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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날마다 더하는 삶 (호 2:8-10, 행 1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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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더하는 삶
( 호 2:8-10, 행 16:1-5 )
 
현대 문화는 소유욕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행복한 삶이란 부의 축적에 있고 그래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터무니없는 허풍이 난무한다고 리처드 포스터, ‘심플 라이프’에서 경고합니다. 우리 나라 사자성어 가운데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말이 있습니다. 윌리엄 오펄스는 “성장은 현대 사회의 세속 종교다”라고 하여 성장주의를 경계하였습니다. 경제, 사회, 문화, 교회 어디든지 성장제일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많이 일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본래적 뜻은 아닙니다. 너무 많이 알면 오히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가지면 하나님이 필요없다 합니다. 너무 많이 일하면 하나님이 무능하시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있고, 너무 많이 일하면 영혼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전혀 아무런 이득도 되지 못합니다. 경제나 사회의 성장은 심각한 현대인의 병입니다. 그러나 성장하지 못하면 퇴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못하면 인정받지 못합니다.

교회는 날마다 더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날마다 더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다음에 자신이 생명의 떡인 것을 설명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겠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이 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영생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날마다 더해가야 합니다.

오래 전 일제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선생님이 학급에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 학생이 창문밖을 내다보며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의 이름을 불렀지만 학생은 듣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의 자리로 가서 학생의 등을 회초리로 치자 학생은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야, 너 뭐했어?” “길에 지나가는 자전거 구경했어요” 이 학생은 자전거 타는 법을 새로 배운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학생을 데리고 앞으로 와서 벌을 세웁니다. 의자를 돌려서 등받이를 잡고 앉아서 자전거 타는 흉내를 내게 한 것입니다. 얼마쯤 지나고 보니 학생이 가만히 앉아 놀고 있습니다. “야, 너 왜 가만 있어, 계속해” 그 때 이 학생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아까는 올라갔고 지금은 내려가요”. 가만히 있으면 자전거는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길에서는 다리를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은 내려가지 않아요. 왜냐하면 교회도 경제도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는지 아무래도 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가 20년 30년 지나면 미국교회와 같이 되고, 50년이 지나면 유럽교회같이 된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그렇지 않아요. 한국교회같이 열심히 노력하는 교회가 세계에 어디 또 있습니까? 지난 4월의 어느 보도에 의하면 세계 기독교 인구의 성장속도는 이슬람이나 힌두교보다 느립니다. 2003년 현재 기독교인은 20억 7600만여명으로 세계 전체 인구의 33%입니다. 모슬렘은 13억입니다. 모슬렘은 최근 50년간 500% 급성장한 반면, 기독교는 47% 성장률에 그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더 열심히 노력하여 쇠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도 성장이 둔화되고 있습니다. 다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배전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일취월장(日就月將)이란 말이 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성장하고 발전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은 문자 그대로 날마다 더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에서 “성장은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다. 성숙은 의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하고 날마다 성숙해야 합니다.

인생에는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더하는 사람, 빼는 사람, 나누는 사람, 곱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해줘도 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곱해줘도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빼줘도 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눠줘도 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는 더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곱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자꾸 빼고, 자꾸 나누면 결국 하나님의 교회는 병들고 힘이 약해지는 법입니다. 초대 교회는 날마다 더하는 교회였습니다. 날마다 곱하는 교회였습니다. 성경적 교회는 날마다 더하는 교회입니다. 성경적 교회의 원리는 날마다 더하는 삶입니다. 날마다 더하는 교회, 날마다 더하는 삶의 비결을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교회가 문제를 해결하였을 때 날마다 더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여러 성, 여러 교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날마다 더한 것은 여러 성에서 여러 교회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한 성, 어느 한 교회가 아니라 모든 교회가 더해야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날마다 더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성이나 어느 한 교회를 가지고는 날마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란 신자와 동의어로 취급되었습니다. 교회가 내적으로 굳어지고, 외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이제는 독불장군(獨不將軍)입니다. 혼자 장군노릇할 수 없습니다. 미래 교회는 어느 한 교회가 성장하고, 어느 한 교회가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함께 성장하고, 모든 교회가 함께 쇠퇴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도 모든 교회가 잘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잘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날마다 더하니라”란 말은 교회의 외적 발전을 의미하는 말로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비온 후에 땅이 굳어진다”란 속담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겪은 다음 더 나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의 교회의 성장은 날마다 더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질 때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 교회는 더욱 성장하였습니다. 처음 세워진 교회는 예수님의 승천과 더불어 슬픔이 닥쳐왔고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극복하고 나서 사도행전 2:47에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합니다. 문제를 딛고 일어서니 날마다 더하게 하였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성도들이 부활의 신앙으로 똘똘 뭉쳐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첫째 문제는 과부의 구제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불평하여 교회가 심각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일곱사람을 세워 이 문제를 해결한 다음 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사도행전 6:7에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합니다. 문제를 해결한 다음 교회는 성장합니다. 문제의 해결은 사람을 세워 지도자의 업무를 분담하여 주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울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사울이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되었지만 교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바나바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사울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늘 말썽이었습니다. 이들은 과부들의 구제도 시비하여 일곱 사람을 선택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들이 사울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사도행전 9:31에는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합니다. 교회가 더하는 것은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입니다. 문제를 해결한 것은 사울을 다소로 보내어 전도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성장의 저해요인입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은 교회성장의 긍정적 요인입니다. 지금껏 하나님은 교회 문제 때문에 손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교회가 문제 때문에 손해를 봅니까? 아닙니다. 어렵지만 교회는 더 잘됩니다. 긍정적으로 문제를 보아야 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식물은 밤, 어둠 속에서 가장 왕성하게 성장한다고 합니다. 식물이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를 만들어내기 위해 온도와 빛을 필요로 하는 시간은 낮입니다. 그러나 줄기가 자라고 잎이 넓어지며 봉오리가 벌어지는 실제적인 세포증식을 위해서는 어둠, 곧 밤의 정적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평안 가운데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폭풍 가운데 자랍니다. 핍박은 교회의 성장의 요인입니다. 문제는 교회 성장의 비료입니다.


둘째, 규례를 잘 지킬 때에 날마다 더합니다.

5절에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수가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합니다. 규례란 “도그마타”란 헬라어입니다. 교리라고 하는 ‘도그마’란 말이 이 말에서 나왔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은 성도들에게 규례를 주어 지키에 하였습니다. 이것이 직접적인 자극이 되어 그 수가 날마다 더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규례가 있습니다. 이 규례대로 하면 조금은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어보이고, 후진 것 같지만 이렇게 해야 날마다 더합니다. 교리도 그렇습니다. 교리는 너무 폐쇄적인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교리를 지키지 않으면 교회는 오히려 쇠퇴합니다. 교리는 교회가 그 중심을 잃지 않게 만들어줍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규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무 조건없이 출애굽하게 하십니다.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이 구원받은 다음에 광야에 살 때에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규례대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규례조차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 규례는 필수적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율법을 초월하고 삽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는 말은 지키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교회는 주일성수나 십일조 봉헌이나 봉사나 전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규례입니다. 이 규례대로 살아야 합니다. 정해진 규례대로 하면 더하게 됩니다. 이런 규례들을 이미 구원받았으니 필요없다고 한다면 더하지 더하지 못하고 덜하게 됩니다. 주5일 근무제가 이미 부분 시행이 되었지만 내년부터 본격 시행할 차비를 하고 있습니다. 주5일 근무제에 대비할 가장 중요한 것은 성수주일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고 자기 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대안교회를 만든 교회마다 망했습니다. 성도는 어디까지나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생활은 그들의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 당시에 사방에서 성전에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지런히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가 되자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당을 만들어 회당에 간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갈 수 없기 때문에 회당에 간 것입니다.

성경은 엿새 동안은 부지런히 일하라고 합니다. 주5일 근무제는 닷새동안만 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닷새는 직장에서 유급으로 일하고 하루는 무급 일해야 성경의 규례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앞으로 토요일에는 우리 작은형제의 집이나 우리 관내의 복지시설에 가서 무급 봉사할 분들을 훈련하고 하루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일에도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면 교회에 대한 사회의 이미지가 좋아지고 참 선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성경적 규례를 지키게 되고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하게 하십니다. 십일조도 중요한 규례입니다. 이 규례도 아무리 강조해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늘문을 여시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창고가 넘치게 되는 일입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 얘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데 여러분이 복받는 일인데 왜 제가 강조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알레르기는 병인 것을 아시지요? 십일조는 온전히 해야 합니다. 십일조는 본교회에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교인의 도리입니다.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성전에 안내고 다른 데 적당히 내는 것 봤습니까? 한국교회는 규례에 대한 책임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문제가 느슨해졌습니다. 규례가 느슨하면 교회가 쇠퇴합니다. 교회의 규례가 살고 치리가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치리는 벌주는 것이 아니라 교인의 훈련입니다. 훈련이 없으면 죽어요. 1910년대 우리 교회는 매년 벌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집사가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책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벌받으면서 교회 나올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쇠퇴하고 침체하게 하는 한 원인이라고 봅니다. 혹시 교회의 규례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면 감사하십시오.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아픔은 금방 병을 알 수 있고 치료할 수 있지만 아픔이 없으면 치명적인 병입니다. 암이 그렇고 한센병이 그렇습니다. 아프지 않다가 자각 증세가 나타나면 이미 늦은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아픔은 그 부위가 약하는 의미입니다. 주일성수 얘기를 듣고 아프면 그게 약한 부분입니다. 십일조 얘기를 듣고 아프면 그게 약한 부분입니다. 아픔을 느끼면 빨리 고치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 방법입니다. 레위기 26:3-4에는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 비를 그 시후에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수목은 열매를 맺을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규례를 지키면 더하십니다. 사람을 더하십니다. 산물을 더하십니다. 건강을 더하십니다. 이 놀라운 더하심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믿음이 굳어질 때에 날마다 더합니다.

5절은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고 합니다. 믿음이 굳어지면 수는 날마다 더해지는 법입니다. 선다싱은 “은사를 구하지 말고 은사를 주시는 분을 구하라. 생명을 구하지 말고 생명을 주시는 분을 구하라. 그러면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이 더해질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생명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구하면 더하게 하십니다. 외적 발전은 내적 신앙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믿음이란 내적 신앙은 외적 성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이번 사경회의 은혜와 감격을 아직 간직하고 계시지요? 사경회마다 많은 은혜를 받지만 이번 사경회는 우리 교회에 잘 어울리는 말씀의 잔치였습니다. 강준민목사님도 우리 교회의 신앙적 수준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강준민목사님의 저서에 대한 저자사인회가 있었습니다. 이곳에 왔던 두란노서원이나 기독교서회 담당자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수준높은 교회라고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교만하지는 마세요. 믿음이 굳어질 때 하나님의 사람은 날마다 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치입니다. 우리 교회는 믿음이 굳은 교회입니다. 이제 그 수가 날마다 더할 차례입니다. 나폴레옹은 “위기는 잘못는 교회된 결정에서 보다는 결정을 연기하는데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1829년 영국에서 태어난 윌리엄 부스는 어렸을 때부터 평생 다른 사람 위해 봉사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난하지만 남의 집 상점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저녁이면 틈틈이 성밖 판자촌에 찾아가서 불쌍한 사람을 열심히 도와주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날마다 성취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날마다 더해갔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이 종래 구세군을 창설하여 영국인의 존경받는 신앙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6:33은 말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작은 신앙은 크게 더하는 은총을 입습니다.

결론

마이클 야코넬리는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성장에 따른 문제점은 느린 성장 아니라 급히 서둘러 성장하려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조급병입니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합니다. 급성장을 자랑거리로 생각합니다. 어떤 버섯은 여섯 시간에 다 자랍니다. 호박은 육개월이면 자랍니다. 그러나 참나무는 육년이 걸리고, 건실한 참나무로 자태를 드러내려면 100년은 족히 걸린다고 합니다. 날마다 서서히 더하는 것이 보람이며 아름다운 일입니다.

날마다 더 나은 삶은 우리의 신앙에도, 경제에도, 건강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욱 노력하고, 날마다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일을 기대하십시오.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이 펼쳐집니다. 날마다 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내일은 우리에게 더하는 더 나은 삶이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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