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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대적 명령/ 시 136:1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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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시편 136편 1절 - 9절
제  목 : “절대적 명령”


항간에 유행하는 사오정 시리즈의 한 토막입니다.

손오공하고 사오정이 입사면접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축구선수 중 「누구를 좋아하나?」하고 물었습니다.
손오공은,
「전에는 차범근 이었지만, 지금은 안정환 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면접관이
「중국 청나라 패망은 언제인가?」하고 물었습니다.
손오공은 「18세기」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손오공은 「열심히 하겠습니다.」하며 대답했습니다.

밖에서 면접을 기다리고 있던 사오정이 손오공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묻느냐?
답을 가르쳐 다오! 부탁도 했습니다.
사오정은 손오공이 가르쳐 준 답을 열심히 외웠습니다.

○ 전에는 차범근 이었지만, 지금은 안정환
○ 18세기
○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제는 면접관이 사오정에게 질문을 합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사오정은 알고 있는 터라 크게 외쳤습니다.
예, 「전에는 차범근 이었지만, 지금은 안정환 입니다.」

면접관이 이상하다 싶어서 이제는 나이를 물었습니다.
자네 「생년월일이 언제」인가?
역시 사오정은 익히 알고 있는 터라 크게 외쳤습니다.
예, 「18세기」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해졌습니다.
자네 미치지 않았나?
사오정 역시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결국 손오공은 취직이 되고, 사오정은 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웃자고 해서 꾸며 놓은 얘기지만,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닌 모방은 결국은 어설퍼서 탈로난다는 뜻과 생산적 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1) 모방될 수 없는 신앙

신앙은, 특별히 기독교 신앙은 모방될 수 없습니다.
아니 모방할 수는 있으나 실제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납니다.

그 모방신앙의 대표적 무리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입는 옷과 걸음걸이와 생활이 경건하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방이고 위선이었습니다.

주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결국 주님을 못 박은 이들이 된 것입니다.

참 기독신앙의 본질은 외견의 모양이나 모습보담,
그 내면의 인품과 삶에서 배어나옵니다.

예컨대,
○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 고난에 어떻게 처신하느냐?
○ 죄 문제를 놓고 어떤 성품이 나오느냐?
○ 또 영혼에 대한 사랑이 얼만큼이냐?
○ 그리고 보다 더 절대적인 것은 죽음에 대하 믿음입니다.
○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더욱이

죽음을, 마침이나 망함이나 끝남으로 보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경외함 속에 감사가 있습니다.

○ 의사에게 감사한다면 치료받은 환자입니다.
○ 손님께 감사한다면 업소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그는 주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입은 성도인 것입니다.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청교도들이 시작했지만,
경건한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1789년 11월 26일을 국경일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3대 대통령인 제퍼슨 대통령은, 왕정시대 곧, 영국의 통치시대 관습이라는 이유로 중지 시켰던 것입니다.

그 후 50년이 지난 후
제 15대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 부활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선포 내용입니다.
  「나는 우리의 경건한 조상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감사의 씨로 뿌린
  신앙의 유산을 우리 후손들이 잘 계승하도록
  이날을 국가 축제일로 선포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교회가 감사의 절기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같은 대통령일지라도
누구는 폐지하고
누구는 부활 시켰는데,
그 차이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 향한 경건성의 확실한 차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아는 성도라면,
은혜를 주신 사람에게는 물론,
하나님께는 핑계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이 성숙되면 될 수록 고통과 아픔이 수반되는 환난의 때일지라도 범사에 감사 할 수 있기에 성숙한 신앙의 증표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다른 대상이 아닌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져 여러 각도로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 여호와, 주」하여 다양한 호칭들과 이룩하신 일들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감사의 표현

자! 어떻게 감사를 드릴까요?
처지와 상황이 다를 수 있습니다.

① 감옥에 있던 사도바울은 「찬양」으로 표현했습니다.

  시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찌어다”

특별히 새 노래는 금방 작사 작곡한 노래가 아니라 새 감격 새 감사를 지녀라 하는 뜻입니다.

  시 96:4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요”

여기서 극진히는 준비하여, 각근히 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찬양대가 준비하고 기도하며 찬양하기에 이 모습 일 수 있습니다.

② 예물을 드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은 헌금으로 드립니다.

  사 66: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참으로 드려야 할 예물은 으과 금보다 영혼을 주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여러분 모습일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행하신 여러 사건과 사실들을 진술하는 것도 감사 표현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알라!」고 늘 진술했습니다.

며칠 전 모 집사님 내외분은 그들의 자녀와 자신들의 직장ㅇ에서 높여주심과 병에서 건져주심을 감사하여 말함을 들었습니다.

④ 그러나 가장 큰 감사는 자신을 드리는 일입니다.

사도바울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을 드렸던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 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셔서
사도바울에게는 소아시아와 유럽의 복음화를 
마틴 루터에게는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3) 절대적 명령

이러한 감사는 성도에게는 절대적 명령입니다.
그러기에 「감사하라」는 명령어로 적혀 있으며 반복되고 있습니다.

○ 항상 기뻐하는 것
○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
○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명령이요 뜻입니다.

놀랍게도 기뻐하는 것, 기도하는 것, 감사하는 것들은 하면 할수록 더욱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감사는 감사하면 할수록 감사의 일들은 생깁니다.
또한 감사하면 나도 행복해 집니다.
그리고 감사는 더 커집니다.

왜 감사해야 되는지?
왜 마귀는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감사는 성도만의 특권이고 의무입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소유하며 사는 성도입니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얘기입니다.
한 나무꾼이 호랑이에게 잡혀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에게 물러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생각나서 호랑이를 유심히 보니 호랑이가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모습에 나무꾼은 너 뭐하냐? 고 물었습니다.
그대 호랑이 말인즉,
임마! 식사하기 전에 감사기도하다.
너는 감사도 모르냐? 하고 핀잔하더랍니다.

신앙은 모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기도와 기뻐하는 것과 같은 신앙덕목이고
전도하라는 명령과 같이 타협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비로소 실감하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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