "건어물점에서나 가서 나를 찾아보십시죠" 남을 도와주는 일도 "기회(때)"를 놓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에서 장자가 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9-10)하였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형편을 생각해 보면, 부자는 말할 수 없이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자신의 육신적인 안락과 향락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문밖에 불쌍한 거지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헌 데로 옷을 대신하고, 심지어 개가 핥아 주는 형편이었으나 그렇게 옷이 많고 많아도 이 부자는 나사로에게 옷 한 벌주어 본 적이 없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며 즐겼지만 나사로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 먹어 보라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의 부모는 얼마나 죄를 많이 지어 서 저와 같은 벌을 받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죄를 지어서 같은 벌을 받는 것일까? 하여간 알 수 없는 노릇이야 이렇게 혼자 경멸하는 태도로 중얼거렸는지도 모릅니다. 옛말에도 동정은 안하고 밥통을 차 버린다 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 도와줄 생각은 않고 책임 만 전가시키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하여간에 거지 나사로도 죽고 이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세상에서 살 때 대조적이었던 것처럼 죽은 후에는 그 반대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죽 은 후 그 영혼이 천사들의 안내와 옹위를 받아 하늘 나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어 하데스에 내려가 뜨거운 유황불이 붙고 있는 곳에서 타 죽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가운데 목말라 애쓰고 있습니다. 배고픈 설움도 어렵지만 목마른 고통은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월남전에서 안케 패스 작전 때 우리 맹호부대 군인들이 너무 목이 마른 데 물이 없어 서 할 수 없이 소변을 마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목마른 것은 죽을 노릇입니다. 이 부자가 음부의 타는 불 속에서 목말라 애쓰고 있다가 저 멀리 바라보니 아브라함 이 있고 그 옆에 세상에서 자기 집 대문 밖에 있던 거지 나사로가 영광을 누리며 앉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시원하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부자였던 사람은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현재 당하는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도움을 청합니다. 나사로는 그 집 대문 밖에 있으면서 그런 어려움 속에 있었으나 한번도 주인집을 향하여 소리지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였던 사람은 지 금 자기가 당하는 고통 속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아보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을 뭐라고 불렀어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라고 불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음부에는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씨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도 됩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약속 받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 부자였던 사람도 세상에서 살면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많이 들었고 말하자면 자기도 아브라함의 자손의 하나라고 알았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런 것을 전혀 무시해 왔습니다. 세상에서 돈 있으면 되지, 이렇게 입고 싶은 좋은 옷을 마음껏 입고 먹고 싶은 음식 배불리 먹으면 이게 천당이지 천당이 다른 건가? 하며 스스로 아브라함을 무시했고 구원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되고 보니 아브라함이 얼마나 존경할 분인가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기의 고통스러운 형편을 고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이 불 속에서 몹시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영혼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육신으로 당하는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고통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자비와 긍휼의 때가 지나면 많은 사람들이 소리질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칠 것입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함께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회개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지나면 이미 늦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보라 지금은 은혜의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은혜의 때 에 은혜를 받고 구원의 날에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때가 지나면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부자였던 사람은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시원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어느 부분보다도 혀가 말라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혀는 말하는 기관입니다. 이 혀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하여 악한 말을 합니다. 그래서 혀가 가장 큰 형 벌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을 찍어 혀를 좀 시원하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당신의 품에 안기게 하여 나사로와 같이 있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별되지 못한 영혼은 천당의 행복을 원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합니다. 저를 이 고통 속에서 건져 주십시오 라고 하지도 못했습니다. 물방울로 한 순간이라도 적셔 시원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 사람은 오히려 자기가 더 잘 아는 나사로에게 부탁하지 못하고 아브라함에게 청원하여 나사로를 시켜 물 한 방울이라도 적셔 달라고 했을까요? 생시에 나사로가 대문 밖에서 그처럼 고생하는 것을 알면서도 물 한 그릇 따뜻한 마음으로 주어 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이 무슨 염치로 그런 청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아브라함이 그에게 분명히 대답하였습니다. 아들아 돌이켜 생각해 보아라. 네가 살았을 때에 너는 좋은 것을 다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있으며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에게는 큰 구렁이 놓여 있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여기서 아들 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역한 아들입니다. 유업과는 상관없는 아들입니다. 예수님 때에도 많은 사람이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아브라함과 상관이 없는 아들들이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살았을 때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아라 하셨습니다 . 생각해 보면 지금 받는 형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네가 세상에서 살 때 그처럼 좋은 것을 다 받았으나 그것으로 무엇 을 했지? 남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지? 할 말이 없습니다. 물 한 방울도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를 위해 쓰고 자기를 위해 먹고 자기를 위해 입고 한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를 위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동전 한 푼 쓴 일이 없었습니다.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세상에 살 때에 나쁜 것을 받았고 지금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평스러운 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6∼7절에 하나님은 공의를 베푸십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환난을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을 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 일은 주 예수께서 권능의 천사들 과 함께 나타나실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했습니다. 낙원은 위로의 곳이요, 음부는 형벌의 곳 입니다. 하늘은 기쁨이요, 하데스는 슬픔이요, 울부짖음이요, 고통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육신 을 떠나는 순간 낙원이 아니면 음부로 갑니다. 위로가 아니면 고통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낙원과 음부 사이에 큰 구렁이 놓여 있기 때문에 여기서 건너가지도, 건너오지도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그때 이 부자였던 사람은 한 가지 청원을 더 했습니다. 아버지, 소원입니다. 그를 내 집으로 보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제 다섯 형제가 거기에 있습니다.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이 고통받는 이곳에 오지 않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말을 통해 이 부자였던 사람에게 거지 나사로가 얼마나 진실하게 보였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세상에 살 때에 말할 수 없이 고생을 하였지만 그는 진실하였기 때문에 그가 이제 세상에 다시 가서 우리 형제들에게 말하면 다 믿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긍휼과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받습니다만 내 형제들만은 이런 곳에 오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그가 자기의 다섯 형제만을 말한 것을 보니까 자기 자식은 없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랬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의 형제들만이라도 죄악된 길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나를 그들에게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들에게 간증하여 저희로 하여금 바른 생활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이미 갈 수 없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사로를 보내서 내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사실을 말하여 그들(내 형제)에게 경고가 되어 이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소원입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부자였던 사람은 땅 위에 살면서 그 형제가 다섯이 되나 형제가 어떻게 살든 아무런 관심 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견디기 어려운 형벌 속에서 고통 당하게 되니까 땅 위에 있던 형제들 생각이 났습니다. 인간 본연의 사랑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돈이 눈을 가려 서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불쌍한 거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형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내일은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음식을 해 먹을까? 어떻게 하루를 즐길까? 하는 것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고통 속에 빠지니 세상에서 생각해본 적 없는 형제들이 생각이 났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성격도 압니다. 그들이 당하는 시험도 압니다. 그들의 무지도 압니다. 그들의 신앙 없음도 압니다. 그들의 동정심 없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멸망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이제 머지않아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 을 받게 될 것을 생각하니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나사로가 그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증거하여 형제들이 그의 말을 듣고 이런 곳에 오지 않게 해줍시사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청원을 거절하였습니다. 음부에서는 청원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하나 님은 사실 성도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있는, 말하자면 음부에서 기도하는 기도는 그 기도가 아무리 간절하다고 하여도 단연 거절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2 절 이하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리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회개도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세상에 있을 동안에 하여야 합니다. 그 날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 우리에게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영생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종들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받고 믿음으로 행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이 이 땅 위에서 전부가 아니고 다른 세상이 있는 것과 이 땅 위에서 선을 행하면 상급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 다. 생명과 사망의 길, 복과 저주의 길이 있으니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였던 사람은 다시 청원합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에 그들에게 가서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물론 저들이 모세와 여러 선지자를 통하여 이 진리를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종들의 말을 존중 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가서 말한다고 하면 이것은 새로운 사실이므로 저희들이 회개하고 믿을 것 같았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세요.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줄 알고 새로운 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분명히 잘라 말했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에 누가 그들에게 가서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3 1절). 즉 이미 말씀되어진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은 개인의 간증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말한다 해도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 이상, 사람으로 더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 이상의 권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다른 새로운 무엇이 필요 없습니다. 성경에 계시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어떤 새로운 것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보이는 것을 너무 원하지 맙시다. 이사야 8장 19∼20절을 보세요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꼭 한번 지나야 할 문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입니다. 이 문 뒤에는 두 곳이 분명히 갈라져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품이요, 다른 하나는 유황불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음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편을 택하시렵니까? 과연 여러분은 회개의 문을 통과하였습니까?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문을 통과하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 전에 선한 사업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하늘 은행에는 얼마나 예금되어 있습니까? 물론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상 받는 것은 이 땅 위에서 행한 대로 상 받을 것입니다. 상 받을 것이 얼마나 있어 보입니까? 사도 바울처럼 의의 면류관이 바라보입니까? 그 반면에 구원을 받긴 하였지만 아무 상도 못 받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형편 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열성을 다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주안에서 수고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을 누가 하셨어요?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즉, 낙원과 음부는 분명히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부인하지만 만일 오늘 저녁 내 영혼을 부르신다면 하나님의 품에 안길 확신이 있습니까? 혹은 회개의 문을 통과하셨습니까? 받을 상이 있을 것 같습니까?
마태복음 25장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을 가지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혼인잔치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쇠가 뜨거울 때 두드려야 하듯이 사람이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하게 됩니다.(렘8:20, 히12:17)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일지 못하노라 하리니"(눅13:25)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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